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117화 (117/300)

117화 사모펀드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안 그래도 무시무시한 성장세를 보이던 혜성 그룹이 쌍호 중공업까지 인수하자 왕주형 회장은 그제야 경계심을 가졌다.

해운 업계에서 독보적인 1위를 유지하던 게 미래 상선이었다.

그런데 혜성 그룹의 기세를 보니, 앞으로 해운 업계에서의 경쟁이 치열해질 듯 보였다.

‘아니, 미래 상선만 위험한 게 아니야.’

원래 혜성 그룹과 겹쳐있는 사업 영역은 미래 건설 하나뿐이었다.

다른 쪽으로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던 것.

하지만 혜성 그룹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해나가면서 영역을 넓혀갔다.

혜성 전자에 이어 이제는 혜성 해운까지.

심지어 혜성 그룹에는 자동차 계열사도 있었다.

미래 자동차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임자, 혜성 자동차에서 곧 뉴 코렌드를 출시한다고 했었지?”

“예, 벤츠의 협력을 얻어서 젊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출시한다고 합니다.”

“흐음.”

코렌드라는 이름값은 왕주형 회장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때 국민차라는 애칭까지 붙여졌을 정도였으니까.

40대 이상은 여전히 코렌드를 SUV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하였다.

‘터프하고 묵직했던 코렌드에 젊고 세련된 디자인이라.’

다른 그룹에서 이 같은 시도를 했다면, 실책이라 여겼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차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은 결코 가볍게 시도할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혜성 그룹이 시도하니 뭔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더군다나 벤츠까지 협력하고 있다 하지 않은가?

솔직히 벤츠가 끼어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소비자들 역시, 벤츠라는 이름 하나를 보고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니까.

‘어쩌면 이한성의 신화가 혜성 자동차까지 이어질 수도 있겠어.’

이미 지금도 방만한 경영을 바로잡으며 적자를 줄여가고 있는 혜성 자동차였다.

버스나 이륜차에서는 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으니, 곧 흑자 전환도 가능할 거로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SUV까지 터진다?

혜성 자동차도 혜성 모직이나, 혜성 백화점, 혜성 전자가 보여주었던 기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미래 자동차도 혜성 자동차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비록 승용차 부문의 절대 강자가 미래 자동차였지만, 특장차 부문을 혜성 자동차에 전부 내준다면 규모로 보나 매출로 보나 큰 차이가 없어질 테니 말이다.

“회장님, 혜성 자동차에 관한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거야?”

“혜성 자동차에서 승용차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승용차를 준비하고 있다고? 그게 사실이야?”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입니다만, 승용차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기화 자동차의 연구 인력을 대거 영입하고 있는 것도, 바로 승용차 때문이라는 소문입니다.”

그 말을 듣자 왕주형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혜성에서 승용차까지 넘보고 있다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 때문에 승용차를 생산할 수 있는 회사는 오직 두 회사뿐이었다.

혜성 자동차는 애초에 법적으로 승용차 시장에 진출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만약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이한성 그놈은 5공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 예측한다는 뜻이 된다.’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는 자동차 산업에 암흑기를 불러일으킨 최악의 정책이었다.

하지만 독재자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법이었다.

전대환이 영구적으로 집권한다면,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가 폐지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정권이 바뀔 시, 곧바로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가 폐지될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임자, 앞으로 혜성 그룹을 잘 지켜보게.”

“이한성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겠습니다.”

“그래. 1순위로 보고해 줘.”

더는 무시할 수 없게 된 혜성 그룹.

그렇기에 왕주형 회장은 철저하게 준비하기로 하였다.

혜성 그룹을 견제할 준비를 말이다.

* * *

“세계 상선에 이어 쌍호 중공업을 인수하였는데, 해운 업계의 불황이 종식되리라 판단하신 겁니까?”

“이한성 회장님! 김종우 회장과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자금을 어떻게 확보하는지 알려주십시오! 국민들에게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다음 행보를 알고 싶습니다. 또 어떤 회사를 인수하실 계획입니까?”

“빅 4가 곧 빅 5로 바뀔 거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데, 회장님의 현재 심정이 어떤지 알려주십시오!”

겨우 250억, 아니, 현금 박치기로 할인받아서 2백억에 인수한 쌍호 중공업이었다.

일본이나 미국에 투자하고 있는 자본에 비하면 극히 작은 회사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마치 엄청난 이슈라도 되는 양, 떠들썩하게 다루었다.

작년에 재계 5위가 된 뒤, 멈추지 않고 또다시 파격적인 행보를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김종우 회장도 참 골치 아프겠군. 안 그래도 이번 일로 정부에 밉보였을 텐데, 언론의 관심까지 받다니 말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언론이 관심을 둔다면 나야 나쁠 게 없었다.

혜성 그룹이 그만큼 주목을 받는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김종우 회장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안 그래도 자존심이 강한 김종우 회장인데, 언론에서 ‘혜성 그룹에 패배한 쌍호 그룹!’, ‘김종우 회장이 쌍호 중공업을 포기한 이유는?’ 같은 기사들을 보도하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기자님들, 비켜주십시오. 회장님 지나가셔야 합니다.”

“길을 막으시면 힘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경호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여유롭게 본사 안으로 들어갔다.

언론의 관심을 받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회장인 내가 기자들의 막무가내식 질문에 대답해줄 의무는 없었다.

찰칵! 찰칵!

“질문에 답변해 주십시오, 이한성 회장님!”

“다음에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해 주십시오.”

“10분이면 됩니다! 회장님!”

끈질기게 붙잡는 기자들을 물리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집무실에 도착하니, 진봉현 비서실장이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일찍 출근하셨군요.”

“비서실장이 회장님보다 늦게 출근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거, 제가 조금 더 늦게 출근해야 비서실 직원들이 여유롭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거 같군요.”

진봉현 비서실장은 내 말에 싱긋 웃고는 말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으로 한 말인데 이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저는 회장님이 지나칠 정도로 회사 일에 몰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근무시간을 적절히 조절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한철 명예회장의 최측근답게 거침없이 잔소리하였다.

물론 다 나를 위해 하는 소리였지만 말이다.

“그 또한 노력해보겠습니다.”

“부족한 제가 괜한 말을 한 것은 아닌지 송구스럽습니다.”

“아닙니다. 안 그래도 최근 들어 건강과 가정에 소홀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잘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노사의 잔소리 때문에라도 언제나 운동을 빼먹지 않았던 나다.

유지은과의 부부관계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고 말이다.

그런데 회사 일이 바빠지다 보니, 건강과 가정, 이 두 가지에 점점 소홀해지고 있었다.

진봉현에게 한 소리를 들었으니 앞으로는 두 가지 모두를 다시 신경 써야 할 거 같았다.

“오늘 제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잔소리 들은 거는 들은 거고, 일단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다.

내가 일정을 묻자, 진봉현 비서실장이 작은 수첩을 들며 말했다.

“10시에 혜성 엔진 임원들과의 면담이, 그리고 1시에는 혜성 유통의 김한선 대표와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외부 손님이 면담을 요청한 적은 없습니까?”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 7건에, 투자 상담을 목적으로 재벌 2세들이 면담을 요청하였습니다.”

“재벌 2세들이라면 어느 그룹을 말하는 겁니까?”

“고림을 비롯하여 샤롯과 한원, 미래 그룹의 방계 또는 직계들입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작년부터 재벌 2세들이 투자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분명 예전에는 내가 서자라는 이유로 재벌 모임에서 무시당했었는데, 이제는 저들이 먼저 나를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군.’

솔직히 말하면 귀찮았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는 어떤 주식에 투자하면 좋겠냐, 어떤 지역의 땅값이 오를 거 같냐, 이런 걸 묻는데 귀찮지 않을 수 없었다.

‘사모펀드라도 만들어야 하나?’

계속 귀찮게 굴어서 그런지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재계에서는 이미 나를 주식의 신으로 인정하는 상황이었다.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계속 돈을 뿜어내니, 재벌들로선 내 자금의 원천을 주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사모펀드를 구성한다면, 꽤 많은 자금이 모일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백억 단위의 자금이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도 경쟁자라는 건데.’

영향력이 높아지니 좋을 거 같으면서도, 내가 직접 투자해서 경쟁자의 돈을 불려준다고 생각하니 괜히 배가 아팠다.

나야 수수료를 떼니 더 많은 돈을 벌겠지만, 그래 봤자였다.

50% 이상 떼는 것이 아니라면, 경쟁자들에게 상당한 이익을 나눠줘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5공의 관심을 끈다는 게 문제였다.

대통령이나 5공 정권의 핵심 권력자들이라면, 내가 모은 펀드 자금을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든 비자금으로 삼으려고 들겠지.

그러니 지금 당장 사모펀드를 만드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닐 거 같았다.

‘나중에 민주화가 되고, 빅 5로서 입지를 확실하게 굳히고 나면 그때 펀드를 구성하는 게 좋겠어.’

입지를 굳힌 이후에 굳이 사모펀드를 만들어 영향력 확대를 꾀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나중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 * *

새로운 회사를 인수했으면 연례행사처럼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구조조정이었다.

물론 일반 직원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은 아니었다.

구조조정은 어디까지나 간부진을 비롯한 임원들이 대상이었다.

“추, 충심으로 받들겠습니다!”

일개 전무였다가 쌍호 중공업이 혜성 엔진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사장이 된 강진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런 강진길의 모습에 픽 웃었다.

‘누가 보면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군.’

하기야, 강진길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려 20%에 달하는 인원이 감축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이 중에 일부는 비리 등의 이유로 회사로부터 민사소송까지 당한 상황이었다.

운 좋게 사장이 되었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충심도 충심이지만, 능력을 보여줘야 할 겁니다. 이전의 김 사장이 왜 내쳐졌는지를 잘 생각하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혜성 그룹은 철저하게 능력 우선주의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단순히 이한철 명예회장의 최측근이었다는 이유로 중용되는 일은 더 이상 없다는 뜻이었다.

혜성 엔진처럼 내가 직접 인수한 회사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강진길에게 하는 말은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강진길이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면, 가차 없이 옷을 벗게 할 생각이었다.

“이만 가보세요.”

“예!”

그렇게 강진길을 비롯한 혜성 엔진 임원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선보인 나는 김한선 대표와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편의점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누기 위함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