129화 걱정할 필요 없어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하나쯤 운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많아봐야 1년에 10억 정도의 지출을 각오하면 되는 일이니.
물론 예전 같았으면 이 10억도 아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혜성 그룹 정도의 규모라면 10억은 그리 부담스러운 액수가 아니었다.
홍보 효과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한 번 긍정적으로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래, 그건 네가 알아서 결정해봐. 반드시 야구단을 창립해야 하는 것은 또 아니니 말이야.)
노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제를 전환하였다.
(빅 5가 되어가고 있으니, 슬슬 다른 재벌들의 견제가 들어오겠구나.)
“다른 기업들의 견제는 지금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뭘 새삼스러운 것을 말한다는 듯이 물었다.
백화점과 유통에서는 샤롯 그룹이, 전자에서는 일성 그룹이, 그리고 자동차에서는 정우 그룹과 미래 그룹이 혜성 그룹을 견제하고 있었다.
혜성 그룹의 직원을 빼앗아가는 것은 거의 일상적인 수준이었고,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린다던가, 공권력을 동원하는 식의 추잡한 견제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다른 재벌들의 견제가 들어올 거 같다는 노사의 말이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공격이 시작될 거야. 정우 그룹도 그렇고, 혜성 그룹이 빅 5가 되기를 원하는 재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
노사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조금 걱정이 들기는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적만 많지, 아군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세계 그룹 정도만이 든든한 동맹이랄까.
물론 일성 그룹 안에도 이명승 사장이 나의 동맹으로 있었지만, 어쨌든 다른 재벌 그룹과의 관계는 소원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너에게 당했던 고림 그룹과 쌍호 그룹이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두 기업은 이미 저에게 한 번씩 크게 당했는데, 설마 또다시 애먼 짓을 벌이겠습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쌍호 회장은 워낙 자존심이 강하고 소인배 같은 놈이니, 과거의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솔직히 김종우 회장이 다시 덤벼도 무섭지는 않았다.
이미 그의 약점은 손에 쥐어지지도 않을 정도로 많이 찾아냈으니까.
“쌍호야 그렇다 치고, 고림 그룹의 민성준 회장이 설마 저를 또 건들까요? 민성준, 그 사람은 자기 주제를 잘 파악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민성준 회장은 성격이 냉철하면서 현실적이었다.
(곧 회장이 바뀔 거라는 소문이 있어.)
“허, 그러면 민건우 그자가 회장이 되는 겁니까?”
(그래. 너도 알겠지만, 민건우 그놈도 김종우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한 놈이지. 그놈의 성격을 생각하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아.)
노사의 말에 나는 혀를 찼다.
‘어쩌면 귀찮아질 수도 있겠는데?’
위기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성가실 거 같다는 생각만 들을 뿐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빅 5는커녕 재계 10위권에서 맴돌 때도 어렵지 않게 상대했던 게 두 재벌 그룹이었다.
인제 와서 다시 덤벼든다고 위협적으로 느껴질 일은 없었다.
“귀찮을 수도 있으니, 대비는 해야겠군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앞으로는 내가 너의 곁에 오래 머물 수 없을 거 같다.)
“그들을 감시하려고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지 않겠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니 말이야.)
“굳이 노사께서 그렇게까지 수고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만.”
쌍호나 고림의 견제를 대비하기 위해 노사가 직접 나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자 노사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됐다. 쌍호 그룹이나 고림 그룹뿐만이 아니라, 다른 재벌들도 감시해야 해서 내가 직접 나서는 게 맞아.)
“하지만 그들을 전부 감시하려면 노사께서 고생을 많이 하셔야 할 텐데요.”
(귀신이 된 내가 일이라도 많이 해야 살아가는 낙이 있지 않겠냐. 고생을 아무리 해도 과로사할 일은 없으니 괜한 걱정은 할 필요 없다.)
“그렇습니까.”
나는 노사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꼈다.
‘노사가 안 계셨다면 나는 지금쯤 시장 바닥에서 옷을 팔고 있었겠지?’
길바닥에 나앉지 않고, 대기업의 회장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노사의 공이었다.
그런데도 노사는 젠체하지 않고서 언제나 나를 위해 힘을 써줬다.
나로선 그런 노사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혜성 그룹을 발전시키고 가족에게 잘해주는 것만으로도 노사는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노사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그러니, 노사를 위해서 따로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역시 복수밖에 없으려나?’
문뜩 복수란 단어가 떠올랐다.
노사의 은혜를 갚으려면 복수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복수를 하려면 5공부터 심판해야겠어.’
언젠가 5공에 보복을 할 생각이었지만, 노사를 생각하니 더욱더 단호하게 마음을 먹어야 할 거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5공에 복수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 * *
‘픽사를 인수한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군.’
회사에 출근하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스티브 잡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픽사의 이미지 컴퓨팅 HW에 매력을 느끼고 픽사를 인수하였다.
하지만 픽사의 임직원들은 하드웨어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3D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이로 인해 애플의 지분을 팔고 남은 그의 개인재산이 전부 애니메이션 제작 투자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혜성 그룹이 넥스트 사의 지분을 사주니 다행이긴 한데…… 픽사에서도 하드웨어를 제작하지 못한다면 돈이 아무리 생겨도 무의미하단 말이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컴퓨터를 제작하여 애플은 물론이고, 원래의 목표였던 IBM까지 꺾고 싶었다.
하지만 사업이란 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천만 달러나 주고 인수한 픽사조차 HW나 SW가 아닌, 애니메이션 제작이나 하는 상황이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으리라.
딩동.
그때,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헉!”
“보, 보스.”
스티브 잡스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던 직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아무래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직원을 자른 적이 있는 스티브 잡스의 악명을 어디서 들은 모양이었다.
‘무슨 킬러라도 본 얼굴들 같군.’
직원들의 식겁한 표정을 보며 스티브 잡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 사업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바빴기에,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티끌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그 사람의 능력만 중요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애플에서 버림을 받은 뒤, 스티브 잡스는 많은 것을 느꼈다.
자신이 얼마나 오만과 자만에 사로잡힌 사람인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픽사 직원들을 향해 애플에서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산뜻한 아침 인사에 직원들은 놀라서인지 제대로 인사를 받지도 못했다.
그저 뒷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그 정도 반응만으로도 만족하였다.
앞으로 바꿔 나가면 될 일이었다.
첫 단추를 끼었다는 사실에 만족할 따름이었다.
딩동!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추자, 또 한 명의 직원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보스! 좋은 아침이에요!”
“크리스티나, 좋은 아침입니다.”
자신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동양계 여성을 보며 스티브 잡스는 싱긋 웃었다.
크리스티나 김은 그의 비서였는데, 능력도 능력이지만 성격이 참 마음에 들었다.
활달하면서도 붙임성이 좋았다.
악명이 자자한 스티브 잡스에게도 선뜻 다가올 정도였다.
‘혜성의 도움을 받은 게 많아서 한국계를 뽑은 것인데, 최고의 선택이었지.’
스티브 잡스는 마침 생각난 김에 크리스티나 김에게 물었다.
“혹시 혜성이라는 기업을 아십니까?”
“혜성 그룹이요? 물론이죠. 거기가 요즘 TV에 나오는 뉴 코렌드란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잖아요?”
“뉴 코렌드? 그런 자동차도 있습니까?”
“모르셨어요? 혜성 그룹이 가장 유명한 게 자동차인데?”
“호텔이나, 컴퓨터 쪽으로 유명한 게 아닙니까?”
“혜성 그룹에서 호텔이나 컴퓨터 사업도 하던가요?”
그녀의 되물음에 스티브 잡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혜성 그룹이 자동차 사업을 하는 것은 알면서 다른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모습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스티브 잡스가 직접 한국에 가본 결과, 혜성 그룹은 백화점이나 호텔, 전자 쪽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는데 말이다.
‘뉴 코렌드란 자동차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흥미가 생긴 스티브 잡스는 뉴 코렌드를 조사해 보았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한국 기업이라고는 일성 그룹과 미래 그룹 정도밖에 모르는 크리스티나 김이 알 정도인가 궁금했던 것이다.
“혜성이요? 거기가 어디입니까?”
“뉴 코렌드라는 자동차를 만든 회사랍니다.”
“아! 뉴 코렌드요? 들어봤습니다. 최근에 광고하던 곳이죠? 생각해보니 거기 회사가 혜성이었군요.”
“거기, 동양 회사 아닙니까? 저는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군요. 기술력이 부족한 동양 회사의 자동차를 타다니.”
“10년 전에 도요타가 자동차를 출시했을 때도 그런 소리를 들었었죠. 하지만 지금은 꽤 잘 나가고 있지 않나요?”
“맞습니다. 동양 거라고 무시할 수 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야구 선수도 뉴 코렌드를 타는데, 이거 괜찮아 보입니다. 혜성이라는 회사의 기술력도 대단해 보이고요. 반도체에다, 각종 가전제품까지 만든다던데요?”
“호오, 정말입니까? 반도체를 만든다는 걸 보니 기술력이 대단하긴 하겠군요.”
“한번 사진 보면 알 겁니다. SUV인데 어지간한 승용차보다 디자인이 예쁘게 나왔어요.”
스티브 잡스는 픽사의 임직원들이 3D 장편 애니메이션에만 애정을 쏟고 있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들은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은 것인지, 혜성이란 이름은 몰라도 뉴 코렌드란 이름은 알아들었다.
‘혜성 그룹이 수준급의 기업인 것은 한국에 갔을 때 이미 알아봤지만, 우리 회사 사람들까지 알 정도일 줄은 몰랐군.’
이런 회사의 총수가 만으로 29세에 불과하다는 것이 놀랍게만 느껴졌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자신보다 더 명성을 떨치지 않았을까?
심지어 스티브 잡스는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혜성 그룹을 높이 본 것이다.
‘아무래도 한국행을 서둘러야겠어.’
원래는 8월 이후에 갈까도 생각했지만,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빨리 한국으로 가서 혜성 그룹 회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최대한 많은 것을 배워야지.’
애플에 있었을 때는 종교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면, 사업적으로 배움을 구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었다.
그때만 해도 자신이 최고라는 확신으로 가득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라졌다.
혜성 그룹의 회장이라면 배움을 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란 걸 내심 인정하였던 것이다.
* * *
나는 오랜만에 이한철 명예 회장을 만나 그동안의 성과를 보고하였다.
“야심 차게 진출했던 일본에서는 따로 성과가 없지만, 미국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보이는 중입니다. 미국에서만 벌써 8백억이 넘는 매출이 발생했을 정도입니다.”
“8백억이라니. 엄청나군.”
“국내를 포함하면 올해 혜성 자동차의 매출은 4천억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내 말에 이한철 명예회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가 그룹을 이끌었을 때만 해도 연 매출 4천억 아니, 3천억 이상인 계열사는 혜성 건설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설립한 지 불과 몇 년이 채 안 된 혜성 자동차에서 4천억에 근접한 매출을 올릴 것이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반도체와 자동차에 너무 과한 투자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었는데, 너의 말을 들으니,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