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내 투자를 받아 볼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왔다. 네가 일본으로 가야겠다고 중얼거릴 때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손정의라면 소프트뱅크의 회장 아닙니까?”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다만, 미래의 유명한 CEO라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래. 한번 만나보면 큰 도움이 될 거다.)
“흠.”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뭐, 만나보는 거야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를 만났을 때와 달리, 크게 득 될 것은 없을 거 같았다.
내가 알기로 이미 그는 연 매출 백억 엔이 넘는 중견 기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투자를 받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인맥 관리 차원에서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따로 지분을 인수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소프트뱅크 회장 정도라면 인맥으로 나쁘지 않았다.
머지않은 미래에 일본의 시가총액 순위에서 5위 안에 드는 것이 소프트뱅크였으니까.
(운이 좋으면 투자도 할 수 있을 거야.)
“투자를요? 그게 가능할까요?”
노사가 설명해준 손정의란 사람은 어떻게 보면 나랑 비슷한 포지션의 사업가였다.
본인 사업도 하면서 투자도 겸임하는 사업가 말이다.
그렇다 보니, 소프트뱅크에 투자하는 것은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회사에 투자하는 사람이, 자신의 지분을 팔 거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손정의라고 처음부터 부자였던 것은 아니야. 지금은 아마 은행 빚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니, 운이 좋으면 투자할 수 있을 거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손정의와 친분을 쌓는다면 결코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니, 한번 만나 봐라.)
“예,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사의 말처럼, 설령 투자를 못 한다 해도 손정의와 친분을 쌓을 수만 있다면 손해 볼 것은 없을 거 같았다.
“그런데 김종우 회장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김종우 회장과 나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물론 말만 전쟁이지, 나의 일방적인 공격이나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노사가 전해주는 정보를 찌라시로 퍼뜨리는 식으로 김종우 회장을 공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쌍호 그룹의 온갖 비밀들이 폭로되었다.
그 비밀 중에는, 추악한 비밀들도 많아서 김종우 회장과 쌍호 그룹은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
(아마 곧 결단을 내리지 않을까 싶다.)
“결단이라면?”
(너를 죽이거나, 너에게 굴복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겠어?)
“저를 죽인다고요?”
(놈의 정신은 반쯤 나간 상태다. 약도 이것저것 먹기 시작했더군. 지금도 막 약을 먹고 잠든 상태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극단적인 결정을 내려도 이상할 게 없다고 본다.)
노사의 추측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하기야, 누군가 자신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있는데 정신이 멀쩡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실시간으로 세간에 폭로하기까지 하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마 나였어도 정신이 반쯤 나가지 않을까 싶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현명한 선택을 했으면 좋겠군요.”
김종우 회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거야 두렵지 않았다.
노사가 귀신처럼 따라다니며 24시간을 감시하고 있는데 뭐가 두렵겠는가.
그저 더 상대하기 귀찮았기에, 그만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미국도 가봐서 별로 안 놀랄 줄 알았는데, 일본이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요. 이렇게 화려할 줄은 몰랐어요.”
이소희가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경제를 상징하는 것처럼, 도쿄 빌딩들의 높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였다.
‘우리 그룹의 본사 정도 되는 빌딩이 도쿄에는 수두룩하군.’
세계 50대 기업 중, 일본 기업들이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찬란하기 그지없는 빌딩 숲만 봐도 일본 경제가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알 수 있었다.
미국이 괜히 견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일본은 미국이 두려워할 정도의 경제 대국이었다.
말 그대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경제 규모가 큰 국가였던 것이다.
‘그래봤자 버블이 터지면, 잃어버린 10년 시리즈를 계속 이어갈 테지만 말이야.’
나는 애써 그렇게 위안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부러워서 미칠 거 같았다.
이렇게나 압도적인 차이라니.
하지만 일본이기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일본의 미래가 한국보다 어둡기도 했고.
물론 내가 미래를 바꾼 이상, 일본에 어떤 나비효과가 찾아올지 나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회장님! 여기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유동연 대표.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예. 저는 잘 지냈습니다.”
“차를 보니 확실히 비서 때 보다는 생활이 좋아진 거 같기는 하군요.”
내 말에 유동연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여기가 미나토구입니다.”
“딱 봐도 땅값이 비싸 보이는군요.”
“그렇습니다. 회장님이 고르신 매물 중에는 이미 네 배 이상 상승한 매물도 있습니다.”
“벌써 네 배라.”
역시나 일본 부동산에 투자한 것이 정답이었다.
올해부터 한국 주식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거라지만, 대규모 자금을 굴리기에는 일본이 훨씬 더 적합하였다.
“부동산 대출 규제가 완화되었다고 했었죠?”
“예, 그렇습니다.”
“최대한으로 대출을 받으세요. 일부는 이베스 호텔의 일본 법인에 투자하고, 나머지는 다시 부동산에 재투자할 겁니다.”
사둔 매물을 그냥 가만히만 내버려 둬도 앉아서 수천억을 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본 땅값의 상승세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앞으로도 땅값이 계속 상승할 것이기에, 은행권의 도움을 빌려 더 큰 투자를 하기로 하였다.
‘운이 좋으면 버블이 끝나기 전에 일본 부동산으로 조 단위의 현금을 쥐게 될 수도 있겠어.’
조 단위의 비자금이라.
솔직히 현실성이 없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대기업의 1년 매출과 비슷한 규모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본 열도 전체가 뜨거운 투기 광풍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뭐 그때의 1조와 지금의 1조는 조금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야.’
* * *
다음 날, 나는 니시다 노리마사를 만났다.
그를 만나, 일본 법인의 대표를 맡아달라고 설득했는데, 의외로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연봉이 1,500만 엔!?”
“예, 5년간 유임을 보장해주는 조건입니다.”
아무리 일본인이 월급을 많이 받는다지만, 연봉 1,500만 엔은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화로 따지면 6천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일본인 기준으로도 직장인 세 명 이상분의 연봉이었기에 니시다 노리마사로선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절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었던 것이다.
“스톡옵션도 챙겨줄 것이니, 주인의식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이!”
나는 그의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노사가 증명한 인재였기에 든든하게만 느껴졌다.
‘인재도 얻었으니, 역 근처의 토지에다 호텔을 하나씩만 세워도 단숨에 일본 최대 규모의 호텔이 될 수 있겠어.’
이럴 의도로 역 근처의 건물들을 사들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도가 무엇이 됐건,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토요코인을 인수할 때도 역 근처의 위치를 선점한 게 큰 역할을 했으니, 다른 점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회장님, 손정의 사장과의 약속이 잡혔습니다.”
니시다 노리마사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유동연이 불쑥 말했다.
“제가 누군지는 이야기했습니까?”
“예, 혜성 그룹의 회장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저를 아는 분위기입니까?”
손정의는 과연 혜성 그룹이 어떤 기업인지 알고 있을까?
별거 아닌 일이지만 괜히 궁금해졌다.
“겉으로는 안다고 대답했는데, 솔직히 혜성 그룹을 알고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재일교포에게조차 혜성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듯하였다.
“바로 안내해 주시죠.”
“예, 알겠습니다.”
약속 장소는 의외의 장소였다.
다름 아닌, 병실이었다.
‘아프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아예 병실에서 생활하나 보군.’
단순히 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손정의의 병실에는 PC와 팩스, 전화기 등이 보였다.
아마 병실에서 업무를 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혜성 그룹의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나는 환자복을 입은 손정의에게 반갑다는 듯, 악수를 건네며 인사하였다.
그러자 손정의도 기분 좋게 웃으며 악수를 받아주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한성 회장님.”
아쉽게도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지 일본어를 구사하였다.
노사가 재일교포나 한국인으로 생각하지 말고 일본인으로 생각하라고 하더니, 확실히 그래야 할 듯싶었다.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을 거 같습니다. 사실 손정의 사장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제 명성이요?”
“천만 엔의 창업 자금으로 1년 만에 매출 35억 엔의 중견 기업을 일구어냈다고 들었습니다. 그 해 붙여진 별명이 괴물 실업가라고?”
“하하하!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니, 너무 쑥스럽습니다.”
부끄럽다는 듯 말하지만, 결코 부정은 안 했다.
스티브 잡스처럼 자기애가 강한 성격인 듯 보였다.
나는 그 뒤로도 손정의를 치켜세웠다.
이미 스티브 잡스에게 해봤던 일이라서 아주 어렵지 않았다.
“저는 일본에서 가장 유망한 기업이 소프트뱅크라고 생각합니다.”
“오해입니다. 오해에요. 제 회사지만, 아직 그 정도의 평가를 들을 회사는 절대 아닙니다.”
“소프트뱅크만 본다면 그럴 겁니다. 하지만 소프트뱅크를 이끄는 게 손정의 사장님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손정의는 내 말에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이런 아부에 내성이 없는 듯 보였다.
아니면 한국인에게 아부를 받은 것이 처음일 수도 있고 말이다.
‘투자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친분을 쌓는 것은 어렵지 않겠어.’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나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거 같았다.
* * *
처음 한국 기업가가 자신을 찾았을 때는 당황했었다.
소프트뱅크가 설마 한국에까지 알려졌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손정의로서도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비록 한국 SW 시장이 일본 SW 시장과 비교했을 때, 수십 배나 작다고는 하지만, 한국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컴퓨터 시장도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고 말이다.
저작권 의식만 생겨난다면, 한국 SW 시장에 진출하는 것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혜성 그룹 회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을 때,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회장이라기에 나이가 있을 줄 알았는데 나랑 동갑이었을 줄이야.’
조금 충격이었지만,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는 혜성 그룹이 정확히 어떤 기업인지도 알지 못했다.
비서라는 사람은 혜성 그룹을 대기업이라고 소개했지만, 사실은 소프트뱅크보다 작은 곳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근데 꽤 마음이 잘 맞는 거 같아. 뭔가 나를 편하게 해주는군. 말도 잘 통하고.’
처음엔 괴물 실업가라느니, 미래에 가장 유망한 기업이라느니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땐 기분이 좋으면서도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아직 그런 이야기를 들을 레벨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에 소프트웨어와 관련된 화제로 넘어가니, 대화가 술술 이어졌다.
“미래에는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대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 이한성 회장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앞으로 컴퓨터 성능은 더 좋아질 거고, 그만큼 소프트웨어의 영역도 늘어나게 될 겁니다. 무엇보다 소프트웨어는 개발 비용이 하드웨어와 비교도 안 되게 적다는 게 강점입니다.”
“실로 엄청난 강점입니다. 이 강점 하나로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될 사람들이 아주 많을 겁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회사 말입니다.”
“손정의 사장님은 마이크로소프트를 높이 평가하는 거 같군요.”
“그럼요. 올해 안에 미국으로 가서 빌 게이츠 사장을 만나볼까도 생각 중입니다.”
“저도 마이크로소프트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 사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꼭 한 곳에만 투자할 수 있다면 손정의 사장님의 소프트뱅크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마웠다.
안 그래도 재작년에 진행하였던, 상품 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이 실패한 일로 타격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병실에서 원격 경영을 하느라고 기존의 사업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이런 때에 투자를 받는다면, 상당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손정의 사장님. 혹시 제가 투자를 한다면, 제 투자를 받으실 의향이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