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어?
평소처럼 업무를 보는데 손님이 왔다.
쌍호 그룹에서 찾아온 손님이었다.
“김 회장께서 저를 찾는다고요?”
“예, 오늘 저녁에 화월관으로 오시면 됩니다.”
김종우 회장의 비서실장이 황당한 소리를 지껄였다.
마치 나를 아랫사람으로 여기기라도 하는 듯, 자신이 있는 장소로 나를 부른 것이다.
“저를 만나고 싶다면 김 회장이 직접 찾아오라고 하세요.”
“예?”
“뭐가 예입니까? 두 번 말해야 알아듣습니까?”
나는 거칠게 말하였다.
어차피 친해질 수 있는 사이도 아닌데, 예의를 차려줄 필요는 없었던 까닭이다.
“……굉장히 무례하시군요. 김종우 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을 텐데요?”
“웃기는 소리를 다 하십니다. 누가 보면 쌍호가 우리 혜성보다 위에 있는 줄 알겠습니다.”
재계 서열이야 엇비슷하긴 했다.
정부의 비호를 받는 쌍호 그룹은 혜성 그룹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덧 재계 6위가 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빅 4를 제외하면 나머지 10위권 기업들의 규모는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쌍호 그룹이 혜성 그룹보다 재계 서열이 높다지만, 규모로 봤을 때는 극히 미미한 차이.
심지어 혜성 그룹에서 세계 상선을 인수하게 되면, 순위가 뒤집힌다.
그때는 오히려 혜성 그룹이 쌍호 그룹을 압도하게 되는 것이었다.
“회장님의 무례한 태도는 김종우 회장님께 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그러시던가요.”
“그럼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물러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코웃음을 쳤다.
‘김종우 회장도 정부만 믿고 호가호위하는데, 김종우 회장의 아랫사람까지 저러는군.’
어서 빨리 빅 5의 일원이 되어야 할 거 같았다.
그래야 오늘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 * *
김종우 회장의 비서실장을 보내고 몇 시간 뒤에, 또다시 손님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직접 본인이 왔다고요?”
“예. 지금 집무실 바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우 그룹 회장도 그렇고, 성격 급한 재벌 회장들이 참 많군.’
언젠가 한 번은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할까요?”
“직접 찾아왔는데 쫓아내는 건 예의가 아니죠. 불러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바로 김종우 회장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참 얼굴 보기 어렵네? 부르면 그냥 올 것이지, 이렇게 나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나?”
급한 성격답게 인사말도 생략한 채 대뜸 성질을 냈다.
“선약도 없이 갑자기 호출하는데 제가 부름에 응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허! 이 친구, 예의를 모르는군?”
“예의라…… 김 회장님은 그리도 예의를 잘 아는 분이라서 다른 회장님들을 그리 대하시는 겁니까?”
나도 젊지만, 김종우 회장도 만만치 않게 젊었다.
40대도 아니고, 올해 막 40세가 되었을 정도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40세면 재계에서 굉장히 젊은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김종우 회장에 대한 평가는 오만방자하다거나, 예의 없다는 식의 평가가 많았다.
심지어 김종우 회장은 재계에서 고령에 속하는 양희수 회장에게도 방자하게 굴 정도였다.
이러니 나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예의 바른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사람이 예의를 운운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와 싸우자는 건가?”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시비를 거시는데, 혜성 그룹이 그리도 만만하게 보이십니까?”
내가 차가운 눈빛으로 살벌하게 말하자, 김종우 회장이 몸을 움찔하였다.
조금 주눅이 든 모양이었다.
“어차피 친해질 수 있는 사이도 아닌데,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시고 용건만 말하십시오.”
김종우 회장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도 예의를 모르는 놈이랑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리 말해주니 잘 됐군!”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보채지 않아도 마침 본론을 말할 생각이었어! 내 본론은 간단해. 세계 상선은 내가 가져갈 거니까, 혜성 그룹에서는 관심도 두지 마. 괜히 인수전에 꼽사리 끼지 말란 뜻이야.”
황당하였다.
본인이 꼽사리 끼는 주제에 저런 말을 하다니.
사람이 어떻게 저리 뻔뻔할 수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룹을 지키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조금 어이가 없군요. 일성이나 미래에서 그런 협박을 한다 해도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쌍호의 협박이라니…….”
실제로 나는 정우 그룹 회장에게도 당당히 맞섰다.
일성 그룹의 경우는 아예 대놓고 후계 경쟁에 참여하고 있었고 말이다.
이런 나인데, 쌍호 그룹 따위가 두렵겠는가?
김종우 회장은 내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콧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내가 쌍호 그룹의 힘만 믿고 이러는 줄 알아?”
“그럼 또 뭐가 있습니까?”
“각하께서 나를 지지해 주고 있어. 내가 세계 상선을 인수하는 것도 사실상 각하의 뜻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야!”
“…….”
대통령이 개입했다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각하가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실 분은 아닐 텐데요?”
“사소한 일? 정권에 충성하지 않는 혜성 그룹이 재계 5위가 되려고 하는데, 과연 이게 사소한 일일까?”
솔직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미 나는 세계 그룹을 도운 일로 5공 정권에 단단히 밉보인 상태였다.
비록 당장은 야당을 신경 쓰느라 보복을 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을 터.
그러니 김종우 회장의 이야기를 단순히 거짓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할 이유도 없지.’
어차피 밉보인 상태인데 더 밉보인다고 문제 될 게 뭐 있겠는가.
정권의 수명이 기껏해야 2년도 안 남았는데 말이다.
“설령 그렇다 한들, 제 결정이 달라질 일은 없을 겁니다.”
“정신이 나갔군! 각하께서 관대하게 봐주니까, 뵈는 게 없는 거냐?”
“언제 저를 관대하게 봐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예. 저는 제 거를 건드리는 상대에겐 뵈는 게 없습니다.”
“이, 이 자식이 정녕?”
“제가 업무를 해야 해서 그러는데, 더 하실 이야기가 없으시면 이만 나가주시길 바랍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혜성이 잘 나가고 있어서 기세가 등등한 모양인데, 각하에게 거역하고 어떻게 될지 한 번 두고 보자고!”
김종우 회장은 거칠게 그리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귀찮게 되었군. 이럴 줄 알았으면 세계 상선을 인수하지 말 걸 그랬나?’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세계 상선을 인수하는 것과 관계없이 5공 정권은 언제든지 귀찮게 굴었을 가능성이 컸다.
5공 정권이 개입하는 이유는 그저, 혜성 그룹이 잘 나가는 게 아니꼽게 느껴져서 그런 거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전대환 그놈이 겨우 이런 일에 나설 거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구나.)
그때, 노사가 불현듯 나타나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통령이 관심을 두기에는 체면이 상할 정도로 작은 일이긴 하죠.”
(아마 전대환의 졸개 중의 한 명이 움직인 게 아닌가 싶다.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야.)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혜성을 괴롭히기만 해도 대통령에게 칭찬을 받을 테니, 그걸 목적으로 5공의 권력자 중의 한 명이 끼어든 것일 지도 모른다.
(일단 내가 한번 살펴보마.)
“감사합니다.”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거야. 신한당이 저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애먼 짓을 벌이지는 못할 테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무조사나 금융 제재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정권의 탄압을 받을수록 국민의 지지를 받겠지. 야당도 나를 아군으로 여기게 될 것이고 말이야.’
이미 지금도 은근하게 러브콜을 보내오고 있었다.
5공의 탄압까지 더해진다면, 야당은 나를 완전히 아군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으리라.
* * *
노사는 곧바로 김종우 회장의 뒷배를 조사하였다.
물론 그는 귀신의 몸이었기에 사람을 쓸 수는 없었다.
직접 염탐해서 조사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
하지만 다행히도 성과는 금방 나타났다.
“그 애송이 놈이 그렇게 말했다고요?”
“예, 부장님. 그야말로 오만방자한 놈이 아닙니까?”
“각하의 통치 덕에 재벌 총수로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주제에 각하의 권위를 우습게 여기다니. 이거, 가만 놔둬서는 안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각하의 은혜도 몰라보는 놈입니다. 크게 혼쭐을 내줘야 합니다.”
화월관이라는 요정에서 두 사내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내 중 한 명은 김종우 회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안기부의 장세민이라는 사내였다.
(장세민이라. 꽤 거물이 뒷배에 있었군.)
무려 안기부장이었다.
원 역사였다면 지금쯤 실로 엄청난 권력을 자랑했을 인물이었다.
물론 안기부의 수장인 만큼, 달라진 역사에서도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놈의 별명이 뚝심의 사나이였던가?)
장세민은 훗날 전대환의 충신이라 불린다.
전대환이 권력을 잃은 이후에도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전대환을 두둔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역겹기만 한 개새끼인데, 쓸데없이 거창한 별명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노사는 혀를 찼다.
독재에 항거하던 대학생들을 간첩으로 둔갑시키고 잔인하게 고문했던 안기부의 수장이 충신이라느니,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느니 거창한 별명을 받는 게 황당하기만 하였다.
심지어 먼 훗날에는 대선에 나갈 정도로 화려한 삶을 살게 된다.
(내가 있는 한, 네놈의 미래가 원 역사처럼 평온하지만은 않을 거다.)
노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장세민이 이어지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김 회장. 일단, 세계 상선을 인수하는 건 그대로 진행하세요.”
“양희수 회장이 인수자를 이미 내정했는데, 그대로 진행해도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내정자가 구속을 당한다면, 양희수 회장도 다른 수가 있겠어요?”
“……!”
(구속이라고?)
장세민의 말에 김종우 회장도 충격을 받았지만, 노사는 그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5공 정권이 한성에게 보복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했지만, 설마 구속까지 계획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군.)
하지만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뿐이었다.
한성을 구속하려는 계획?
계획은 결국 계획에 불과하였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만큼, 먼저 선공을 가하여 그 계획을 파투내면 그만이었다.
“부랑아 놈들은 잘 처리하고 있지?”
“예, 전부 부산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거지 놈들 때문에 외국 귀빈들이 서울을 안 좋게 보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 각하께서도 이번 프로젝트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노사는 장세민에게 선공을 가하기 위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범죄와 비리를 저지르는지.
아쉽게도 정권의 아킬레스건이라고 부를 만한 약점은 찾지 못했다.
물론 그게 비리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언론에서 절대 보도를 하지 않을 비리들밖에 없어서 문제였다.
그러던 중 노사는 우연히 한 가지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른바 도시환경 미화 프로젝트라 불리는 사업에 관한 정보였다.
(형제복지원이라. 설마 이런 짓거리를 저지르고 있었을 줄이야.)
노사는 혀를 내둘렀다.
5공 정권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거악 그 자체라는 느낌이 들었다.
형제복지원만 봐도 그렇다.
이곳은 삼청교육대와 흡사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형제복지원은 삼청교육대처럼 정권에 항거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강제 수용하기보다는, 거리의 부랑아나 어린아이들을 위주로 강제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선 강간, 강제 노역, 폭행 및 살해 등이 일상처럼 자행되고 있었다.
무려 수천 명이 감금되어 있었고, 수백 명이 구타와 성폭행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런 짓을 저지른 놈들이 미래에선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는 건가.)
노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그리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지만, 5공의 악랄한 행태를 보니 정의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 * *
“그게 정말입니까?”
처음에는 장세민 안기부장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이어지는 형제복지원에 관한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외국인에게 잘 보이겠다고 엄한 사람들을 납치하다니. 설마 정부에서 그런 짓까지 저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5공에서 아시안 게임이랑 88 올림픽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지. 뭐, 어떤 이유를 대서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야.)
그야 그렇다.
멀쩡한 사람을,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납치해서 강제노역하고 살해까지 저지르는데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5공의 아킬레스건을 찾아서 다행이야. 형제복지원에 관한 정보를 널리 알린다면, 5공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아도 장세민 그놈만큼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거다.)
“장세민이 무너지면, 김종우 회장을 공격해야겠군요.”
(그래야지. 너에게 이빨을 보였는데,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어?)
나는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냥 엄한 욕심을 부린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안기부장까지 동원한 이상 절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