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세계 최대 규모의 호텔이라
혹시 몰라 양희수 회장에게 확인 전화를 하였다.
쌍호 회장이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한다면, 양희수 회장도 생각이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종우, 그놈이 자네 것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은 나도 들었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그놈이 얼마나 많은 금액을 부르든 내 결정이 달라질 일은 없으니까.
다행히도 양희수 회장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어려운 시절에 유일하게 3백억을 빌려줬던 것이 바로 나였다.
은혜도 은혜지만, 3백억이라는 빚을 지고 있는 시점에서 나를 배신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럼 양희수 회장님만 믿고 자금을 구하고 있겠습니다.”
-그러게. 그리고 다음 달부터는 실사 팀을 보내게.
“굳이 실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회장님이 분식회계 같은 것을 저지를 분도 아닌데 말입니다.”
-나야 그렇게 자신하지만, 모든 걸 확실하게 집고 가는 것이 좋지 않겠나? 나는 자네와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것을 원치 않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양희수 회장님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양희수 회장의 확답을 들었으니 쌍호 그룹에 대해서는 신경 끄기로 하였다.
* * *
신은규가 오랜만에 귀국하였다.
미국의 소식을 직접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저야, 회장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나를 보는 신은규의 눈빛에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단, 4백억 정도 되는 돈으로 수개월 만에 1천6백억이 넘는 돈을 벌었으니, 그가 그런 눈빛을 보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만기일이 될 때까지 계속 신경을 써주십시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스티브는 여전히 저희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한창 하드웨어 인력을 고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넥스트 역시 애플처럼 소프트웨어보단 하드웨어에 집중할 것으로 보입니다.”
신은규의 답변에 나는 혀를 찼다.
‘한 번 더 실패를 경험해야 정신을 차리려나.’
100%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다른 길로 가는 스티브 잡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그런 성격이니 미래에 혁신의 아이콘이니, 세상을 바꾼 천재니 온갖 화려한 별칭을 얻게 되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저와의 대담을 거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스티브 잡스도 투자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앞으로도 종종 스티브 잡스를 찾아가서, 회장님과의 동업에 대해 설득해보겠습니다.”
“내년 상반기까지만 그렇게 계속 시도해보십시오. 그 안에 안 된다면 저도 스티브를 포기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퀄컴을 인수하는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넥스트도 중요하지만, 퀄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였다.
비록 지금의 퀄컴은 디코더 같은 디지털 라디오 통신용 특수 집적회로를 개발하는 회사에 불과했지만, 몇 년 뒤부터 확 달라질 예정이었다.
9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퀄컴은 CDMA란 것의 특허를 갖게 되는데 휴대폰 사업을 하려면 이 특허는 꼭 보유하는 게 좋았다.
‘나의 존재로 시대가 얼마나 앞당겨질지 모르는데, 미리미리 인수하는 게 좋겠지. 지금이 가장 저렴할 때이기도 하고 말이야.’
노사가 누누이 경고하는 게 나비효과였다.
실제로 국내의 역사만 해도 달라진 게 많았다.
일단 국회만 봐도 확 달라져 있었다.
5공의 권력이 노사가 살던 세계보다 못한 것도 나비효과라면 나비효과라고 볼 수 있으리라.
‘우리 혜성 전자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연구하고 퀄컴에서 비메모리 반도체를 연구하면 좋을 거 같단 말이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구도였다.
다만,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듯, 신은규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으로 말했다.
“어윈 제이콥스가 인수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하였습니다.”
“일말의 여지도 없었습니까?”
“예. 엄청난 야망을 품고 창업을 결정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천만 달러를 불러도 꿈쩍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넥스트도 그렇고, 퀄컴도 그렇고, 역시 돈만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천만 달러는커녕 5백만 달러의 가치도 안 될 회사조차 인수에 실패하다니.
(예상대로구나.)
그때, 노사가 불쑥 나타나더니 그 같이 말했다.
내가 고개를 돌려 노사를 바라보자, 노사가 입을 열었다.
(정부와 주로 거래를 하는 곳이니, 우리에게 회사를 매각하는 선택을 할 리가 없지. 천만 달러가 그렇게 큰돈인 것도 아니고 말이야.)
“…….”
노사의 말에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퀄컴을 인수하라고 했단 말인가?
(인수 대신, 투자를 제안하라고 해봐. 40% 정도의 지분만 얻어도 우리가 얻을 건 다 얻을 수 있을 거야.)
인수를 포기하라니.
참 아쉽게 됐다.
퀄컴은 휴대폰 시장의 지배적 지위를 가지게 될 회사이니, 활용할 여지가 많을 텐데 말이다.
“인수 대신, 투자만 해보세요. 지분은 40% 정도를 얻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지분을 매각하는 것도 꺼리는 거 같지만, 40% 정도면 협상의 여지가 있으니 시도해보겠습니다.”
“호텔이나 자동차 회사에 대해서도 알아보셨습니까?”
나는 신은규에게 매물로 나온 호텔이나 자동차 회사를 알아보라고 시켰다.
이것저것 사용하고 남을 5천만 달러로 퀄컴을 포함하여 회사 한두 곳을 더 인수하기 위함이었다.
“여러 회사를 알아보긴 했는데, 금액대가 애매해서 한 곳밖에 추천해 드릴 수 없을 거 같습니다.”
하긴, 퀄컴에 투자할 돈을 제외하면 남는 돈이 4천만 달러에 불과하였다.
이 정도의 돈으로 자동차 회사나 호텔 회사를 인수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 곳은 어디입니까?”
“이베스라고, 저가형 호텔입니다.”
“저가형 호텔이라.”
내가 추구하는 호텔은 아닌 듯싶었다.
나는 혜성 호텔을 최고급 호텔로 만들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인수 금액은 어느 정도를 예상하십니까?”
“뉴욕에도 지점이 있어서, 의외로 인수가가 높을 거 같습니다. 아마, 4천만 달러는 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민스러웠다.
구태여 4천만 달러를 주고 저가형 호텔을 인수해야 할까?
하지만 그때, 노사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내가 어디서 한 번쯤 들어본 회사인 것을 보니 인수해도 괜찮을 거 같다.)
노사의 말을 들자 더욱 고민이 되었다.
호텔과는 전혀 연관될 일이 없었던 노사가 이베스란 이름을 들어봤으면, 미래를 기대해봄 직했기 때문이었다.
“이베스란 회사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할 이야기는 다 한 거 같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혜성 호텔에 이야기해두었으니, 언제든 편하게 쉬십시오. 물론 집이 편하시다면 집에서 쉬셔도 상관없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짐이 호텔에 있으니,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두 곳을 오가며 편히 쉬도록 하겠습니다.”
신은규가 물러나고 나는 바로 노사에게 물었다.
“이베스란 회사를 굳이 인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가형 호텔을 무시하지 마라. 고급형 호텔보다, 저가형 호텔이 확장하기는 훨씬 더 쉬워.)
“하지만 호텔은 어차피 돈 많은 사람만 가는 곳 아닙니까?”
(그건 네 착각이다. 다른 나라에선 중산층도 호텔에 자주 가. 평범한 직장인들은 비즈니스 할 때 호텔을 주로 이용하고.)
“그렇습니까?”
경제가 발전하면 호텔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긴 할 것이다.
여행이나, 아니면 그냥 호텔이란 것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그러니 저가형 호텔 하나 정도 계열사로 편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토요코인이라고 내년에 만들어지는 일본 호텔이 있다. 이 호텔이 30년 뒤에 세계 최대의 비즈니스호텔 체인이 되는데, 이왕이면 이 회사를 참고하는 게 좋을 거다.)
일본의 회사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호텔이 된다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내가 호텔 회사도 하나 갖고 있어서 더 그런 거 같았다.
‘이러면 진짜 이베스란 회사를 인수할 수밖에 없겠는데?’
단순히 일본이 싫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업적인 관점에서 이베스를 인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이베스를 인수한다고 혜성 호텔을 경영할 때 큰 도움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혜성 호텔의 서비스나 시설이 이베스 같은 저가형 호텔보다 못할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노사의 말처럼, 빠르게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저가형 호텔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았다.
무엇보다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하지 않은가.
세계 최대 규모의 호텔 회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다른 길을 갈 필요는 없었다.
* * *
“이성은 은행장에게 확답을 받았습니다. 세계 상선의 인수가가 얼마이든, 100% 지원해 주겠다고 합니다.”
비서실장의 말에 쌍호 그룹 회장 김종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대기업이든 상황은 비슷하겠지만, 쌍호 그룹의 사내 유보금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돈이 생기면 바로바로 써먹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쌍호 그룹은 5공 정권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에 사내 유보금이 바닥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돈이 필요하면 은행에 빌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회사를 인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은행에서 인수 자금을 거의 100% 지원해 주기에 김종우는 자금 부족에 대한 부담 없이 인수전에 나설 수 있었다.
“세계 그룹이 세계 상선을 매각하는 건 확실한 정보겠지?”
“예. 이미 임원 이동이 시작된 상태입니다. 불필요한 자산을 현금화하는 절차도 밟고 있으니, 이르면 올해 안에 매각을 결정할 거 같습니다.”
김종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계 상선을 인수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을 듯싶었다.
은행도 도와주고 정부에서도 도와줄 텐데, 문제 생길 게 뭐가 있을까.
‘양 회장도 참 멍청하지. 괜히 각하에게 거역해서 그룹의 규모만 쪼그라들었어.’
그냥 뇌물을 많이 주고 선거만 적극 도우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저렇게 사서 고역을 겪는 것인지 김종우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양희수 회장이 그런 고역을 겪는 덕분에 세계 상선이라는 건실한 해운 회사를 인수할 기회가 생겼지만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뭔 문젠데?”
“양희수 회장이 세계 상선을 인수할 회사를 이미 내정해 둔 거 같습니다.”
그 말에 김종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창 세계 상선을 인수할 생각에 가슴이 벅차 있었는데, 찬물을 끼얹는 소식을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떤 놈이 세계 상선을 채간다는 거야?”
“혜성 그룹입니다.”
“또 혜성이야? 아니, 혜성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으면 사업을 그리 확장하면서 새로운 회사까지 인수하는 거지?”
“최근에 은행권에서 돈을 빌리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래 봤자 얼마 안 되는 규모잖아! 그리고 혜성의 그 어린놈은 그 이전부터 돈 지랄을 했다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혜성 그룹은 어떻게 자금을 조달하고 있기에 저리 공격적인 확장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안기부에서는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데,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돼? 주식으로 돈을 얼마나 벌면 저따위 돈 지랄을 할 수 있는 거야?’
김종우는 답답한 얼굴로 거칠게 콧김을 뿜어냈다.
그러자 비서실장이 물었다.
“세계 상선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내가 그 어린놈 때문에 세계 상선을 포기할 거 같아? 어림도 없지! 오히려 그놈이 나 때문에 포기해야 할 거다!”
“하지만 양희수 회장이 이한성 회장에게 넘겨주기로 했으면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경매하듯 가격을 올려봐야 양희수 회장만 재미 볼 뿐이고 말입니다.”
“방법이 없기는! 이한성 그놈에게 직접 가서 양보를 받아내는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