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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25화 (125/300)

125화 아시안 게임이 나랑 뭔 상관이야

잠시 당혹해하던 이호승 부회장은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냉철한 사업의 세계이기에 더욱더 담합을 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담합보다는 홀로 독점하는 게 남는 것도 더 많을 거 같습니다만.”

내 말에 이호승 부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희 일성 그룹이 있는데 어떻게 혜성에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독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지 마시고 저희와 동맹을 맺는 것이 좋지 않을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성 그룹으로 하여금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게 만든다면 저희가 시장을 독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반도체 사업을 포기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호승 부회장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하긴, 나였어도 화가 날 수밖에 없었을 거 같았다.

대놓고 너희 사업이 망할 거라고 악담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정말 그럴까요?”

하지만 나는 그의 반응에 코웃음을 쳤다.

“그룹 내외적으로 반도체 사업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일성 전자 임원들의 불만이 상당하다고?”

“그것은 혜성 그룹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물론 혜성 그룹에서도 반도체 사업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매년 적자 행진을 거듭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오죽하면 혜성 그룹이 반도체 사업에 도전한 일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뭐, 저희도 반발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신경 써야 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른 계열사에서 워낙에 매출이 잘 나와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혜성 전자와 거의 엇비슷한 규모의 적자를 기록하던 혜성 자동차가 올해 들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곧 흑자 전환까지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다른 계열사들 역시 캐시카우로서 훌륭하게 한몫을 해주고 있었다.

반도체가 독립하면서 혜성 전자 역시도 곧 흑자 전환에 성공할 예정이고 말이다.

“하지만 일성 그룹은 어떻습니까? 매출이 아무리 높아도, 현금 유동성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지 않습니까?”

“…….”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 적자가 올해 천억이 넘을 거라죠?”

“겨우 천억의 적자로 일성 그룹이 어떻게 되지는 않습니다.”

“천억이 끝이 아니란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세 개의 라인을 돌린 채로 출혈 경쟁을 강요한다면 내년에는 천억 이상의 적자를 감수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이호승 부회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마 그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빅 4에 포함되지도 않은 혜성 그룹에게 협박을 당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가격을 조정하면 서로에게 이익이 될 텐데,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했던 말을 반복하게 하시는군요. 저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확고한 지위를 원합니다. 이런 저에게 있어 일성 전자는 경쟁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요구하실 게 있다면 최대한 들어주겠습니다.”

드디어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 전부를 원합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입니까?”

“예. 당연히 저는 진심입니다.”

이호승 부회장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절대 들어줄 수 없는 요구입니다.”

“일성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데,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셔도 되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일성 그룹 회장님께서도 반도체 사업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던데.”

“낭설입니다. 저희 회장님께서는 도쿄에서 선언하셨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반도체 사업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저는 설령 다른 계열사를 매각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도체 사업을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그룹의 미래는 반도체에 달려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호한 그의 대답에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왕이면, 설비 증설에 투자하려는 돈과 개인 자금 얼마를 더 붙여서 일성 반도체를 인수하면 좋을 텐데.’

이렇게 된 이상 전쟁을 통해 일성 반도체를 가져오던가, 아니면 이호승 부회장의 협상안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거 같았다.

“이한성 회장님,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마시고 다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글쎄요. 저에게 요구 사항을 물어볼 게 아니라, 일성에서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말씀해주시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일성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게 있기는 할까?

결혼은 이미 했으니 됐고, 돈은 내가 더 많았다.

그렇다고 계열사를 매각하기엔 빅 4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터.

“반도체를 공동으로 연구하는 조건이면 어떻겠습니까?”

“흠.”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일성 전자와 공동 연구라.’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좋았다.

일성 반도체는 세계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일본과 미국의 기술을 따라잡고 있었다.

혜성도 일성의 뒤를 쫓고 있었지만, 아마 근시일 내에 일성의 기술력을 따라잡기는 힘들 것이다.

그만큼 양사의 기술력 차이는 큰 편이었다.

“나쁘지 않군요.”

“그렇습니다. 혜성 반도체의 기술력도 미국과 일본을 놀라게 할 정도니, 양사가 공동으로 연구하면 서로 얻을 게 많을 겁니다.”

“다른 것은 더 없습니까?”

“여기서 더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호승 부회장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 정도 줬으면 됐지, 뻔뻔하게 뭘 더 요구하냐는 반응이었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의 제안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고민한 뒤에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공동 연구가 탐이 나기는 했다.

하지만 더 탐이 나는 것은 일성 반도체 그 자체였다.

‘일성 반도체만 인수한다면 공동 연구도, 가격 담합도 필요 없다. 두 회사가 하나로 합병될 테니까.’

* * *

6월이 되자 나는 서둘러 반도체 공장 착공식을 하였다.

자금은 충분했으니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짝짝짝!

착공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조일선 경상북도지사부터 다른 그룹의 인사들, 그리고 지역 국회의원과 고위 관료까지.

하객 면면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기자들도 신문사와 TV 방송국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그 숫자만 해도 백 명이 넘었다.

‘회사를 새로 인수한 것도 아닌데, 많이들 찾아왔군.’

그룹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거 같아서 괜히 뿌듯했다.

물론 이번에 새로 짓는 공장의 규모가 워낙 크니까 이렇게들 모이는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지금 반도체 시장의 상황이 좋지 않은데 이렇게 서둘러 공장을 확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혜성 반도체를 독립시킨 이유가 혜성 전자의 기업 공개를 위해서라는데, 혹시 상장하실 계획이 있으십니까?”

“반도체 기술력을 얼마나 확보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찰칵! 찰칵!

착공식을 기념하는 시삽 세리머니 절차까지 끝이 나자, 기자들이 이때다 싶어서 질문을 던져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직접 상대해 주지 않았다.

이 자리에는 혜성 반도체의 대표인 김정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내가 상대한 것은 착공식에 참석한 귀빈들이었다.

“축하해요, 이 회장!”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감사하기는요. 저야말로 도민들을 대신해서 이 회장께 대신 감사함을 전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조일선 경북지사는 환하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나를 본 것이 이제 겨우 두 번째인데 나를 대하는 태도만 보면 무슨 친혈육을 대하는 거 같았다.

사실 그의 태도가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혜성 반도체에서 구미에 역대 최대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 상황이었다.

도지사로서 공장을 유치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특히 이번에 건설되는 구미 공장처럼 규모가 큰 공장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는데, 실업률 지표 값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정 고마우면 나중에 중앙 정계에 가서도 나를 잘 도와주시길.’

지금이야 일개 경북지사지만 나중엔 서울시장을 거쳐 장관직까지 오를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와 인맥을 맺어도 득을 봤으면 득을 봤지,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거 같았다.

“이 회장,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경북지사와의 대화가 끝나자 이번에 다른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다름 아닌, 윤희봉 체육부 장관이었다.

“윤희봉 장관님.”

“장관이라 부르지 말고 위원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제가 요즘 아시안 게임 준비를 총괄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혜성 그룹 덕에 구미가 눈부시게 발전하겠군요. 허허.”

“아, 장관님의 고향이 구미라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맞아. 그래서 참 혜성 그룹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윤희봉 장관도 경북지사가 지었던 표정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자신의 고향이 내 덕에 발전할 거란 생각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는 거 같았다.

“앞으로도 구미에 신경을 써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쯤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죠?”

“시간이라면?”

“재벌 총수들 모아서 아시안 게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눠 볼까 해요.”

“그렇습니까?”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시안 게임이 도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뭐, 외국인이 들어올 것을 생각해서 호텔이나 편의점을 더 짓기는 했지만, 정부 쪽으로 연관될 일은 없을 텐데?’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윤희봉 장관이 심기가 불편해진 것인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불참하시지는 않으시겠죠?”

“물론입니다. 위원장님이 부르시는데 어찌 불참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요. 하하, 혜성 그룹은 어떤 스포츠도 담당하고 있지 않으니, 이번에 어디든 담당해야 할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썩은 미소를 지었다.

뭐 때문에 부르나 했더니 결국 그런 이유였다.

‘나도 테니스나 복싱 같은 곳에 후원해야 하는 건가.’

이한철 명예회장이 스포츠 단체 몇 곳을 후원하고 있기는 하지만, 윤희봉 장관의 반응을 보니 앞으로는 그룹 차원에서 스포츠 단체들을 후원해야 할 거 같았다.

그것도 억 단위의 규모로 말이다.

‘쯧, 귀찮게 됐군.’

귀찮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5공이 마음에 안 들어도 이런 일에서까지 발을 뺀다면 그건 싸우자고 시비 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 정도의 가벼운 요구는 그냥 들어주기로 하였다.

“귀빈들이 많이 참석했군요. 정부의 요인들도 그렇고, 혜성 그룹의 달라진 위상을 보는 거 같아 제가 다 뿌듯하게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접견한 상대는 다름 아닌, 일성 그룹의 이명승 사장이었다.

“위상이 달라지다니요. 과찬이십니다.”

“변함없이 겸손하시군요.”

겸손하다니.

요즘의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았다.

나는 피식 웃고는 이명승 사장에게 말했다.

“그새 얼굴이 많이 좋아지신 거 같습니다.”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얼굴은 2년 전에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다 이 회장님 덕입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가르침을 내려주셨지요. 그 가르침 덕에 임원들에게도 그리고 부친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명승 사장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어째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감사 인사를 하는 거 같았다.

‘진짜로 나를 제갈량 취급하는 느낌이군.’

제갈량 하니까, 이명승 사장의 분위기가 유비를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성격 자체도 유비와 비슷한 거 같았고 말이다.

물론 이명승 사장이 누구를 닮았든 간에 내가 그를 주군처럼 생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반대면 또 모를까.

“혹시 아시고 계십니까? 이호승 부회장이 저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안 그래도 유정석 대표가 그 이야기를 하더군요.”

“이호승 부회장이 저에게 제안하더군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공평하게 절반씩 나눠 갖자고 말입니다.”

“그런가요?”

이명승 사장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하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후계 경쟁의 성패가 결정될 텐데.’

나는 결코 아무런 대가 없이 이명승 사장을 도울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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