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이베스 호텔을 키울 때야
박기룡은 혜성 그룹이 세계 상선을 인수하여 재계 5위가 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백화점부터 호텔, 자동차, 전자 등 다양한 업계로 사업을 확장해가고 있는 혜성 그룹이었다.
해운업 쪽으로 새로이 진출한다고 놀랄 이유는 없었다.
재계 5위가 되었다는 소식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재계 5위나 8위나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빅 4를 제외하면 거의 다 비슷비슷한 규모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자, 박기룡도 생각이 달라졌다.
“혜성 그룹,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재계 순위가 10위 정도였지 않았어? 몇 년이 지났다고 벌써 재계 5위가 됐지?”
“그러게 말이야. 요즘 전자든, 백화점이든, 혜성의 이름이 안 나오는 곳이 없어. 심지어 학교 주변의 마트조차 혜성 마트잖아?”
“박기룡, 너 진짜 좋겠다. 혜성 회장이 전자 쪽에 엄청나게 투자한다던데, 네가 거기서 자리 잡으면 다른 기업에 가는 것보다 훨씬 결과가 좋겠어.”
“진짜 부럽다. 혜성 그룹이 업계에서 가장 많은 월급을 준다잖아.”
“선배들 말 들어보니까, 올해 연말 보너스도 엄청나게 줄 거라더라. 거의 몇백만 원 준다던데?”
“보너스로 몇백을 준다고? 와, 혜성 그룹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사내 유보금은 혜성 그룹이 빅 4에 버금간다던데? 거기 회장이 돈 버는 능력이 기가 막힌다더라. 거의 주식의 신이래.”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혜성 그룹을 간다는 것에 우려를 표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혜성 그룹이 재계 5위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응이 확 달라졌다.
이제는 박기룡을 걱정하기보단,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혜성 그룹이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줄이야.’
박기룡은 사람들의 변화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성 그룹이나 은성 그룹을 추천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부럽다는 식으로 박기룡의 선택을 추켜세웠다.
어느덧 사람들의 눈에는 혜성 그룹과 다른 빅 4 그룹들이 거의 동등하게 인식된 것이다.
‘지금이라면, 내가 혜성 장학생이 아니었어도, 혜성 그룹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가 혜성 그룹에 입사하려 한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은혜를 갚는 것.
즉, 2년 넘게 장학금을 풍족하게 챙겨준 것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혜성 그룹의 급격한 성장세를 보니 그런 생각도 바꿔먹어야 할 거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혜성 그룹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곳을 운 좋게 들어가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뭐가 됐건, 나는 혜성 그룹과 운명을 같이 하는 혜성맨이야.’
* * *
세계 상선을 인수한 일로 세간이 떠들썩하였다.
대기업이 다른 대기업의 자회사를 인수한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혜성 그룹이 단숨에 재계 5위에 등극하기도 했고 말이다.
더군다나 세계 상선이라는 회사 자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세계 상선은 해운 쪽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회사였다.
해운 시장이 불황만 아니라면, 5백억으로도 인수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그러니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뭐, 그래봤자 지금 당장 해운 쪽으로 사업을 확장할 생각은 없지만.’
언론은 내가 다른 사업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운 쪽으로 사업을 확장할 것이라 예상하였다.
은행권의 대출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 한층 더 공격적인 확장 행보를 밟았으니, 그리 추측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정우 그룹에서도 해운 쪽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해운 쪽으로 진출하는 모습을 보이니, 해운의 불황이 곧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88년까지는 지켜봐야겠지.’
해운 시장의 불황은 꽤 오래갈 것이다.
노사의 이야기대로라면, 아마 1988년까지는 불황이 계속될 터.
그러니 3년 정도는 적자를 각오하고 묻혀둬야 했다.
‘지금 당장은 손해 같긴 해도, 3년 뒤부터는 달라질 거야. 세계 상선, 아니, 혜성 해운만 잘 키워도 어지간한 중견 그룹보다 매출이 클 테니까.’
노사만 해도 해운 회사 하나로 매출 수조 원 대의 그룹을 만들었다.
세계 상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회사에서 출발했음에도 그런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다.
나는 노사보다 훨씬 유리한 시작점에 있었으니, 2000년대가 아니라 1990년대에 해운 회사 하나로 수조 원의 매출을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그건 나중 이야기지.’
솔직히, 지금은 해운 쪽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신경 쓰는 쪽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수전이었다.
스티브 잡스와의 동업부터, 퀄컴 지분 투자 그리고 이베스 인수까지.
-아무래도 스티브 잡스는 하드웨어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거 같습니다.
아쉽게도 스티브 잡스와의 협상은 지지부진하였다.
여전히 하드웨어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다른 두 곳과의 협상은 성과가 있었다.
“이베스를 얼마에 인수했다고 하셨죠?”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저렴하게 인수했습니다. 총 인수 금액은 3,300만 달러. 지분 100%를 인수하는 조건입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베스에 대해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꼭 가지고 싶은 회사라고 생각했었다.
비록 매출은 그리 높다고 볼 수 없지만, 일단 객실 수 자체가 상당하였고 이베스가 추구하는 방향도 나와 잘 맞았다.
그래서인지, 이베스 인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세계 상선을 인수한 것보다 기분이 좋아졌다.
‘혜성 호텔은 최고급 호텔로, 이베스 호텔은 최대 규모의 호텔로 만들어야겠어.’
객실 수만 만 단위를 넘어 10만 이상의 규모가 되게끔 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상당한 투자가 뒤따라야겠지만, 7백만 달러를 절약했으니 우선 7백만 달러를 투자해볼 생각이었다.
7백만 달러라면 저가형 호텔 하나를 세우는 거야 어려울 게 없었으니까.
‘호텔을 딱 하나 세운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일본에다 세우는 것이 좋겠지?’
저가형 호텔 사업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기업은 일본에 있었다.
토요코인.
나는 이들을 먼저 공략할 생각을 가졌다.
미래의 경쟁자도 제거할 겸, 토요코인이 성공한 방식을 그대로 써먹으려면 그들의 출발점인 일본에서 사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토요코인이라는 예시가 아니어도 일본에서 호텔을 시작하는 게 나쁘지는 않지. 올해부터 일본 여행자들은 급속도로 늘어날 테니 말이야.’
한국도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버블이 터지기 전까지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니 이 시기에 일본에다 호텔을 세우는 것도 사업적인 관점에서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퀄컴의 경우는 6백만 달러로 지분 30%를 인수하기로 하였습니다.
“30%면 지분이 작지는 않군요.”
-그 이상 받으려고 하였으나, 퀄컴 대표가 완강하게 거절하여 30%가 최선이었습니다.
“대주주가 되었으니, 그 정도면 만족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어차피 퀄컴으로 큰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노사가 퀄컴에 투자하라고 한 것도 어디까지나, 퀄컴의 갑질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으니 30% 지분이면 충분하다고 볼 수 있었다.
‘원래는 퀄컴 인수에 천만 달러 이상을 쓰려 했는데, 어쩌다 또 돈이 남게 되었군. 남는 돈으론 이베스 호텔에 투자해야겠어.’
* * *
이베스 호텔의 CEO, 세라 콜리스는 답답한 한숨을 토했다.
‘도대체 HS 인베스트먼트는 어떤 회사인 거지?’
어려운 상황에서 3,3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제시하니 도저히 거절하지 못하고 보유 지분 전부를 매각하였다.
사실 그녀는 반대하고 싶었지만, 다른 주주들이 찬성해서 어쩔 수 없이 매각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베스 호텔에 미련이 남아있었다.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이베스 호텔에 미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HS 인베스트먼트의 진짜 주인이라는 사람을 한 번이라도 봤으면 이렇게 답답하지도 않았을 텐데.’
인수 절차가 마무리되었음에도 이베스 호텔의 진짜 주인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임원을 교체한다던가, 업무적으로 따로 지시를 내린 적도 없었는데, 그녀가 보기에 HS 인베스트먼트는 이베스 호텔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보스랑은 도대체 언제쯤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답답함을 참지 못한 세라 콜리스는 결국 HS 인베스트먼트의 대표, 신은규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회장님께서는 용무가 바쁘셔서 올해는 만나 뵙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내년까지만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내년이요?”
그녀는 성격이 급한 편이었다.
‘이 회사를 나갈지, 안 나갈지를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할 판인데, 내년까지 기다리라니.’
1985년도 이제 보름이 채 안 남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보름이란 시간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애초에 내년이 된다고 바로 회장이란 사람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제가 보스를 찾아가면 안 되나요?”
“회장님을 뵈러, 직접 찾아가신단 말씀입니까?”
신은규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노스 코리아도 아니고 사우스 코리아인데, 제가 못 갈 이유는 없죠.”
“일단 회장님께 말씀은 전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미리 비행기는 예약해 둘게요.”
“……편한 대로 하십시오.”
세라 콜리스는 다시 이베스로 돌아와 동료에게 자기 뜻을 밝혔다.
“보스를 만나러 한국에 직접 찾아가겠다고? 너무 위험한 선택 아니야?”
“뭐가 위험한 선택이라는 거야?”
“한국 같은 국가에선 뭔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그 보스라는 사람이 여색 밝히는 마피아면 어쩌려고 그래?”
“상상력이 왜 그따위야? 마피아라면 우리 회사를 인수했겠어? 다른 좋은 회사들도 많은데?”
“어쨌든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미국에 가만히 있어. 여기서 기다리면 알아서 결정이 내려지겠지.”
“난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아. 어차피 해임을 당할 처지라면, 하루빨리 해임을 당하는 게 더 낫다고.”
“그럼 나도 갈게.”
“그러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비행기 예약이나 해. 신 대표의 답변이 오면 바로 떠나야 하니 서둘러.”
그녀는 식음료 담당 이사인 미첼을 다그쳤다.
미첼은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내두르면서도 서둘러 움직였다.
다행히, 신은규의 답변이 오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장님이 언제든 편할 대로 오셔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출발할게요.”
“오늘요?”
“보스에게 전해주세요. 곧 도착할 거라고.”
“아, 알겠습니다.”
그녀는 신은규의 답변이 온 그날 바로 미첼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2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마침내 도착한 한국은 의외로 깔끔한 분위기였다.
“전형적인 후진국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공항만 이런 것일 수도 있지.”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보스가 예약해 두었던 혜성 호텔로 향했다.
“저게 보스의 호텔이라고? 이거, 그냥 부자가 아닌 거 같은데?”
미첼은 기가 질린 얼굴이었다.
후진국이라 생각했던 한국에서 이런 거대한 호텔을 보게 되었으니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 호텔은 그들의 회사를 인수한 혜성 그룹의 호텔이었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잡혀 있던 보스의 이미지는 크게 바뀌었다.
거대한 갱단을 이끄는 배불뚝이 마피아 보스에서, 한 나라의 정재계를 주름잡는 70~80대 거물로 말이다.
‘일단 돈이 많은 건 확실한 거 같은데, 과연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세라 콜리스도 보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보스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이베스 호텔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