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1987년이 코앞이야
‘대학이 중요한 게 아닌데.’
애초에 대학이고 자시고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황당한 일이었다.
마침 노사도 황당함을 느꼈는지 핀잔하는 말투로 말했다.
(물어볼 게 없어서 그딴 걸 물어봐?)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하운철 대표와의 대화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건지, 집중이 잘 안 되었다.
결국, 하운철 대표와의 면담이 끝나고 노사의 훈계를 듣고 말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노사의 훈계였다.
(수천억을 벌었을 때도 무덤덤하던 놈이 겨우 아내가 임신했다고 그리 한심한 모습을 보여? 임원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아?)
“죄송합니다.”
(쯧쯧. 아이 낳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노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모르는 거냐?)
“압니다.”
(1987년이 코앞이야. 내가 알려줬지, 내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예. 정치적으로 큰 변혁이 올 거라고 하셨죠.”
이미 그 징조는 나타나고 있었다.
민주화 운동이나, 5공의 행보가 노사의 예측대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변혁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너에게는 반도체가 가장 중요하다.)
그 말에 나는 진지한 얼굴을 하였다.
1987년은 확실히 중요한 해라고 볼 수 있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지배자가 될지, 아니면 그저 그런 반도체 생산 업체로 남을지 결정되는 해였으니 말이다.
(이제 슬슬 대비하도록 해라.)
“대비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생산 라인을 증설하라는 거다. 곧 주문량이 폭주할 날이 찾아올 것이니 말이야.)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까지는 구태여 라인을 증설할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적자가 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굳이 라인을 증설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일성 그룹의 경우 라인을 계속 늘리고 있어서 적자의 규모도 천문학적이었다.
우리가 백억 적자가 날 때, 일성은 5백억, 아니, 이제는 천억에 가깝게 적자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도 이제는 라인을 증설할 때가 되긴 했지.’
이대로 한 개의 라인만 가동한 채 1987년이 된다면 일성만 좋은 꼴을 보게 될 거다.
나는 절대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일성 반도체를 인수한다면 그럴 일도 없겠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명승이 결국 후계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라인 증설을 꼭 해야만 했다.
설령 중복 투자가 된다 해도 말이다.
“알겠습니다. 바로 혜성 전자 임원들에게 전하겠습니다.”
(증설할 거면 한 개만 하지 말고 아예 두 개의 라인을 증설해라.)
“두 개를 동시에 말입니까?”
(그래. 어정쩡하게 두 라인만 돌리느니, 세 개의 라인을 돌리는 게 나아.)
노사의 말에 나는 즉답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거렸다.
‘두 개를 동시에 증설하라니.’
반도체의 신규 라인 증설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라인 하나를 증설하는데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었고 그 라인에서 몇 달 동안 적자가 날 것도 감수해야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두 개의 라인을 증설할 때 천억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였다.
“자금이 그리 넉넉지 않은데, 두 개나 추가 증설해도 괜찮겠습니까?”
작년에 황 노인이 빌려준 6백억은 이미 거의 다 써먹은 상태였다.
자동차나 반도체에서 꾸준하게 투자가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편의점 사업을 시작하면서 유통에 대한 투자도 상당히 들어갔고, 말이다.
(돈은 빌리면 그만이다.)
“흠.”
(5공도 이제 거의 끝물이니 돈을 빌리는데 너무 거부감을 가질 필요 없어. 정 걱정이 되면 황 노인에게 다시 부탁해도 되고.)
하긴, 돈이야 구하자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구태여 일본이나 미국에 있는 자금을 뺄 필요도 없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도 되고, 황 노인에게 돈을 빌려도 됐다.
아니면 황 노인에게 지분을 팔았던 것처럼, 혜성 전자나 혜성 자동차의 지분을 매각해도 좋을 일이고 말이다.
‘상장도 괜찮은 선택이지.’
그러니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두려운 것은 만에 하나 발생할 변수였다.
“나비효과가 발생해서 미국이나 일본에서 D램 시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세 개의 라인을 가동한다면 일성 그룹처럼 1년에 천억의 적자를 보게 될 거다.
혜성 그룹의 자금 사정도 많이 나아졌으니 천억 적자도 감당할 수 있다지만, 빅 4가 되는데 발목이 잡힐 게 분명하였다.
(감수해야지. 사업은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
“그렇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야 노사 덕에 답안지를 보고 사업을 했었지만, 원래 사업은 반쯤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번 내 도박 운을 시험해보자고.’
물론 도박이라고 해도 남들보다는 훨씬 유리한 입장이었다.
나는 다음 패가 무엇이 나올 것인지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 * *
혜성 전자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이 같은 선언을 하였다.
“오늘부로 반도체 사업부를 독립시켜, 스스로의 책임 아래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분사하겠습니다.”
내 말에 임원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몇몇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충격을 받거나, 기대하는 눈빛을 하였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잠시 지켜보다가 누군가를 불렀다.
“김정연 전무님.”
“네, 회장님.”
“전무님께서 혜성 반도체를 맡아주시길 바랍니다.”
“반도체 사업부를 책임지라는 말씀이신지?”
“예, 김정연 전무님만큼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다른 쟁쟁한 인재들을 제쳐두고 일성 출신인 그가 대표까지 오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겨우 출신 하나로 그 사람의 한계선을 정해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건설의 안지호 사장도 미래 그룹 출신이 아니던가.
“잘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 반드시 회장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제 기대에 부응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그리 경고 아닌 경고를 하고는 임원들을 향해 말했다.
“혜성 반도체를 따로 독립시킨 이유는, 반도체 사업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위함입니다.”
내 말에 혜성 전자의 이재현 대표가 물었다.
“이미 반도체 사업에 상당한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격적으로 키운다면 어느 정도 규모를 말씀하시는 건지.”
“내년까지 최소 천억 이상의 자금이 투자할 생각입니다.”
“……!”
“천억이요?”
“허어!”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일까?
임원들은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였다.
가장 기분이 좋아야 할, 김정연 또한 표정이 다르지 않았다.
“생산 라인 두 개를 한 번에 증설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회장님, 지금 반도체 시장은 세계적 불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금 라인을 증설한다면 일성 그룹처럼 천문학적인 적자를 봐야 할 겁니다.”
이재현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다른 임원들도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아무래도 생산 라인을 증설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닌지 싶습니다.”
“일성 그룹 내부에서도 생산 라인을 너무 일찍 증설하였다며 자조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자?
다른 사업이었다면 그래도 될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은 그야말로 한순간에 모든 게 시작되고 모든 게 결정됐다.
만약 시기를 놓치게 된다면, 1987년이 되고 메모리 반도체 주문량이 폭주할 때 손가락만 빨아야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과실은 일성 그룹이 독점하게 되겠지.
“반도체 시장의 경기 침체는 몇 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이든, 미국이든, 일성이나 저희처럼 다른 계열사에서 지원해주지 않는 경우 체력이 고갈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내 말에 몇몇 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예의상 동조해 준 척한 것이지, 전혀 내 뜻을 이해한 얼굴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임원들을 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또한, 미국은 작년부터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를 가하는 중입니다. 올해 들어 제재는 더욱 강해졌고, 일본은 반도체의 출고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일본이 반도체 생산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인텔조차도 계속해서 이어진 경기 침체에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으니, 곧 노사가 말한 대로 반도체 시장이 재편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우리 혜성이 비집고 들어갈 시기였다.
“이렇게 말해도 라인 증설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신다면, 저를 믿어 달라는 말밖에 더 해줄 수가 없습니다.”
임원들은 그제야 믿겠다느니, 지시에 따르겠다느니 그런 대답을 하였다.
나는 그런 임원들의 반응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가장 나를 신뢰하는 임원들까지 이런 반응이라면, 언론이나 다른 재벌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하겠어.’
설마 은행에서도 ‘돈을 안 빌려주겠다’ 말하는 것은 아닌지 새삼스럽게 걱정이 들었다.
물론 혜성 그룹의 성장세를 보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 * *
이병건 회장은 이호승 부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소식 들었느냐? 곧 혜성 2세가 태어날 거라더군.”
“저도 들어봤습니다.”
“너로서는 정말 아쉬운 일이겠어.”
“아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호승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아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재계에서 아니, 한국 전체에서 가장 돈이 많다고 소문이 자자한 혜성 그룹 회장을 인척으로 둘 기회를 놓쳤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를 두고 아쉬워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네가 이한성 회장을 인척으로만 두었다면 앞으로의 협상이 쉬웠을 텐데 아쉽구나.”
“어떤 협상을 말씀하는 겁니까?”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일본 업체들이 하나둘 메모리 반도체 사업의 투자를 미루고 있어. 미국 업체들도 크게 다르지 않고.”
“예, 알고 있습니다.”
“내 예상이지만, 내년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우리 한국에서 독점할 수도 있다고 본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규모는 절대 작지 않았다.
지금이야 경쟁이 워낙에 치열해서 이문은커녕 적자가 나고 있다지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한 회사가 독점한다면 그야말로 조 단위의 매출도 우스울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한국 안에도 우리의 경쟁자가 있다는 거지.”
앞서 혜성 그룹 이야기를 꺼냈으니, 그가 말하는 경쟁자란 혜성 그룹을 말하는 게 분명하였다.
애초에 한국에서 D램을 생산하는 기업은 일성 그룹과 혜성 그룹뿐이기도 하고 말이다.
“혜성 그룹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그들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미미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설령 일본과 미국 업체들이 D램 시장에서 손을 뗀다고 해도 혜성은 어떤 이득도 보지 못할 겁니다.”
“라인을 증설한다고 해도 말이냐?”
“혜성 전자에서 반도체 공장을 증설한단 말씀입니까?”
“하나도 아니고 두 개 라인을 동시에 증설한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이한성 회장은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모양이야.”
이호승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성도 현재는 두 개의 라인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혜성 전자의 라인보다 생산량이 압도적이었지만, 혜성 전자에서 세 개의 라인을 돌리게 되면, 오히려 일성이 생산력에서 밀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적자를 만회하고 흑자 전환을 하려면, 반드시 혜성과의 합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혜성과 출혈 경쟁을 이어가야 할 테니 말이야.”
“…….”
이호승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 같았다.
혜성 그룹의 회장을 설득하라는 말을 하려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