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많이 급한가 보네
인척 관계가 되었다는 이유로 이명승 사장을 도울 생각 따윈 티끌만큼도 없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호승 부회장의 제안을 듣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고민할 만한 제안이긴 하겠어요. 두 회사가 혈맹이 되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니 말이에요.”
“예, 공동 연구까지 한다고 하니, 혜성 반도체도 얻을 게 정말 많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 회장께서는 어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아직 확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이명승 사장님께 폐가 될 거란 생각 때문에 이호승 부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주저가 되더군요.”
“허어, 저 때문에 손해를 보셔야 되겠습니까?”
“가족인데 어찌 폐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이명승 사장은 감격의 눈빛을 보냈다.
“다만, 이번 일과 관련해서 이명승 사장님께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이 회장이 말하는 거라면 다 들어줄 각오가 되어 있어요. 저는.”
“혹시, 반도체 사업부를 정리하게끔 일성 그룹 내부의 여론을 형성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이명승 사장에게 받아낼 것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이명승 사장은 누가 뭐래도 일성 그룹의 장남이었다.
더군다나 제일제당의 사장이 되면서 일성 그룹 내부에서 어느 정도의 입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그가 반도체 사업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만 모아줘도 나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흠…….”
이명승 사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 요구는 결코 쉽게 들어줄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회장의 말대로 하고 싶기는 한데, 부친께서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우려가 되네요.”
“자존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련을 보이시는 것일 뿐, 이병건 회장님도 속으로는 반도체 사업부를 포기하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일성 그룹의 내부 인사도 아닌 내가 이런 말을 하니 뭔가 우습게도 느껴졌지만, 이명승 사장은 진지하게 경청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조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일성 그룹의 임원들도 알지 못하는 내부 정보까지 알려준 적이 있었으니 그가 나를 신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니 사장님께서 여론을 모아 이병건 회장님께 강하게 주장하신다면, 이병건 회장님도 특단의 결정을 내리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 특단의 결정이란 반도체 사업부를 나에게 매각하는 일이었다.
‘일성 반도체 정도라면 천억 아니, 1천 5백억을 주고도 살 의향이 있는데 말이야.’
내가 천억 이상을 주고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를 인수한다면 사람들은 미친놈 취급할 것이 분명하였다.
아마 혜성 그룹 내부에서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을 테지.
한해 적자만 천억인 회사였으니, 그런 회사를 비싸게 주고 사면 미친놈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미래의 일성 반도체를 생각하면 천억도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내년에 있을 반도체 호황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알겠어요. 이 회장의 말대로 한번 해볼게요.”
“만약 일성 그룹에서 반도체 사업부를 정리하기만 한다면, 일성 그룹의 자금난은 빠르게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호승 부회장의 입지도 크게 흔들리게 될 것이고 말입니다.”
내 말에 이명승 사장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반도체 사업부를 정리하는 것이, 후계자가 되기 위한 최선의 길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 *
-아직 결정을 못 내리셨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호승 부회장의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많이 급해진 모양이군.’
노사의 말을 들어보니, 이번에 또 한 번 이병건 회장에게 크게 혼났다고 한다.
아마 지금도 이병건 회장에게 한소리를 듣고 전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예.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혜성 그룹에 절대 손해가 가는 제안이 아닙니다. 손해는커녕 오히려 득이 되는 제안입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는데…….”
-어떤 게 더 필요하십니까? 말씀만 해주십시오.
어떤 게 더 필요하냐고?
그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였으니까.
하지만 대놓고 요구해봤자, 안 될 걸 뻔히 알기에 그저 의뭉스러운 태도를 견지하였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죠. 제가 그려놓은 청사진이 있었는데, 이호승 부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동안 세운 계획을 바꿔야 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언제쯤 답변을 주실 수 있으실지.
“글쎄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이호승 부회장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보채지는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누가 갑인지는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답장을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그러겠노라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과연 어떻게 되려나. 이병건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포기할까?’
딱. 딱.
책상을 두드리며 상념에 잠겼다.
현재 일성 그룹은 내부적으로 큰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성의 장남인 이명승이 공식적으로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언론에서도 자극적인 보도를 쏟아냈는데, 반도체의 적자가 천억이라는 사실을 거론하며 반도체를 포기하지 않을 시, 일성 그룹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식의 보도를 하였다.
심지어 이호승 부회장의 친정인 고려일보에서조차 반도체 사업은 시기상조라는 식의 논조로 보도할 정도였다.
‘정작 생각지도 않은 다른 기업들은 반응을 보이는데, 이병건 회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도무지 모르겠군.’
반도체 시장이 워낙 침체해서 그런 것일까?
은성 그룹에서 반도체 투자를 점점 줄이기 시작했다.
미래에서는 아예 발을 빼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라면 진즉에 반도체 회사를 설립하고도 남았을 정우에서는 반도체 쪽으로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병건 회장은 아직 반도체를 포기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아마, 내년까지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 아닌가 싶었다.
따르릉!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상념에서 깬 내가 수화기를 들어 올리자, 미국에 있는 신은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저 신은규입니다.
“신은규 대표님. 어쩐 일이십니까.”
-스티브 잡스와의 협상이 끝났다는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연락드렸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노사처럼 스티브 잡스와의 합작을 가슴 한편에서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됐습니까?”
-지분 30%를 5천만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딱 원하는 금액으로 인수하였다.
‘더 부를 줄 알았는데, 돈이 급했나 보지?’
픽사를 살리기 위해 사재를 털었다더니, 그래서 돈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뭐가 됐건 나로선 좋은 일이야.’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 사가 지금 당장은 소프트뱅크만큼 가치가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애플에 인수되지 않았어도 넥스트 사가 2백 조의 회사가 될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넥스트 사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운이 좋으면 마이크로소프트에 버금가는 거대한 IT 회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가 여름쯤에 한 번 찾아가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으로 직접 말씀입니까?”
-예. 아시안 게임도 있고 해서 한국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또 방한한다고?
그러면 벌써 세 번째 방한인가.
어지간히도 한국이 좋은 모양이었다.
뭐, 그냥 나를 보러 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스티브 잡스가 와준다니 다행이야. 내가 미국에 갈까도 생각했는데 말이지.’
노사의 꾸준한 가르침 덕에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은 나 또한 인정하고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올 3월에 상장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시가총액만 봐도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개 소프트웨어 회사의 시가총액이 우리 돈으로 5천억이 넘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넥스트 사와의 협력이 중요하였다.
스티브 잡스의 명성이라면 실리콘밸리의 우수한 개발진을 꾸릴 수 있을 것이고, 그 개발진으로 노사가 알고 있는 소프트웨어들을 개발한다면 단숨에 마이크로소프트만큼 사세를 확장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그나저나 아시안 게임이 곧이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시안 게임은 나와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당장 다음 주에 아시안 게임 준비를 총괄하는 윤희봉 장관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으니, 아예 나와 상관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성가시기 그지없군. 정부에게서 따로 얻어낼 것도 없는데, 쓸데없이 돈이나 쓰게 생겼어.’
아마 비인기 스포츠를 하나 정도 맡아야 할 터.
나로서는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정부의 지시를 거절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 * *
문을 열고 들어온 정우의 권오중 회장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보더니, 도레미 그룹의 정성완 회장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은 아직 안 왔나?”
“예, 하하. 아무래도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한 거 같습니다.”
“쯧. 일찍 일찍 좀 다닐 것이지.”
권오중 회장은 혀를 차며 자신의 자리로 배정된 곳에 가서 앉았다.
“그런데 권 회장님. 체육부 장관이 저희를 부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아시안 게임이 코앞이니 부른 거 아니겠어?”
“뭐 그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확히 무슨 지시를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정부가 우릴 부르는 이유는 하나뿐이니까. 바로 돈이지.”
“아…….”
“공원을 조성하라면 공원을 조성하고, 체육관을 만들라고 하면 체육관을 만들면 돼.”
정우 그룹은 빅 4에 속하는 대기업임에도 정부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편이었다.
전 정권 때부터 정부에게서 온갖 특혜를 받아 성장한 기업이었기에 정부를 상대하는 대관 업무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었다.
그 덕에 한강 개발 사업에도 주요 공사를 책임지며 건설 쪽으로 상당한 매출을 기록하는 중이었다.
“그렇습니까?”
“괜히 말 안 듣고 정부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좋은 꼴은 못 볼 거야. 세계 그룹처럼 재계 순위가 확 낮아질 수도 있어.”
“하지만 혜성 그룹은 정부에게 미움을 받고 있음에도 오히려 재계 순위가 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정성완 회장의 말에 권오중 회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혜성 그룹에게서 거하 자동차를 빼앗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이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 거하 자동차의 뉴 코렌드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린놈이 과연 언제까지 잘 나갈까? 돈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업을 마구 벌이는 놈이야. 지금 잘 나간다 해도 오래가지는 못할 거다.”
권오중 회장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혜성 그룹이 어디서 돈을 모아오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단기간에 외형을 지나칠 정도로 확장하였다.
사실 정우 그룹도 내실 경영과는 거리가 먼 기업이었으나, 혜성 그룹은 정우 그룹보다도 훨씬 공격적이었다.
당장 반도체에 투자하는 돈만 수백억이라고 하지 않은가.
아무리 다른 계열사에서 매출이 잘 나오고 있다 해도, 수백억의 현금을 한 번에 사용한다면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동차에까지 상당한 규모의 투자를 하고 있다지? 정말 만족할 줄 모르는 놈이야. 빅 4라는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 났나?’
철컥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인물이 안으로 들어왔다.
낯익은 인물이란 다름 아닌, 혜성 그룹 회장, 이한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