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임신이라고?
“그럼 저도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라면?”
“빌 게이츠를 만나서 협상할 때, 한국의 독점 판매권도 얻어 주셨으면 합니다. 아마 한국의 시장이 작아서 그리 많은 걸 요구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가 그렇게 탐나지는 않았다.
물론 윈도우가 크게 흥행할 것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SW 시장은 일본이나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아주 작은 편이었다.
설령 독점 판매권을 얻어온다 해도 얻을 게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얻을 수 있을 때 얻으면 좋지.’
노력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거저 얻을 수 있다면 얻는 게 좋았다.
어쨌든 성공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알겠습니다. 저도 협상 카드가 하나 늘어나는 셈이니 나쁠 게 없을 거 같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소프트뱅크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하.”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2백억 엔 가지고 높게 평가했다니.
손정의는 과연 자신의 회사가 미래에 20조 엔의 회사가 될 것을 알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뭐 인터뷰한 것을 보면 언젠가 수조 원을 만지겠다는 포부 정도는 가지고 있는 거 같지만 말이다.
* * *
“한성 씨와 같이 드라마를 보니 뭔가 더 재미있는 거 같아요.”
유지은의 말에 나는 싱긋 웃었다.
“앞으로도 시간을 내서 지은 씨와 드라마 보는 시간을 늘려야겠군요.”
“그래 주시면 정말 고맙죠.”
“고마운 건 오히려 접니다. 지은 씨 덕분에 좋은 드라마를 발견하여 편의점도 제대로 광고할 수 있었습니다.”
PPL의 효과는 상당하였다.
비록 강남 점포에서만 성과를 내고 있을 뿐, 다른 점포들은 매출로 보나 인지도로 보나 미흡했지만, 적어도 10대와 20대 사이에서는 편의점이 꽤 유행을 타고 있었다.
그에 따라 편의점은 시기상조라고 하던 언론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그들 역시 10대와 20대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운이 좋았어요. 제가 고른 드라마가 흥행한 것도 그렇고, 편의점이 들어간 장면이 재미있게 연출 된 것도 그렇고.”
유지은의 겸손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러모로 운이 따르긴 했다.
나도 편의점이 들어간 장면이 그렇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으니까.
“확실히 재미있는 장면이 많았었죠. 두 주인공이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장면도 그렇고, 임신한 여주인공이 다른 음식은 못 먹으면서도 편의점 음식은 맛있게 먹는 장면이 특히 재미있었던 거 같습니다.”
“맞아요. 저도 그 장면을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감정이입이 돼서 그런지, 그날 바로 편의점에 갈까 고민도 했었어요.”
“그렇습니까?”
“저도 요즘 가리는 음식이 많아졌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말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입덧하는 여자 주인공 이야기를 꺼내면서 본인도 입덧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한 것이다.
“……병원에는 가 보셨습니까?”
“아직 안 가봤는데, 아무래도 가 보는 게 좋겠죠?”
그녀의 질문에 나는 저도 모르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가셔야죠!”
순간 아차 하였다.
유지은에게 목소리를 높이다니.
나는 바로 그녀에게 사과하였다.
“화내서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정말 병원에 가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내일 바로 말입니다.”
“알겠어요. 안 그래도 가 볼 생각이긴 했어요. 근데 걱정이네요.”
“어떤 게 걱정입니까?”
아직도 애를 낳는 게 꺼려지는 걸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그녀는 당당한 커리어우먼이었으니 말이다.
“입덧하는 게 그냥 제 착각이 아닐지. 그게 걱정이에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착각이면 어떻습니까. 기회가 이번만 있는 게 아닌데.”
“그런가요?”
“내일 같이 병원에 가죠.”
“고마워요. 위로해 줘서.”
그날은 잠이 오질 않았다.
과연 임신이 맞을까?
임신한 게 맞다면 나는 뭘 해야 할까?
다음 날이 되었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결혼한 지도 1년을 훌쩍 넘겼는데 이제야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유지은뿐만이 아니라 나도 임신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이 없었던 거 같았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마치 드라마에서 본 장면처럼 산부인과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내 자식이 생기는구나.’
뭔가, 세상이 달라 보이는 기분이었다.
* * *
“새아가에게 수고했다고 다시 말해다오.”
이한철 명예 회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였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도 수고했다.”
“제가 수고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애 낳는 게 그리 쉬운 일이더냐. 너도 축하받을 자격이 있다.”
“감사합니다.”
“이름은 정했느냐?”
“아버지가 정해주십시오.”
“……정말 그래도 되겠냐?”
“예. 우리 가문에서는 원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고맙구나.”
그는 진심으로 감격한 것인지, 눈시울이 붉혀졌다.
‘사람이 저렇게 바뀌다니.’
한창 회장으로 활동했을 때는 냉혈한 중의 냉혈한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감수성이 예민한 중년처럼 보였다.
이한철 명예 회장을 보니 나도 나중에 은퇴하게 되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해졌다.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라는 말도 있으니, 나도 이한철 명예회장처럼 되려나?
‘나쁘지는 않은 거 같은데?’
재산과 명예 모든 것을 가진 채 은퇴하여 여유 있는 노후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자식 농사를 잘해야겠지만 말이다.
“이름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고민해서 결정을 내려보마. 사돈댁과도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고 말이야.”
“예, 그러십시오.”
그렇게 이한철 명예 회장의 방문이 끝나자 다음에는 장인어른인 유정석 일성 화재 대표의 방문을 받았다.
“하하, 제 딸아이가 워낙에 바깥일을 좋아해서 걱정이 많았었는데 이렇게 일찍 기쁜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는 말 편히 해주셔도 됩니다. 장인어른.”
“그럴까요? 그럼 사적인 자리에서만 말을 편히 하겠습니다.”
내 말에 유정석 대표는 흐뭇한 표정을 지은 뒤, 이런저런 덕담을 하였다.
아들이면 어떻게 키워야 하고, 딸이면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였다.
원래는 육아에 관한 이야기는 관심도 없었지만, 유지은이 임신을 하게 되니 사업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더 귀에 잘 들어오는 거 같았다.
(쯧쯧, 꼴불견이구나. 어차피 네가 직접 육아를 할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유난을 떠는 거야?)
내 모습이 어찌나 달라졌는지, 노사가 옆에서 한소리를 할 정도였다.
물론 나는 개의치 않았다.
노사는 자식을 낳은 적이 없으니,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육아 하나만큼은 내가 선배인 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유정석 대표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서 조언을 들었다.
“끌끌. 자네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다니. 늦었지만,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내가 곧 아버지가 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것인지, 황 노인도 모처럼 나를 찾아왔다.
“요즘 일본의 소식을 듣고 아쉬움을 느끼고 있네. 자네에게 더 투자하지 못한 것이 말일세. 끌끌.”
축하 인사를 딱 한 마디만 던지고는 바로 평소에 주로 나누던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나 황 노인은 황 노인이었다.
바둑 말고는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나와 주로 하는 이야기도 오직 하나, 돈 이야기뿐이었다.
‘이렇게 돈을 좋아하는 분이 곧 은퇴할 거라니. 믿어지지 않는군.’
지인들의 축하 인사는 끝없이 이어졌다.
확실히 내가 재계의 큰 인물이 되기는 했는지, 다른 그룹에서도 직접 찾아오거나 축전을 보내왔다.
심지어 나와 사이가 좋지 않던 샤롯 그룹이나 정우 그룹에서도 축전을 보냈을 정도였다.
나는 그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기분 좋게 화답해주었다.
순산을 기원해 주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딸이었으면 좋겠냐? 아들이었으면 좋겠냐?)
노사가 불쑥 나타나서는 그리 물었다.
그러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성별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저 순산을 바랄 뿐입니다.”
(나는 이왕이면 딸이 나을 거 같다.)
“이유가 뭡니까?”
(아들이면 네가 한창 현역일 때, 아들과 경영권 다툼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으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나 싶었더니…….
“아들이어도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선 시대에 왕위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현대에서 그런 일은 드물었다.
물론 다른 그룹에서 간혹 부자간의 경영권 다툼이 벌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회장의 힘이 약하고 외가와 처가까지 도와주는 상황에서만 벌어지는 일이었다.
나는 혜성 그룹의 지분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으니, 자식에게 경영권이 위협받을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안심하지 마라. 네가 유지은이나 자식들에게 콩깍지가 씌어서 지분을 넘겨주다가 뒤통수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결혼할 때도 악담을 하더니, 노사는 참 한결같은 거 같았다.
도대체 어떤 일을 당했기에, 내가 저렇게 가족까지도 불신하는 사람이 됐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나는 절대 노사처럼 되지 말아야지.’
노사를 존경했지만, 가족을 불신하는 태도까진 닮고 싶지 않았다.
* * *
유지은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이틀 뒤.
나는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하였다.
‘이상하게 집중이 안 되는군.’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출산을 무사히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부터, 육아에 관련된 생각들까지.
회사에서는 회사 일에만 집중하자고 다짐을 했는데도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였다.
“회장님, 하운철 대표가 도착했습니다.”
업무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하운철 대표와의 약속 시각이 되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서류를 내려놓고서 하운철 대표와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케팅이 효과를 보고 있는지, 미국에서 조금씩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파는 가격보다 높은 가격인데도 벌써 100대의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하운철 대표는 미국 시장의 반응에 대해 보고하였다.
나는 그의 보고를 들었음에도 이상하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 희소식인데 뭔가 무덤덤하게만 느껴졌다.
아기를 가지면 세상이 달라진다더니, 내 안의 무언가가 달라지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운철 대표님. 대표님의 손주분들이 모두 한국대에 입학했다고 들었습니다.”
내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혜성 자동차에 관한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자식들 이야기를 꺼내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허허롭게 웃으며 내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었다.
“운이 좋았는지, 세 명 다 한국대에 들어갔습니다. 허허.”
“교육을 어떻게 하셨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손주들에게 따로 해줄 것이 있겠습니까. 저보다는 아내가 신경을 써줬는데, 아이들의 공부 머리도 아내를 닮았는지 알아서 잘들 가더군요.”
“그렇습니까?”
하운철 대표의 말에 나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곧 아이를 낳을 거라서 그런지 교육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나 역시 평범한 부모들처럼 아이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