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투자 자문을 해달라고?
“올해 4분기는 그 어떤 때보다 적극적으로 투자를 할 것입니다.”
임원들은 내 말에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혜성 그룹은 지금도 상당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었다.
전자나 자동차 쪽은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에 비유될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더 적극적으로 투자를 한다니?
“새로운 사업을 벌이실 계획입니까?”
“예. 기존 사업의 역량 강화를 위한 투자도 계속 유치하되, 새로운 사업에 대한 투자도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
새로운 사업, 이를테면 편의점 사업이나 식품 관련 사업을 벌일 계획이었다.
꾸준하게 넓혀온 인맥을 활용하여 방산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고 말이다.
“또한 해외 사업을 총괄하는 해외 사업 본부를 신설하여 수출도 적극적으로 늘릴 것입니다.”
엔화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상품 수출이 대단히 유리해졌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부터 해외 사업을 적극적으로 밀어볼 생각이었다.
3저 호황이란 과실을 가장 선두에서 누리려면 지금부터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마침 수출할 제품들이 늘어나고 있지.’
자동차부터 시작해서 술과 의류, 그리고 각종 가전제품까지.
혜성 그룹은 수출 기업으로 발돋움하기에 충분한 잠재력을 가졌다.
마케팅을 늘리고 상품 디자인을 조금만 수정해 준다면 천억 단위를 수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장님, 사내 유보금이 넉넉지가 않은데 괜찮겠습니까?”
“부족한 자금은 대출로 충당할 계획입니다.”
내 말에 임원들이 반색하였다.
평소에도 대출을 권장하던 그들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재현 대표.”
나는 기뻐하는 임원 중에 혜성 전자의 대표인 이재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이재현이 ‘예!’라고 큰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혜성 전자에 2백억의 자금을 추가로 지원하겠습니다. 이재현 대표는 이 2백억의 자금으로 세탁기에 이어 냉장고와 청소기, 그리고 컴퓨터까지 점유율을 최대한 끌어올리세요.”
황 노인에게 6백억을 받기로 했기 때문일까?
무려 2백억이란 돈을 거침없이 사용하였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올해 안에 성과를 내서, 은성 전자와 일성 전자에 이은 3위의 가전 기업으로 발돋움하겠습니다.”
이재현이 감격한 표정으로 그 같이 말했다.
다른 임원들도 부러운 시선으로 이재현을 바라봤는데, 나는 그런 분위기를 느끼며 엄격하게 경고하였다.
“작년 4백억에 이어 올해 총 350억을 지원해 줬는데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문책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경고에도 이재현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비록 아직은 적자 행진이었지만, 세탁기에서 확실한 성과를 냈고 청소기와 냉장고도 성공적으로 개발을 끝냈으니 자신감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나는 그 뒤로 다른 임원들에게도 투자를 약속하였다.
대부분은 10억 단위라면 혜성 자동차의 경우는 혜성 전자와 엇비슷한 150억의 투자 지원하기로 했다.
“하 사장님, 내년 상반기까지 반드시 뉴 코렌드를 출시해야 합니다.”
벤츠와 제휴하고 가장 먼저 출시하는 SUV 자동차, 뉴 코렌드.
나는 이 뉴 코렌드로 국내는 물론, 세계 자동차 시장에도 도전장을 내밀 생각이었다.
‘성능부터 디자인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달러의 가치가 내려감으로써 수출에도 유리해졌으니, 내년 상반기 안에만 출시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거야.’
노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86년에서부터 88년까지 3저 호황 시대를 잘만 이용한다면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가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150억을 추가 지원해서 뉴 코렌드의 개발 속도를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혜성 호텔에도 더 투자해야겠지.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준비해야 하니. 물론 혜성 모직이랑 혜성 백화점에도 더 투자해야 하고.’
편의점 준비를 위해 혜성 유통에도 백억의 투자 지원을 약속한 나는 혜성 건설의 해외 파트를 담당하는 안지호 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말씀하셨던 해외 사업 본부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룹의 해외 사업을 총괄하는 해외 사업 본부는 혜성 건설의 안지호 사장이 담당하게 될 겁니다.”
“……!”
내 말에 임원들이 눈을 크게 뜨며 경악하였다.
해외 사업 본부는 부서 이름만 얼핏 들어도 권력이 상당할 거 같은 자리였다.
말 그대로 그룹 전체의 해외 사업을 총괄하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수출이 늘면 늘수록 권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을 터.
그렇기에 임원들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엄청난 권력을 지닌 자리를 다른 누구도 아닌 안지호에게 준다고 하니, 의외로만 느껴질 것이다.
‘나를 오래 따른 사람을 중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이야.’
안지호는 내가 회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심지어 부회장이 되었을 때는 몇 번 부딪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내가 만약 작은 일을 마음에 두는 사람이었으면 진즉에 그를 팽했을 터.
하지만 나는 안지호를 팽하기는커녕 해외 파트 사장으로 계속 중임하였다.
내가 인재를 기용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결국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안지호는 건설 쪽의 실력자인 데다 국제적 감각이 대단히 우수하였다.
다른 건설사들이 해외에서 죽을 쓸 때, 유일하게 혜성 건설만이 이익을 남긴 것도 바로 그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지호를 더 높은 자리에 앉히기로 하였다.
“저 말입니까?”
“건설 쪽에서만 일하셔서 자신이 없으시다면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넘겨주셔도 됩니다.”
“그렇진 않습니다.”
“그럼 안지호 사장이 해외 사업 본부를 책임지는 거로 결정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권한이 상당한 만큼, 책임 또한 막중하니 너무 기뻐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경고하듯 말했지만, 안지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혜성 건설에서 벗어나 더 높은 자리에 앉았으니, 기뻐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 * *
임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니, 혜성 그룹 전체가 다시 숨 가쁘게 달리기 시작했다.
특히 해외 사업 본부를 총괄하는 안지호가 열성적으로 일하였다.
새로운 자리에 앉으니 기운이 넘치는 거 같았다.
“안지호 사장 좀 어떻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맨날 혜성 전자에 찾아와서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온갖 일에 참견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얼마나 열성적으로 일하는지, 혜성 전자의 이재현 대표가 하소연할 정도였다.
“본인의 일을 열심히 하는 거 같은데, 일단 두고 봅시다.”
“하지만 회장님…….”
“대표님은 여유가 많으신 모양입니다.”
“아, 아닙니다.”
“적당히 주의를 줄 테니, 돌아가서 본인의 업무에 집중해 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안지호에게 따로 주의를 주지는 않았다.
“다른 임원들이 어떤 말을 해도 묵과하고 넘어갈 테니, 안지호 사장께서는 결과로 보여주십시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안지호를 불러 격려를 해주었다.
‘본인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인데, 굳이 기를 죽일 필요는 없지.’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권력을 남용한다거나, 비리를 저지르는 등, 도가 지나치게 행동한다면 당연히 제재를 가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안지호를 독려하여 해외 사업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세계 그룹의 양 회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계 그룹의 양희수 회장이 찾아왔다.
나는 양희수 회장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해 줘서 고맙네. 그런데 너무 자주 찾아와서 그런지, 이제는 여기가 내 집무실처럼 편하게 느껴질 정도야.”
“집무실이 아니라, 집으로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하하, 말만이라도 고맙네.”
양희수 회장은 소파에 앉더니, 내 뒤에 시립한 양준현을 바라보았다.
“준현이는 일을 잘하는가?”
몸을 움찔하는 양준현의 모습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앞에서는 시끄러울 정도로 말이 많았으면서 정작 자기 아버지 앞에서는 요조숙녀처럼 조용하기만 하였다.
“예, 제 지시를 잘 따라주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짐 덩어리를 준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는데 말이야.”
“준현이는 우리 비서실에서 인재라 불릴 정도로 일을 잘하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네.”
“감사 인사라니요?”
“플라자 합의로 달러가 내려갈 것이라고 자네가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나름대로 가치가 높은 정보였다.
물론 내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정보였지만 말이다.
“양희수 회장님께서도 사업을 확장하실 계획입니까?”
“자네에게 받게 될 2백억으로 그럴 생각이네.”
양희수 회장의 말에 나는 눈을 빛냈다.
“매각을 결정하신 겁니까?”
“매각이야 진즉에 자네에게 하기로 했었지. 그런데 이제 날짜가 정해졌네. 12월 초쯤에 매각할까 하는데,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12월 초면 저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금전적으로도 가장 여유 있을 때니, 나로서는 최적의 시기라고 봐도 무방하였다.
“그런데 자네 괜찮겠는가?”
“예?”
“요즘 혜성 그룹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다시 상당한 투자를 하는 거 같던데…….”
걱정스럽게 말하는 그를 보고 나는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하였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초까지만 해도 세계 그룹은 남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양희수 회장님의 사정도 많이 좋아진 모양이군. 나를 다 걱정해주다니 말이야.’
어쨌거나 나로선 좋은 일이었다.
세계 그룹이 멀쩡해야 정부의 압박이 있을 때, 서로 공조할 수 있었으니까.
“혜성 그룹의 자금 사정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그리 말하자, 양희수 회장의 얼굴에 감탄이 서렸다.
혜성 그룹이 얼마나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는지 알고 있는 그였기에 더욱 감탄할 수밖에 없으리라.
* * *
집으로 돌아오니, 유지은이 불쑥 말을 꺼냈다.
“들으셨어요? 고모부 소식?”
“이명승 부사장님의 소식이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지은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11월에 있을 인사 시즌에, 고모부가 제일제당 사장으로 승진하신대요!”
“정말입니까?”
“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일성 그룹 내부적으로 이미 확정 났다고 해요.”
그녀의 말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씩 본래의 자리를 되찾아가는군.’
원래 사장이었으니, 별거 아닌 일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일제당은 일성 그룹의 모태 기업이었다.
제일제당의 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후계 경쟁에 도전할 자격을 얻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곧 고모부가 한성 씨를 찾아뵐 거 같아요.”
“저를 말입니까?”
“한성 씨가 고모부에게 큰 도움을 주셨다면서요? 그 일로 고모부께서 감사 인사를 전하러 찾아뵙는다고 하네요.”
“그렇습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감사해야지. 내 덕에 사장이 된 거나 마찬가진데.’
원래 같았으면 이명승 사장은 절대 사장이 되지 못했을 거다.
제일제당의 사장이 될 수 있을 만큼 이병건 회장의 신임을 받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명승 사장은 내 조언을 듣고 그걸 그대로 이병건 회장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신임을 조금씩 얻어갔다.
그러다 마침 플라자 합의가 일어났는데, 이때도 나는 조언을 해주었다.
달러의 가치가 언론에서의 보도보다 훨씬 더 내려가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명승 사장은 이 조언을 그대로 이병건 회장에게 전하였다.
‘이병건 회장은 플라자 합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지?’
다른 대기업 회장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병건 회장은 플라자 합의의 파급 효과를 무시하였다.
일본의 보수적인 정책 성향이나, 금리체계의 고수 등을 고려했을 때, 미국이 기대하는 수준만큼 엔화가 오르지 않으리라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10월 초부터 달러의 가치는 무서운 속도로 내려갔다.
엔화는 반대로 빠르게 절상되고 있었고 말이다.
이러니 이병건 회장으로선 이명승 사장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조언한 대로 엔화 가치가 올라가고 달러 가치가 내려왔으니까.
“한성 씨는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대단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몇 마디 조언해준 거뿐인데.”
내가 그리 대답하니, 유지은이 갑자기 부담스러운 눈을 하며 물었다.
“한성 씨, 실례가 아니라면 저에게도 조언해 줄 수 있을까요?”
“정확히 어떤 조언을 원하십니까?”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투자 자문을 원해요. 아주 사소한 조언이라도 좋으니, 꼭 좀 부탁드려요.”
나는 코를 쓱 문질렀다.
간절하게 부탁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