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이 돈으로 뭘 해야 하나
‘하지만 문제는 3백억을 어떻게 마련하는 가야.’
물론 한화로 3백억을 모으는 거야 어려울 게 없었다.
혜성 그룹이나 내가 보유한 현금만 합쳐도 이미 5백억이 넘었다.
혜성 그룹이야 예비용으로 돈을 남겨둬야 하니, 내 개인 자산만 동원한다 쳐도 3백억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성 전자 주식이나, 혜성 그룹의 주식처럼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할 주식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주식만 팔아도 3백억은 거뜬했으니까.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화 3백억을 말하는 것이었다.
달러, 그것도 안기부가 추적 못 하는 달러를 모으는 것은 아무리 나라도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방법은 하나뿐이겠어.’
황 노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당장에 생각나는 방법은 그거밖에 없었다.
물론 다짜고짜 황 노인에게 4천만 달러를 빌려달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만약 나를 믿어준다면, 수익의 일부를 나눠주자.’
절반까지는 아니어도, 만약 예정대로 천억 이상의 이익을 본다면 2백억 정도는 나눠줘도 될 거 같았다.
어차피 황 노인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었을 이익이었으니 말이다.
* * *
“알겠네. 자네에게 투자하지.”
일말의 고민 없이 대답하는 황 노인의 모습에 나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빌리는 쪽이 아닌, 투자를 선택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끌끌! 더 많이 버는 쪽을 선택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나?”
나는 그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하나는 기존에 돈을 빌려주던 방식처럼, 연 15%의 이자를 받는 선택지였다.
3백억을 빌려주기만 한다면 연 45억의 수익이 보장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금을 잃을 수 있지만, 1년 안에 50% 이상의 이익을 얻는 선택지였다.
보통이라면 당연히 돈을 빌려주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게 안전한 선택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 노인은 역시 달랐다.
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것인지, 원금을 잃을 수도 있음에도 3백억을 투자해 주기로 하였다.
“다만 지금 당장 빌려줄 수는 없어. 내가 4천만 달러나 되는 미국 돈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 말이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 노인이 제아무리 큰손 중의 큰손이라 해도 한화로 수백억이나 되는 달러를 가지고 있을 리는 없었다.
“적어도 9월 안에는 투자하셔야 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9월도 사실 아슬아슬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계약을 체결하는 게 힘들어질 테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황 노인은 어렵지 않다는 듯 선뜻 대답하였다.
“8월 안에는 줄 테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다행이군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황 노인이 빌려줄 4천만 달러 덕에 적어도 5천 번 이상의 계약을 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HS 인베스트먼트 자산만으로 스티브 잡스의 전성기를 능가할 수 있겠는데?’
2억 달러.
어쩌면 그만한 돈을 버는 것도 가능할 거 같았다.
물론 선물 계약이 얼마나 체결될지, 그리고 플라자 합의가 예정대로 이루어질지에 따라 결정될 일이지만 말이다.
* * *
-HS 인베스트먼트의 계좌로 곧 4천만 달러가 입금될 것입니다. 추가 자금이 입금되면 바로 계약을 이어서 진행해 주십시오.
신은규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성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4천만 달러의 추가 투자라니.
‘회장님의 자금력은 도무지 끝을 모르겠군.’
일성 그룹 회장이든, 미래 그룹 회장이든 한성보다는 자금력이 적을 거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은규가 알고 있는 한성의 개인 자산만 천억이 넘었다.
자산이 얼마나 많은지, 일개 개인이 혜성 그룹을 떠받들고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회장님의 자산이 대통령의 비자금보다 많겠는데?’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 믿겠습니다.
한성과의 통화가 끝나자 그는 곧바로 HS 인베스트먼트의 간부들을 소집하였다.
“회장님의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뭐 하랍니까?”
“자금이 더 들어올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서둘러서 계약을 진행해 주십시오.”
“헉! 여기서 더요?”
“얼마나 더 들어온답니까?”
“4천만 달러입니다.”
HS 인베스트먼트의 팀장인 김태동과 배신웅은 신은규의 말을 듣고 경악하고 말았다.
백억도 그들에게는 큰돈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4천만 달러의 돈이 추가된다니!
“아니, 회장님께 보고 안 하셨어요? 달러가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거?”
“했습니다.”
“그런데도 추가로 투자한다고요? 이건 미친 짓이에요. 만약 달러가 12월까지 계속 올라간다면 4백억이 모두 없어지는 거라고요!”
“맞습니다. 제가 봤을 때, 이건 너무 위험한 투자입니다. 회장님이 엄청난 자산가라는 건 알겠는데, 4백억은 회장님에게도 큰돈 아닙니까? 대표님이 직접 나서서 회장님을 말리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으니 신은규도 조금 불안해졌다.
같이 일하면서 느낀 건데, 두 사람은 통화 상품 관련해서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였다.
행실이 허접스럽게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 바닥의 전문가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회장님의 말을 듣는 게 맞아. 따지고 보면 회장님은 주식의 전문가도 아닌데 주식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버신 분이니 말이야.’
잠시 불안감을 느꼈지만, 이내 깔끔하게 털어냈다.
신은규에게 지시를 내린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혜성 그룹 회장 이한성이었다.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몇 개의 회사를 인수할 정도의 자금력을 확보한 한성이었기에 신은규로서는 그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장님의 지시입니다. 이견은 듣지 않으니, 지시에 따라주십시오.”
“아, 진짜 불안한데…….”
“돈을 전부 잃어도 저희 탓 아니니까, 괜히 저희에게 불똥 튀지 않게 회장님께 잘 말해주십시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은 결코 책임을 회피하실 분이 아니니까. 이번 일은 오롯이 회장님이 책임지기로 하였으니 여러분은 지시대로만 하면 됩니다.”
신은규는 당당하게 그리 말했지만, 팀장들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한성의 밑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었으니 말이다.
‘사실 나라고 안심해도 좋을 처지는 아니지. 만약 이 돈을 전부 잃으면 나도 내쳐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시킨 일만 했을 뿐이지만, 4백억은 너무나도 큰돈이었다.
한성이 흥분하여 그를 내친다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회장님의 판단이 맞기를 바라는 수밖에.’
지구 정반대 편에 있을 한성의 판단을 맡기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그로서는 따로 방도가 없었다.
선물 거래에 대해서는 그도 아는 게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며 8월을 보내고 마침내 9월이 되었다.
4천만 달러가 계좌에 입금되자, HS 인베스트먼트는 열심히 엔화 콜옵션과 마르크화 풋옵션 계약을 진행하였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계약이 진행되는군.’
증거금이 쌓여가는 모습을 보며 신은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겨우 석 달.
석 달 안에 달러의 가치가 내려가지 않으면 최소 200억을 잃게 될 것이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계약을 체결할 것이니 남은 200억까지 포함해 총 400억의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았다.
그야말로 대기업의 핵심 계열사를 인수할 수 있는 자금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셈이었다.
이러니 HS 인베스트먼트의 대표를 맡은 신은규로서도 날이 갈수록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은 도대체 이 중압감을 어떻게 이겨낸 것일까.’
신은규보다 훨씬 큰 사업을 벌이고 있는 한성이었으니 중압감도 당연히 훨씬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을 터.
그런데도 지금까지 내색 한 번 안 했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한성에 대한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요? 계약 치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게, 우리랑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세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때였다.
9월 둘째 주의 어느 날, 김태동이 그 같은 보고를 하였다.
“누군가 우리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엔화 선물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마르크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직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말고도 달러의 가치가 내려갈 거로 예측하는 세력이 있는 건가?’
신은규는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내심 안도하였다.
달러의 가치가 내려간다는 게, 한성 혼자만의 예측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상했던 바입니다. 우리도 가격을 더 높여서 엔화 선물을 사들이세요.
한성에게 보고하니, 이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예, 알겠습니다.”
HS 인베스트먼트는 다른 세력을 신경 쓰지 않고서 선물 거래에 집중하였다.
그러자 목표했던 계약 수를 거의 다 체결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목표를 전부 채울 수 있겠는데?’
한성의 지시를 이행했다는 생각에 신은규가 내심 뿌듯해하고 있을 때, 9월 22일이 되었다.
“대표님! 지금 뉴스를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저에게 묻지 마시고 뉴스부터 보십시오!”
신은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급하게 말하는 배신웅의 모습이 의아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급한 소식인 거 같았기에 서둘러서 TV를 틀었다.
-우리 5개국은 미 달러화 가치를 내릴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고 대외 불균형 축소를 위해 재정, 통화 정책을 공조하겠습니다.
플라자 호텔을 배경으로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프랑스의 피에르 베레고부아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IMF의 자크 드 라로지에르 영국의 나이절 로슨 일본의 다케시타 노보루가 서 있었다.
G5의 재무장관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가 한 가지를 선언하였다.
5개국이 서로 공조하여 미 달러화 가치를 내리겠다는 선언이었다.
“와, 회장님의 예측이 정확하게 맞았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미국이 설마 이렇게 강압적으로 나올 줄이야.”
“근데 저 합의문에 실효성이 있을까요? 합의문 내용을 보면 어떤 이행 사항도 안 적혀 있잖아요?”
“미국이 협박해서 저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일본이나 독일이 과연 어깃장을 낼 수 있겠습니까? 아마 공식적인 합의문에만 저런 내용밖에 없는 거고, 비공식적으로는 달러를 얼마나 내리고 엔화와 마르크화를 얼마나 올릴지 다 정해뒀을 겁니다.”
팀장과 직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신은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이번에도 회장님의 예측이 맞았어.’
달러가 얼마나 내려갈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한성이 엄청난 이익을 보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결국, 한성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다시금 증명된 셈이었다.
* * *
신은규가 전해준 소식에 노사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예정대로 플라자 합의가 이루어졌으니, 적어도 2억 달러는 가지겠구나.)
2억 달러라니.
한화로 따지면 얼마일까?
‘달러 가치가 내려갈 테니, 예전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엄청난 액수겠어.’
9월 중순까지는 890원에 1달러였다면, 선물 계약이 끝날 때쯤이면 800원대 초중반까지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화로 1,600억이 넘는 금액이었다.
혜성 그룹이라는 대기업을 경영하는 나조차도 가슴이 들뜰 정도로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더 많은 달러를 모아서 HS 인베스트먼트에 보낼 걸 그랬습니다.”
물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고 그딴 도박 수를 던져? 이번에는 네 돈이 백억밖에 안 되고, 황 노인이 아무런 조건 없이 4천만 달러를 빌려줘서 내가 허락한 거지만, 다음에는 이런 도박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은규가 중간에 보고했었잖아. 계약 체결하는 게 어려워졌다고. 아마 더 많은 투자를 했어도 다른 놈들 때문에 계약을 다 체결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긴, 그럴 거 같기는 했다.
플라자 합의가 이루어질 것을 눈치챈 세력이 있는 것인지, 우리 말고도 달러 가치가 내려가는 것에 돈을 건 세력이 제법 있었다.
아마 더 많은 달러를 가져갔어도 그들 때문에 목표했던 계약을 체결 못 했을 거 같았다.
(쓸데없는 소린 그만두고, 이 돈으로 뭐할지나 생각해라.)
그 말을 듣자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1,600억이 넘는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