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노릴 게 없어서 내 거를 노리냐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혜성 그룹의 임원이니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생활비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백만 원씩 주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3저 호황의 시대가 올 거라면서요?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 예정되었는데, 예금만 하는 것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군요.”
납득이 갔다.
하긴, 내 옆에서 본 게 많을 텐데 예금만 고집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그녀가 돈 욕심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결단이 빠른 편에 속하는군. 대부분의 사람은 내년쯤 되어서야 주식을 시작하게 될 텐데 말이야.’
아기를 둘러업은 어머니부터 소를 팔아 주식을 사려는 농부까지, 이 나라가 주식에 미치기 시작할 시기가 바로 내년부터였다.
올해부터 주식을 시작한다면 확실히 남들보다 앞섰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사실 저희 아버지도 한성 씨의 투자 조언을 바라고 있어요.”
“장인어른께서 말씀입니까?”
“네. 아버지도 알게 되었거든요. 한성 씨가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재미를 많이 봤다는 사실을.”
뭐 그거야 재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그 정보를 100% 신뢰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겠지만 말이다.
“장인어른께는 일본 부동산을 추천하면 되겠군요.”
세계 그룹의 양희수 회장의 돈도 대신 투자해 주고 있는데, 처가 집안에 쩨쩨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나는 더 투자하고 싶어도 시드머니가 부족해서 더 투자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내 덕에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처가에서도 내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지.’
단순히 고마운 마음에 눈치를 보기보다, 내 덕을 더 보고 싶어서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이자는 내년이나 내후년에 일성 반도체를 받아 가는 걸로 하지 뭐.’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지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일본 부동산이요? 거기는 오를 만큼 오르지 않았나요? 제가 듣기로, 도쿄의 땅값이 몇백만 원이나 한다고 하던데요.”
유지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지금도 일본의 땅값은 ‘미쳤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긴자 같은 일부 지역의 땅값은 우리 돈으로 1억에 가까울 정도였다.
“시작에 불과합니다. 내년만 돼도 도쿄의 모든 땅값이 몇백만 원이 아니라, 몇백만 엔으로 올라갈 겁니다.”
“정말요?”
유지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백만 엔이라면 한국 돈으로는 천만 원 이상으로 봐도 무방하였다.
지금도 비싼데, 평당 천만 원 이상으로 오른다고 하니 그녀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유지은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내년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였다.
‘긴자가 1억 엔까지 오른다고 했던가?’
일부 지역은 평당 4, 5억의 시세를 형성할 터.
그야말로 도쿄를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었다.
그것도 불과 4년 안에 말이다.
“아버지에게만 말씀드릴 게 아니라, 저도 투자를 해야겠는데요?”
“실례가 아니라면 지은 씨의 시드머니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저는 현금 자산을 다 끌어모으면, 1억 정도 투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버지가 일성 그룹의 주요 임원이라서 그런가?
확실히 그녀의 자산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 명의로 된 주식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게 느껴졌다.
‘물론 그래봤자 일반인 수준에서 하는 말이지만.’
재벌들과 비교하면 그리 많다고 볼 수 없는 액수였다.
현금만 3, 4억 보유하고 있는 재벌 2세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일본 말고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게 좋을 겁니다.”
1억이 적은 돈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본 부동산을 노리기엔 턱도 없었다.
“다른 곳이요?”
“일단 증권사에 묵혀두세요. 태신 증권이나, 정우 증권이 가장 좋을 거 같습니다. 제가 팔라고 하는 시점에 파시면 최소 열 배 이상의 이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여, 열 배라고요?”
화들짝 놀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지은 씨는 저만 믿으면 됩니다.’
* * *
유지은이 예고했던 대로, 이명승 사장이 혜성 그룹 본사를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내가 고개를 숙이니, 갑자기 그가 격하게 나를 포옹하였다.
“이 회장!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이 회장이 말한 대로 했더니, 모든 게 좋아졌어요. 정말 가능성이란 게 생긴 기분이에요!”
“조언 몇 마디 해준 거로 고마워할 필요 있겠습니까. 가족인데.”
“가족이어도 고마운 건 고마운 겁니다. 하하하!”
“일단 앉으시죠.”
나는 가볍게 포옹을 풀고는 소파에 앉았다.
“이 회장도 소식을 들었죠? 내가 제일제당 사장이 된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이 회장 덕에 이런 날도 오네요. 내가 아버지에게 다시 인정을 받게 되다니!”
이명승 사장은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50대인 그가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이유로 야단을 떠니 뭔가 우습게도 느껴졌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뒤로 줄곧 이병건 회장의 외면을 받아왔으니 저리 기뻐하는 것도 이상하게 볼 일은 아니었다.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이 회장의 말만 들어야 할 거 같아요. 이 회장의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지 않겠어요?”
떡만 생길까?
온갖 진수성찬이 생길 것이다.
물론 마지막까지 내 말을 듣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저를 좋게 봐주시는 건 좋은데, 결국 이병건 회장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이명승 사장님이 설득을 잘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명승 사장님께서는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런가요? 하하.”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사장님은 이제 막 시작점에 올라섰을 뿐입니다. 이호승 부회장을 꺾으려면 지금 수준으로는 안 됩니다.”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었다.
그러자 이명승 사장이 허허롭게 웃었다.
“허허, 그럼요. 아직 갈 길이 먼데 벌써 승리에 취할 수는 없지요.”
“제 말이 무례하게 느껴졌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사과라니, 당치도 않아요. 나는 이 회장이 늘 이렇게 거리낌 없이 말해줬으면 해요.”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나를 거의 무슨, 유방의 장자방처럼 여기는 그였으니, 내가 아무리 따끔한 일침을 가해도 귀 기울여 들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명승 사장의 성격 자체가 남의 말에 잘 경청하고 그것이 옳다 여기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릇이 넓다는 건 이명승 사장의 큰 장점 중의 하나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이명승 사장을 향해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당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말해주세요. 이 회장의 말은 언제나 경청하고 있으니까.”
“엔화가 올라가면서 대일수입 비중이 높은 일성 전자도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반도체의 적자도 더욱 심각해질 텐데, 이 사실을 이병건 회장님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반도체의 적자가 심각해지는 것은 사실이니, 아버지께 다시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도체의 적자에 대해서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게 좋았다.
그래야 이호승을 견제할 수 있을 테니까.
이호승을 꾸준하게 견제하기만 한다면 이명승 사장이 일성 그룹의 회장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두 부자의 관계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병건 회장이 아예 반도체 사업을 포기했으면 금상첨화인데,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
아마 웬만해서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도쿄에서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겠다고 떠들썩하게 선언했던 것이 불과 2년 전이었다.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는 것은 일성 그룹 회장으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호승 부회장이 조용하군.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아마 뒤에서 칼을 갈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뭐, 그래봤자 무섭지는 않았지만.
* * *
이명승 사장은 떠나기 전, 조심스럽게 투자 자문을 부탁하였다.
그 역시도 나에 대해 이것저것 들은 게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유정석에게 조언했던 것과 똑같이, 일본 부동산을 추천해 주었다.
“도쿄 쪽 부동산을 노리시면, 몇 년 안에 큰 이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이명승 사장은 크게 감사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회장!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귀한 정보를 주다니! 이 정보로 큰 이익을 얻는다면, 이 회장에게 반드시 보답할게요!”
“손해 보시고 저를 탓하지만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나는 그렇게 염치없는 인간이 아니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믿겠습니다.”
이명승 사장은 싱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이 회장. 잘 있으세요. 나는 이만 일어나볼게요.”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이명승 사장이 물러나자, 양준현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회장님, 일성 그룹과도 친분이 있으십니까?”
“내 처가가 어딘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아 참. 그랬었지.”
양준현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은 정말 대단하신 거 같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일성에서조차 회장님께 조언을 구하러 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부 떨기는.”
“아부라니요. 저는 정말 회장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니 제가 나중에 사업을 하면 이것저것 조언 좀 많이 해주십시오.”
그가 넉살스럽게 말하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업? 세계 그룹으로 안 가고 독립할 생각이냐?”
“세계 그룹은 저희 형님이 가져가야죠. 저는 제 길을 직접 만들어 갈 생각입니다.”
“그래?”
내 비서로 일하고 있으면서 그런 야무진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하긴, 양기현도 세계 그룹을 이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니, 나름대로 괜찮은 판단인 거 같긴 했다.
“그런데 회장님,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어떤 소식?”
“쌍호에서도 세계 상선을 노린다고 합니다.”
“뭔 소리야, 그게?”
“재계에서 소문이 파다한데 못 들어보셨어요? 쌍호 회장이 대놓고 세계 상선을 인수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쌍호 회장이 세계 상선의 사정을 어떻게 알고 인수를 운운해?”
양희수 회장이 세계 상선을 매각하려는 것은 아직 세계 그룹 안에서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 나로선 의아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세계 그룹에 있어 세계 상선은 애물단지나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뭐 다른 기업도 해운 회사를 애물단지로 보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런데?”
“해운 합리화 조치로 50%에 달하는 양도세를 물지 않게 됐으니, 그걸로 추측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세계 그룹에서 해운 사업을 정리한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매각 준비를 밟고 있기도 하고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세계 그룹의 사정이 안 좋다고 여기고 있으니, 세계 상선을 매각한다고 지레짐작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근데 웃기는군. 하필 내 거나 다름없는 세계 상선을 인수하려고 하다니.’
운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같았다.
하기야, 나에게 동화 자동차와 거하 자동차를 뺏긴 시점에서 쌍호 그룹의 미래는 이미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정작 본인들은 회사를 뺏겼다는 사실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쌍호 회장이 그렇게 요란을 떨었다면 이제 망신을 당할 일만 남았군.”
“당연히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흐흐. 혜성에게 털리고 아주 개망신을 당할 겁니다.”
양준현이 즐겁다는 듯 그리 말했다.
역시 세계 그룹의 사람이라서 그런지, 쌍호 그룹을 안 좋게 보는 모양이었다.
‘도저히 좋게 볼 수가 없긴 하지. 그저 정부의 비호만 믿고 여기저기 다 건들고 있으니 말이야.’
이번에 나에게 개 쪽을 당해서 조금이라도 자중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