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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00화 (100/300)

100화 급할 건 없다

“그런데 정말 놀랐어요. 전에는 혜성 전자? 아무튼 그곳의 대표라고 하셨는데, 갑자기 혜성 그룹 회장이 되셨더라고요.”

스티브 잡스는 감탄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혜성 그룹도 의외였어요. 전자 회사를 비롯하여 자동차에 호텔에 백화점과 건설까지. 정말 계열사가 많은 거 같더군요.”

“예. 말씀하신 계열사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세계 상선까지 추가되었으면 더 자신 있게 말했을 텐데, 아쉽게도 스티브 잡스가 거론한 계열사 외에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계열사가 없었다.

물론 혜성 그룹을 대표하는 5개의 계열사만으로도 스티브 잡스는 크게 감탄한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참고로 재계 순위가 올해 안에 5위까지 올라갈 전망입니다.”

“5위요? 일성 그룹이 몇 위였죠?”

“……2위에서 3위를 오가고 있을 겁니다.”

나는 답변을 하면서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일성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내 입으로 직접 알려줘야 한다는 게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어서 빨리 빅 5가 되어야 할 텐데.’

새삼 그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성 그룹과 얼마 차이 안 나네요? 와우! 혜성 그룹이 이렇게 큰 기업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내 답변을 듣고 탄성을 질렀다.

아무래도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한국 기업이 일성이라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 같았다.

‘계속 일성, 일성 거리니 뭔가 조금 기분이 그렇군.’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화제를 전환할 겸 본론을 꺼냈다.

“사실, 스티브에게 제안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안이요? 호오, 어떤 제안인가요?”

“그전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스티브는 혹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스티브 잡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의 나처럼 그도 내 말을 듣고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애플에서 쫓겨난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새로 시작해야죠. 여기서 멈춰있을 내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애플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나는 반드시 새로운 사업을 성공시켜 애플을 다시 내 것으로 만들 거예요. 어떤 수단을 써서든 말이죠!”

그 말을 들은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가 벌써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사실상 인생의 첫 실패 아닌가? 당연히 의욕이 꺾여있을 줄 알았는데, 벌써 명확한 목표를 세우다니.’

그냥 실패도 아니었다.

동료와 부하 직원들에게까지 버림받을 정도로 처참한 실패였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실패를 겪고 난 뒤에는 재기불능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벌어둔 자금으로 은퇴를 하던가.

‘역시 혁신의 아이콘이란 별명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닌 모양이야.’

심지어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목표를 이뤄내기까지 하였다.

불과 십수 년 뒤에 자신을 팽했던 애플로 다시 돌아가 권좌의 자리를 되찾게 될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스티브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니 다행이군요. 마침 투자 제안을 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투자 제안이라…….”

스티브 잡스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런 스티브 잡스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표정을 보니, 사업 자금이 충분하신가 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업 자금이 충분할 리가 있을까요. 애플의 주가도 많이 내려갔는데요. 다만 일방적으로 회사를 빼앗기고 나니, 다른 사람의 투자를 받는 게 조금 꺼려지네요.”

“하지만 투자를 받지 않고 사업 자금을 충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지만, 그리 많은 액수를 빌릴 수는 없을 테니까.”

“전 어차피 한국에 있으니 스티브의 경영권을 크게 간섭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투자를 받는 것에 너무 부담 가지시지 마십시오.”

“흠…….”

내 말에 조금은 설득된 모양인지, 스티브 잡스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좋아요. 투자해준다는데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얼마나 투자를 해줄 수 있습니까?”

“우선 5천만 달러를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그 정도를 투자할 수는 없었다.

5천만 달러면 한화로 400억이 넘었으니까.

하지만 선물 거래가 끝난 이후에는 얼마든지 가능하였다.

“5천만 달러라…….”

스티브 잡스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의 자산이 2억 달러였던 적도 있으니, 이 정도 액수에 놀랄 이유는 없었다.

물론 그의 현재 자산은 대폭 줄어들어 1억 달러가 채 안 되겠지만 말이다.

“우선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다음에 더 투자할 여력이 있다는 거겠죠?”

“예. 확실하게 가능성이 보인다면 얼마든지 더 투자할 수 있습니다.”

“재력이 상당하시군요.”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기업의 크기는 일성보다 작을 수 있어도, 개인 자산만큼은 일성 회장을 압도한다고 말입니다.”

“참 부러워요. 그룹도 상당히 큰데, 개인 자산까지 많다니.”

“스티브가 이룬 성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5천만 달러를 지원해 준다면 저야 좋긴 한데, 지분은 어느 정도 생각하고 계시죠?”

“최소 49%는 가져갔으면 합니다.”

“49%요? 욕심이 지나친데요. 제 자금이 얼만 줄 아시고 5천만 달러로 지분 절반을 가져가려고 하시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까칠하게 반응하였다.

하긴, 스티브 잡스의 입장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창업주인데도 애플사에서 강제로 쫓겨난 처지였으니 말이다.

“그럼 스티브가 생각하는 상한선은 몇 퍼센트입니까?”

“30% 이상은 줄 수 없어요. 저도 최소 2천만 달러 이상을 투자할 생각이라서 말이죠.”

“5천만 달러인데 30%라니. 아직 설립하지도 않은 회사인데 1억 6천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죠. 나, 스티브 잡스의 회사인데.”

“…….”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났음에도 이런 자신감이라니.

하지만 그의 말에 설득이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확실히 스티브 잡스라는 이름이라면 그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5천만 달러에 30%? 좋습니다. 스티브의 요구를 들어주겠습니다.”

“오, 현명한 선택을 하셨어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검지를 들어 올리며 그 같이 말하자 스티브 잡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드웨어 부문엔 진출하지 마십시오. 개인용 PC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하드웨어는 포기하고 오직 소프트웨어에만 집중하셨으면 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곧 만들게 될 회사의 이름은 넥스트.

이 넥스트 사는 스티브 잡스의 이름값이 아까울 정도로 성과가 미미하였다.

하드웨어 부문의 경우는 적자 행진을 거듭하다가 결국 캐논에 사업 전체를 매각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넥스트 사의 소프트웨어들은 IOS와 OS X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

하드웨어 부문은 실패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부문은 달랐다.

나도 어떤 건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IOS라는 운영체제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하드웨어 부문을 포기하게 만들고, 노사가 알고 있는 소프트웨어 정보까지 조언해준다면 넥스트는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다.’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스티브 잡스에게 지원하는 5천만 달러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넥스트 사의 지분 30%면 한화로 수천억도 우습게 될 테니까.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마시죠. 하드웨어를 포기하라고? 그러면 내가 사업하는 의미가 없잖아!”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PC 시장은 예전처럼 소자본으로 뛰어들 수 있는 시장이 아닙니다.”

“내가 애플을 처음 만들었을 때도 모두가 그딴 소리를 지껄였어요! 하지만 현실은 어떻죠? 차고에서 일어난 애플은 IBM을 넘어서 개인 PC의 일인자가 되었지 않나요?”

“하드웨어 부문을 계속 고집한다면 저는 어쩔 수 없이 투자 제안을 철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말에 스티브 잡스는 코웃음 쳤다.

“바라던 바에요. 이런 식으로 간섭하는 투자자는 저도 필요 없어요.”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혹시 한국에 있는 동안에, 아니 미국에 돌아간 이후에도 생각이 바뀌신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스티브가 소프트웨어에만 집중한다면 얼마든지 투자를 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내 목표는 IBM PC에 맞설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연 저 고집이 얼마나 갈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길어봐야 몇 년.

그리고 1~2년 정도는 나도 기다려줄 수 있었다.

스티브 잡스와 내가 만들 넥스트는 노사가 설명해준 마이크로소프트 이상의 기업이 될 것이니까.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다지? 내가 IT로 진출하여 그의 영역을 뺏는다면, 세계 제일의 부자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겠어.’

혜성 그룹에 미국 최고의 소프트웨어 사가 될 넥스트의 지분까지.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미래가 아닐 수 없었다.

* * *

협상이 결렬돼서 바로 떠날 줄 알았는데 스티브 잡스는 의외로 오랫동안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 호텔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물론 그런 단순한 이유로 한국에 남아있을까도 싶지만, 혜성 호텔 쪽의 보고를 들어보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룸서비스도 곧잘 이용했고, 조식도 매일 먹는다고 하니 말이다.

“스티브 잡스가 어떤 결정을 내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불쑥 묻자 노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야. 투자를 안 받으면 안 받았지, 하드웨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거다.)

“그렇습니까.”

(물론 지금 당장 그렇다는 거고,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마 내년쯤이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

노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나도 당장은 5천만 달러를 투자할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스티브 잡스가 결정을 미뤄준다면 나야 좋았다.

“그래도 만에 하나 스티브 잡스가 끝까지 고집을 피울 것도 염두에 두어야겠군요.”

소프트웨어는 스티브 잡스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긴 했다.

성공을 경험했던 사람이고, 성공이 예정된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인지도까지 생각한다면, 절대 실패할 리가 없는 투자였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투자를 받지 않을 가능성도 생각해둬야 했다.

내가 아무리 어떤 투자자도 하지 못할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고 해도, 하드웨어 부문을 포기하라는 그 조건 하나 때문에 투자를 거절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럴 경우는 네가 직접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해야지. 그룹 내부에 자회사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말이야.)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나는 간접 투자보단 내가 직접 사업을 주관하는 쪽이 더 맞았으니까.

‘다만, 스티브가 사업하는 것보단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지.’

한국에서야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미국에서의, 그리고 세계에서의 성공은 아마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직접 모든 일을 주관한다면 모를까, 한국에서 전화로 지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IT 쪽은 그리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혜성 그룹의 자본만 충분하다면 90년대에 시작해도 늦지는 않아.)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사의 말이 맞았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기존에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

즉, 호텔 사업을 비롯하여 전자, 건설, 자동차, 백화점 등이었다.

물론 플라자 합의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선물 거래나 일본 부동산 거래도 계속 신경을 써줘야겠지만 말이다.

‘일단 1, 2년 정도 스티브 잡스의 답변을 기다리고, 정 안 되면 그때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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