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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24화 (124/300)

124화 국적이 그리 중요해?

아니나 다를까.

“네가 직접 가서 혜성 회장과 이야기를 나눠봐라.”

“메모리 반도체의 가격 경쟁을 중단하자고 이야기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반드시 합의를 이루어내야 한다. 반드시!”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말을 하자, 이호승은 침음을 삼켰다.

‘과연 가능할까?’

회의적이라는 생각을 들었다.

그와 한성의 관계는 사실상 적대 관계나 다를 게 없었다.

이미 몇 차례 신경전이 오가기까지 한 상황.

한성이 이명승을 지지하는 한, 그와 원활한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차라리 아버지가 직접 가는 게 나을 텐데…….’

일성 반도체의 미래를 생각하면 일성 회장인 이병건이 직접 움직이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이야기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의 무능만 드러내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합의를 이루어내야 할 거야. 만약 합의에 실패한다면 반도체 사업은 재고할 수밖에 없어.”

“……!”

이호승은 눈을 부릅떴다.

반도체 사업을 재고하겠다니.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반도체는 그룹의 미래입니다.”

“나라고 그걸 모를까? 그런데 지금 적자 나는 꼴을 보면, 미래를 생각하다가 그룹이 통째로 망하게 생겼으니 문제라는 거다.”

지금까지 누적된 일성 반도체의 적자만 해도 2천억이 넘었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려 천억이 넘는 적자가 예견된 상황이었다.

아무리 일성 그룹이라 해도 이 정도의 적자는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일성 전자에서 나는 매출로도 감당하지 못해, 다른 계열사의 지원을 받아야 했을 정도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반도체를 지키고 싶으면 혜성과 이야기를 잘 끝내. 그러면 나도 계속해서 반도체를 지원해 줄 테니.”

이호승은 막막한 기분을 느꼈다.

반도체 사업을 접으면 일성 그룹도 일성 그룹이지만, 이호승 그 개인도 몰락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안 그래도 임원들의 불만이 누적될 대로 누적된 상황.

그를 향한 의구심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쩌면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는 즉시, 이호승은 부회장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수도 있으리라.

“알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한성 회장과 합의를 이뤄내겠습니다.”

“믿겠다.”

이병건은 흡족한 표정을 짓다가, 돌연 기침을 하였다.

“콜록! 콜록!”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으면? 콜록!”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됐다. 호들갑 떨 필요 없어. 그냥 단순히 감기에 걸렸을 뿐이다.”

“하지만…….”

“콜록! 그만 가봐. 한 시도 바쁜 상황에 이런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마라.”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쫓겨나듯, 서재에서 벗어난 이호승은 굳어진 얼굴로 상념에 잠겼다.

‘아버지의 건강이 날이 갈수록 악화하는 거 같군.’

머릿속에 잠시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아직 궁지에 몰린 상태도 아닌데 위험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 늦기 전에 후계자 자리를 인정받을 필요가 있어. 지금처럼 어정쩡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라도 했다간, 성가신 일이 생길 테니 말이야.’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번 반도체 건을 잘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혜성 그룹과의 합의만 이루어진다면 만사가 해결될 거 같았다.

* * *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예, 들어가십시오.”

“이 회장, 이번에도 저의 믿음에 성공으로 보답해 주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은행장님.”

이광수 은행장이 떠나자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겨우 5백억 빌려주는 거 가지고 아주 유세를 떠는군. 반도체의 반도 모르는 사람이 말이야.”

돈을 빌려줄 거면 그냥 빌려줄 것이지, 온갖 훈수를 다 두었다.

기회가 생긴 김에 내 윗사람 행세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하, 회장님도 통이 참 크시군요. 5백억이라면 어지간한 회사 하나를 통째로 인수할 수 있는 금액인데 말입니다.”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진봉현 비서실장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혜성 그룹의 회장이 이 정도의 기백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5백억은 분명 큰돈이었다.

하지만 나 정도 되는 사람이 벌벌 떨어야 할 돈은 아니었다.

‘이제 5백억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룹 매출도 조 단위가 된 지 오래였다.

올해는 2조를 훌쩍 넘을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

이뿐만이 아니라, 내 개인 자산도 천문학적이었다.

미국에서도 한화로 따지면 천억이 넘는 자산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수천억, 아니, 소프트뱅크의 가치까지 고려하면 거의 조 단위의 자산이 있었다.

국내에서 굴리는 자금도 결코 적지 않았고 말이다.

그렇기에 5백억 빌려주는 거로 유세 떠는 이광수 은행장이 꼴불견처럼 느껴졌다.

“회장님의 모습을 보니 혜성 그룹이 빅 5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입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처럼 빅 5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긴 했다.

‘사실 지금도 빅 5로 인정받아도 이상할 게 없긴 하지.’

재계에서는 거의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개인 자산만 해도 압도적인 1위고 전자와 자동차, 건설 등등의 굵직굵직한 사업에서도 높은 점유율을 보이니, 혜성 그룹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빅 5가 되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마 올해 안에는 언론에서도 저희 혜성을 빅 5라고 부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하. 대단하십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재계 순위 10위에 오른 것으로 크게 자축했었는데…….”

“대단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빅 5라는 지위도 결국 앞으로 넘어야 할 언덕 중 하나의 언덕일 뿐입니다.”

얼마 전까지야 빅 5라는 지위도 크게 탐이 났었다.

정부에서의 취급도 취급이지만, 일단 빅 5가 되면 은행권에서 돈 빌리기도 유리했고, 인재 수급도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빅 5라는 자리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빅 5나 다를 게 없는 상황.

돈도 얼마든지 빌릴 수 있었고, 혜성 장학회로 인재도 손쉽게 수급할 수 있었기에 빅 5라고 불리기 위해 따로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나는 빅 5를 넘어 한국의 독보적인 기업이 되기를 바라였다.

노사께서 말씀해주신, 21세기의 일성 그룹이 가진 영향력, 그 이상을 노리고 있었다.

‘미래의 일성 그룹을 능가하는 기업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는 거다.’

일성 반도체를 인수하든, 아니면 경쟁을 통해 짓밟든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똑똑!

“회장님. 일성 그룹의 이호승 부회장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소희가 그 같은 말을 하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면담을 요청한 시점이 공교로웠다.

하필 일성 반도체를 생각하고 있을 때 나를 찾아오다니.

“면담 목적이 뭐랍니까?”

“반도체 사업과 관련하여 진지한 의논을 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반도체 사업이라.”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갑자기 반도체 이야기를 왜 하려는 것일까?

혜성 반도체가 라인을 증설한다고 하니, 비웃기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나에게 제안할 거리가 따로 있을지도 몰랐다.

‘일성 반도체를 나에게 넘긴다는 제안이었으면 바랄 게 없겠군.’

물론 그럴 리는 없을 거다.

일성의 반도체 사업부는 사실상 이호승 부회장의 핵심 자산이나 다를 게 없었으니 말이다.

“일단 만나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진봉현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권유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이호승과의 면담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와 몇 차례 신경전을 벌인 사이라고는 하지만, 얼굴을 맞대는 것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 만나자고 합니까?”

“회장님의 일정이 되면 아무 때라도 본인이 찾아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말에 진봉현 비서실장이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완전히 저자세군요. 일성의 후계자가 우리 혜성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굽힐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와 다르게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래에는 일성 그룹 부회장이 아니라, 회장이 직접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게 만들 생각이었다.

기껏해야 부회장 정도가 저자세를 취한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때까지 이병건 회장이 살아있을지 의문이지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소희에게 말했다.

“내일 오후에 보는 거로 하죠.”

“예,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 * *

이호승과의 약속을 잡은 나는 바로 노사에게 일성 그룹의 상황을 여쭈어봤다.

(너의 예상대로 부회장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아. 회장에게 거의 매일같이 꾸지람을 듣고 있을 정도지.)

“그렇습니까?”

(너와 만나려는 것도 회장에게 꾸지람을 들어서다. 어떻게 해서든 혜성과 합의를 이루어내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지.)

예상했던 대로다.

내가 이명승을 밀어주면서 일성 그룹의 후계 경쟁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글쎄. 그건 네가 결정해야겠지.)

노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타협이냐, 전쟁이냐.

어차피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전쟁을 선택하면 내년에도 천문학적인 적자를 각오해야 할 거야. 다른 사업영역에서도 일성 그룹의 집요한 공세를 받아야 할 테고.’

하지만 타협을 선택한다면?

1987년에 있을 반도체 호황 때, 과실을 두 회사가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한 기업이 독점할 때만 못 해도 워낙 수요가 넘쳐나니 천억 단위의 매출은 우습게 벌 수 있을 거다.

“우선 이호승 부회장이 하는 말을 듣고서 판단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과연 그놈이 어떤 제안을 할지 나도 궁금하구나.)

다음 날, 약속했던 대로 이호승 부회장을 만났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앞으로라도 자주 얼굴을 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오늘의 협상 결과에 따라 달렸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호승 부회장도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앉으시죠.”

“예.”

“메모리 반도체에 관련해서 제안할 게 있으시다고요?”

“그 전에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시 이한성 회장님께서 반도체 생산 설비를 증설하시려는 이유가 반도체 시장의 호황을 예견했기 때문입니까?”

“아직 착공식도 가지지 않았는데 저희가 라인을 증설하리란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일성 그룹의 정보력이 대단하군요.”

이호승 부회장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조소를 흘리고는 그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물론 반도체 시장에 호황이 올 것으로 예측하는 중이긴 합니다. 그것도 머지않은 미래에 말입니다.”

“오, 그렇습니까?”

“일성 회장님도 저와 같은 예측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 그래서 이렇게 제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반도체 시장에 변혁이 올 때, 양사가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말입니다.”

“한마디로 담합을 하자는 뜻이군요.”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한국 회사끼리 출혈 경쟁을 이어나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

아마 그런 상황이 오면 정부가 직접 나서서 중재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일성 반도체 전부다. 일성 반도체를 얻으려면 상황이 좋아질 거란 희망을 주어서는 안 돼.’

생각을 정리한 나는 이호승 부회장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냉철한 사업의 세계에 국적이 그리 중요합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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