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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28화 (128/300)

128화 설득만 잘하면 돼

나는 그 뒤로도 아시안 게임과 관련해서 내 생각을 말해주었다.

원래라면 이런 자리에서 조용히 있을 나지만, 윤희봉 장관이 먼저 내 생각을 묻자, 봇물 터지듯 내 의견을 쏟아냈다.

“오오, 그런 방법도 있었군!”

“참신하군요. 역시 젊어서 그런지, 사고가 넓어요!”

“혜성 그룹이 괜히 재계 순위 5위까지 오른 게 아닌 거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재벌 총수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병건 회장이나, 권오중 회장은 내가 이야기하는 내내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두 사람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열성적으로 반응해 주었다.

의외로 윤희봉 장관도 내 의견에 귀를 기울여서 경청하였다.

어리다고 무시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과연 내가 낸 의견이 얼마나 반영될지.’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노사의 세계에서도 아시안 게임은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정부와 재벌들은 물론이요, 일반 국민들까지 그야말로 총력전 마냥 아시안 게임을 준비했으니 어찌 보면 성공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나는 의견만 내뱉고 결과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하였다.

나비효과가 벌어지지 않는 한, 아시안 게임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으니 더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내 의견을 하나라도 받아들여서 그게 잘 된다면, 나도 나름대로 얻는 게 있겠지.’

만찬회가 끝나고 나는 양희수 회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어떠십니까?”

“사위 놈들이 나를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지, 하루도 싸움을 멈출 날이 없어서 화가 날 지경이네.”

“한제인 부회장이 구설수에 올랐다는데, 그것도 그럼?”

나는 뻔히 알면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양희수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 부회장은 그럴 사람이 아닐세. 후계 다툼 때문에 엄한 꼴을 당하고 있는 거지, 실제로는 청렴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야.”

“그렇습니까?”

“내가 후계자를 정하기 전까지는 아마 계속 고초를 겪을 거 같네. 어쩌면 부회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수도 있고.”

양희수 회장의 말에 나는 눈을 빛냈다.

세계 그룹의 한제인 부회장은 내가 탐내고 있는 인재였다.

만약에 그가 양희수 회장 사위들의 농간에 휘말려 퇴사하게 된다면 잽싸게 혜성 그룹으로 영입할 생각이었다.

물론 양희수 회장에게 이런 내 본심을 말할 수 없었기에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회장님이 한제인 부회장을 믿고 있다면, 굳이 좌천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아무리 나라도 사내 여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네. 사위들의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말일세.”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양희수 회장의 반응을 보니, 이미 마음의 결정이 내려진 듯싶었다.

‘하긴, 양 회장님은 기현이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니, 이참에 한제인 부회장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한제인 부회장은 세계 그룹 내에서 입지가 상당한 편이었다.

설령 양기현이 회장직을 물려받더라도 한제인 부회장이 건재하다면 제 뜻대로 그룹을 경영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터.

그러니 양희수 회장이 미리 나서서 자신의 오랜 측근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볼 수 있었다.

“회장님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한제인 부회장은 다 이해해 줄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네. 제가 아는 한제인 부회장이라면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내 말에 양희수 회장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 듯, 표정이 좋아졌다.

나는 그런 양희수 회장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게, 후계자 자리를 왜 미리 정하지 않으셔서 이런 상황을 만드셨는지.’

뭐 아들을 늦게 낳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한제인 부회장이란 인재를 놓치게 되었으니 세계 그룹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선택이었다.

솔직히 한제인 부회장에게 잠시 회장직을 맡기고 양기현이 40대쯤 됐을 때, 회장직을 물려받는 게 최고의 선택이었을 텐데 말이다.

* * *

“이 회장,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나?”

양희수 회장과의 대화가 끝나니 이번에는 다른 재벌 총수가 내 발을 붙잡았다.

‘오늘 왜 이렇게 나를 찾는 사람이 많아?’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대화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부른 사람은 일성 그룹의 이병건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아까, 윤희봉 장관 앞에서 한 이야기는 잘 들었네. 확실히, 자네의 식견이 남달라 보이긴 하더군.”

그렇게 실컷 노려봐놓고, 뒤늦게 칭찬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과찬이십니다.”

“혹시 야구나 축구에 관심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게. 선배 구단주로서 조언해 줄 테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즘, 반도체에 관심이 많아 보이더군.”

역시 반도체가 본론인 거 같았다.

나는 그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처음 혜성 그룹 회장이 되었을 때부터 반도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괜히 천억이 넘는 돈을 투자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반도체에 관심이 많아서 우리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를 탐내는 건가?”

이병건 회장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크게 의미는 없었다.

상대는 무려 일성 그룹의 회장이었다.

내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자네 때문에 골치가 아파졌어.”

“그렇습니까?”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문제야. 그런데 굳이 우리끼리 피를 봐야겠나? 같은 한국 업체이자, 반도체 생산 업체인 우리가?”

“글쎄요. 이익을 두 회사가 나누는 것보다 한 회사가 독점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일성 그룹이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일성 그룹은 온갖 악재가 겹치며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도체 사업부의 적자 행진이 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끼친 결과였다.

이명승이 제일제당 사장으로 복귀하면서, 일성 그룹 내부적으로 후계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고 말이다.

‘더군다나 이병건 회장의 건강도 상당히 안 좋지. 노사가 살던 세계 기준으로, 길어봐야 1년일까.’

지금 육안으로 봐도 건강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피부색도 칙칙했고, 아까 회의 도중에 기침을 계속하는 모습이, 당장 병실로 가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니 나로서는 자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일성 그룹은 여전히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했지만, 지금의 혜성 그룹이라면, 아니, 내년의 혜성 그룹이라면 우열을 다투는 게 가능했다.

내년의 혜성 그룹은 더욱 커져 있을 것이고 반대로 일성 그룹은 추락을 거듭하는 상황일 테니까.

“욕심이 지나치군.”

“압도적인 1위가 되려고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거지, 어정쩡하게 매출이나 올리려고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게 아닙니다.”

“타협할 생각은 정말 없는 건가?”

“부회장에게 말했듯, 고민은 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이병건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실제로도 틀린 생각은 아니었고.

“그럼 이걸 물어보지. 만약 내가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하기로 한다면, 혜성 그룹에서 인수가로 얼마까지 쳐줄 수 있나?”

나는 눈을 빛냈다.

그저 가정일 뿐이지만, 여기까지 끌어냈다는 게 중요하였다.

‘잘만 하면 이 자리에서 일성의 반도체 사업부를 인수할 수도 있겠는데?’

설득만 잘하면 된다.

설득만.

물론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겠지만 말이다.

“천억까지 쳐줄 수 있습니다.”

“천억이라···.”

원래는 7백억 정도 제시하고 간을 보려 했는데,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천억을 불렀다.

어떻게든, 매각 의지를 불러일으키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 정도 금액으로는 반도체 사업에 투자한 금액을 복구하기는커녕 수백억의 적자로 끝나는 셈이겠군.”

아쉽게도 이병건 회장은 천억이란 말을 들었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반응이었다.

하긴, 반도체 사업으로 지금까지 본 적자가 천억이 넘는데 인수가를 높게 부른다고 기뻐할 수는 없었다.

“만약 매각을 결정하신다면, 잔금은 이번 달 안에 지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번 달 안에? 그게 가능한 일인가?”

천억을 듣고도 무덤덤하던 이병건 회장은, 한 달 안에 잔금을 지급해 주겠다는 나의 말에는 매우 놀랐다.

제아무리 빅 4의 기업들이라 해도 그렇게 단기간에 천억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몇 주 정도 시간이 주어진다면 천억 정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제 자금은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국내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데, 자네가 일본 부동산에 투자한다고 하더군. 혹시 그 소문이 사실인가?”

“일본 부동산에도 투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 말고 미국에서도 상당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고 말입니다.”

평소였으면 숨겼겠지만, 이번만큼은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이병건 회장이 혀를 내둘렀다.

“허,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양희수 회장님도 저에게 투자를 맡기시고 다섯 배 이상의 이익을 보셨습니다.”

“다섯 배? 몇 년에 다섯 배인가?”

“1년도 채 안 걸렸습니다. 작년 상반기부터 도쿄의 땅을 사들였으니 말입니다.”

“……!”

눈을 부릅뜨는 이병건 회장의 모습을 보며 나는 쾌재를 불렀다.

‘양 회장이 부러우면 어서 나에게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이 회장님의 돈도 대신 투자해드리겠습니다.’

나와 거래하면 얻는 이익이 천억뿐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면 이병건 회장의 입장에서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겠지.

“혜성 그룹이 왜 그렇게 돈이 많은가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었군?”

이병건 회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하는 일은 조금 더 고민해보겠네. 그래도 자네의 제안이 매력적이니,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민하지 않을까 싶어.”

“그렇습니까?”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제는 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내가 이병건 회장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일성 회장에게 재미있는 제안을 했구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병건 회장이 과연 제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글쎄, 일성 회장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지 않겠냐?)

“그랬으면 좋겠군요.”

아마 당장 결론이 날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이병건 회장이었어도 내년이 되어야 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뭐, 그때는 건강이 크게 악화하여 정상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너도 야구단을 하나 차리는 게 좋을 거 같다.)

“예? 야구단이요?”

나는 갑작스러운 노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너도 야구를 좋아했잖아? 돈도 많은데, 굳이 안 차릴 필요가 있나?)

“제가 야구를 좋아하는 것과 구단주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 아닙니까. 그리고 야구단을 차리면 적자를 각오해야 할 텐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 싶습니다.”

(이유야 있지. 정부와의 관계도 있을 것이며, 전 국민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야구단 하나쯤은 필수야.)

“정부는 그렇다 치고 국민들은 무슨 말씀이신지?”

(10대 재벌들은 거의 다 야구단을 하나쯤 갖고 있잖아? 사람들 인식에는 이게 은근히 중요하단 말이지. 야구단이 없으면 10대 재벌로 인정을 안 해줄 수도 있어.)

노사의 말을 들으니, 야구단이 필요할 거 같기는 했다.

‘하긴, 신문만 봐도 야구의 홍보 효과가 상당해 보이기는 하지.’

신문에는 매일같이 일성 라이온즈가 누구를 이겼다느니, 샤롯 자이언츠가 누구에게 졌다느니, 그런 식의 보도를 내고는 한다.

이게 다 광고라고 생각하면 따로 광고비도 주지 않고 엄청난 광고 효과를 누리고 있는 셈이었다.

‘야구단을 하나 운영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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