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누가 온다고?
“세계 상선을 얻는다면, 혜성 그룹의 기업 순위가 단번에 5위까지 되겠군. 미리 축하하네.”
양 회장의 말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세계 상선을 받기 전이라서 그런 것일까?
재계 순위 5위가 된다는 게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뭐 사실 재계 순위 5위가 된다고 특별할 것이 없기는 하지. 규모 면에서는 지금도 거의 비등비등하니까.’
단순히 재계 순위 5위가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정우, 미래, 일성, 은성 등 네 개의 그룹과 같은 반열에 서는 것.
즉, 빅 5 그룹의 일원이 되는 게 중요하였다.
‘올해 안에 가능할까? 아니면 내년? 적어도 1987년 안에는 빅 5 안에 들고 싶군.’
빅5가 되면 많은 게 달라진다.
정부의 눈치도 덜 보게 될 것이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질 것이다.
물론 인재 수급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왕이면 1987년 안에는 빅 5에 들고 싶다.
“축하하기는 이른 거 같습니다. 미래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설레발 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속으론 빅 5까지 노리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겸손하게 대꾸하였다.
그러자 양 회장이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자네는 천생 사업가야. 나였으면 미친 듯이 기뻐했을 텐데, 자네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침착한 거 같아.”
“아닙니다.”
“자네 덕에 기현이도 많은 걸 배운 거 같네. 늘 감정만 앞세우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냉철함도 가지게 된 거 같아.”
이런 칭찬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어리둥절하였다.
일을 열심히 시키면 시켰지, 내가 따로 무언가를 가르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봐야 양 회장은 겸손하기까지 하다며 되레 칭찬을 할 거 같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러고 보니 기현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세계 그룹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인제 그만 세계 그룹의 일을 시켜야 할 거 같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니 말이야.”
“아쉽게 됐군요.”
나는 진심으로 아쉬워하였다.
양기현은 비서로서 상당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세계 그룹의 장남이 아니었다면 어떤 조건을 제시해서든, 영입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정 아쉬우면, 다음에는 내 둘째 아들을 맡아주는 게 어떤가? 얼마 전에 둘째 아들이 전역했거든.”
양 회장의 말에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는 내가 뛰어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회장님의 자녀분이 제 일을 도와준다면 저야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잘 됐군. 둘째 아들까지 자네 밑에서 일한다면, 우리 사이가 더 끈끈해지겠어.”
“……하하.”
더 끈끈해질 게 있겠냐 마는, 좋은 게 좋은 거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양 회장을 배웅해 주었다.
* * *
세계 컴퓨터 및 통신 분야 초대기업인 IBM과 AT&T사가 7월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컴퓨터 시장에 진출한다는 소식에 국내 컴퓨터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금성 반도체도 이탈리아의 올리베티사와 기술제휴를 맺어, 이번 달 말부터 16비트퍼스컴인 GSSPC24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컴퓨터 업계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는군요.”
아직 흑자로 전환하지도 못했는데 경쟁만 치열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일성에서조차 컴퓨터 시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였다.
‘뭐 이 정도 경쟁은 예상했던 일이니 문제 될 것은 없지.’
경쟁이 심해지고 있지만, 시장도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정부에서도 행정 전산망이나, 교육 관련해서 수주를 늘리고 있었으니, 컴퓨터 산업의 전망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스텔라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스텔라는 혜성 전자의 컴퓨터 사업부에서 야심 차게 출시한 ‘한국형 컴퓨터’였다.
PC 한글화와 국산화를 강조하였는데, 벌써 시장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수요 예측에 실패한 거 같습니다.”
“예? 실패했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렇게까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일 줄 알았으면 진즉에 생산을 늘렸을 텐데, 수요 예측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재현의 능글스러운 말에 나는 픽 웃었다.
“상당한 자신감을 보이시는군요. 올해 컴퓨터 사업부의 매출을 기대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올해에는 반드시 흑자 전환을 하고 내년에는 10만 대 이상의 판매를 목표 삼아보겠습니다.”
실로 믿음직스러웠다.
반도체나 세탁기에서도 성과를 보이고 있었지만, 역시 주 종목인 컴퓨터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는 거 같았다.
“지금까지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마시고, 국산화율을 90%로 끌어올리십시오. 또한 업무 처리 능력까지 늘리면 국내의 컴퓨터 시장은 우리가 접수할 수 있을 겁니다.”
“예, 국내뿐만이 아니라 세계 시장까지 접수할 수 있게끔 심혈을 기울이겠습니다.”
“반도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음, 아시겠지만 반도체 쪽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야말로 적자 행진이 이어가고 있는데, 이게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컴퓨터 이야기할 때는 자신감이 넘치던 그였지만, 반도체로 화제가 전환되자 목소리 톤이 급격히 낮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반도체의 치킨 게임이 점점 과격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 예상되는 적자가 최소 백억이라나?’
최소가 100억이었다.
심지어 내년에는 더 심해질 전망이었다.
반도체를 팔면 팔수록 적자가 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 정도면 일성 전자는 아주 죽을 맛이겠군요. 그쪽의 공장 규모는 우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니 말입니다.”
“하하……. 일성 부회장이 일성 회장에게 매일 깨진다는 소문도 들려오는데, 아마 소문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일성 전자의 적자는 어느 정도일까?
노사의 추측대로라면 아무리 못해도 5백억 이상은 될 거 같았다.
내년까지 총 천억 이상의 적자를 봤다고 하니 말이다.
“저, 회장님. 반도체의 전망이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는데, 반도체 투자를 줄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재현이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업계 종사자인 그로서는 반도체 사업부의 앞날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적자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길어야 2년. 딱 2년만 버티면 됩니다. 그때까지 버틴 사람이 D램 시장의 지배자가 될 겁니다.”
“2년이요?”
“내년이면 일본이 가장 먼저 나가떨어질 겁니다.”
“미일 분쟁의 여파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미국도 오래 못 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허어.”
“미국과 일본이 떨어지면 반도체 시장에는 한국 업체만 남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한국이 D램 시장을 좌지우지하게 되겠군요.”
“예. 2년 뒤에는 그렇게 될 겁니다.”
실제로 일성은 내가 이야기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반도체 업계의 절대 강자가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노사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내가 바꾸게 될 세계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일성 반도체조차 혜성이 집어삼킬 테니까.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측이라고 말씀하셔도 사실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꼭 2년이 아니더라도, 혜성 그룹의 체력이라면 몇 년이고 버틸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혜성 그룹은 일성보다 오래 버틸 수 있었다.
현금 보유량부터가 일성을 압도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한 자산도 상당하였으니, 100억 정도의 적자야 몇 년이고 버틸 수 있었다.
“하하! 역시 든든하군요. 알겠습니다. 회장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셨으니, 저는 걱정 없이 반도체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가전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이번에 개발한 청소기, 회장님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모양새가 아주 잘 빠졌습니다. 세탁기는 외형이 너무 투박해서 욕 좀 먹었지만, 청소기는 그럴 염려 안 하셔도 될 겁니다.”
확실히 청소기 모양이 예쁘게 나오긴 했다.
가격도 저렴해서 통돌이처럼 젊은 가정주부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냉장고나 다른 가전제품도 올해 안에 가능하겠지요?”
“최대한 서둘러보겠습니다.”
“그럼 우선 청소기에 집중해주시고 바코드 스캐너도 한 번 만들어보십시오.”
“바코드 스캐너 말씀입니까? 그게 과연 시장성이 있을까요?”
“지금 당장은 시장성이 없어 보여도, 88올림픽이 가까워지면 상황이 달라질 겁니다.”
1986년엔 아시안 게임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바로 2년 뒤에 있다.
88올림픽.
전 세계의 축제가 서울에서 열리는 것이다.
‘슬슬 우리 그룹도 88올림픽을 준비해야겠지.’
바코드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호텔과 마켓, 백화점 등을 대대적으로 리뉴얼하여 외국인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덤으로 편의점 사업도 시작하고.’
물론 당장 시작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늦어도 1987년에는 시작할 생각이었다.
노사의 세계에서는 편의점 사업이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나는 구태여 그 길을 따라 걷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많은 것이 바뀐 세상이니, 앞으로 내 길은 내가 직접 만들어가고 싶었다.
그 시작이 바로 편의점 사업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 * *
미국에서 신은규가 소식을 전해주었다.
HS 인베스트먼트의 직원을 모두 충당하여 선물 거래 준비를 끝마쳤다는 소식이었다.
“첫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앞으로 달러가 떨어지는 쪽으로 최대한 크게 베팅을 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세계 흐름을 보면 플라자 합의는 예정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배팅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스티브 잡스와의 이야기는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신은규에게 HS 인베스트먼트 말고 또 하나의 지시를 내렸다.
스티브 잡스를 한국으로 초빙하는 일이었다.
-어렵게 승낙을 받아냈습니다.
“그래요?”
의외였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내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긴 했었나 보네.’
아니면 그만큼 스티브 잡스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뭐가 됐건, 스티브 잡스가 어려운 발걸음을 해준다고 하니 그와 관련된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았다.
귀한 손님을 홀대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7월 4일에 내한하기로 했습니다.
7월 4일이라.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곧 미국에서 귀빈이 찾아올 건데, 어떤 식으로 환영해주는 게 좋을 거 같습니까?”
신은규와의 통화가 끝나고 나는 비서진에게 그 같이 물었다.
그러자 양기현이 자동차와 운전기사를 공항에 보내 손님을 마중케 하라는 말을 하였다.
“차 기종은요?”
“이왕이면 혜성 자동차가 생산하는 자동차를 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티브 잡스가 워낙에 예민하고 괴팍한 사람이라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회가 생겼을 때 스티브 잡스에게 혜성 그룹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
일성 전자처럼 컴퓨터와 반도체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자동차까지 생산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아무래도 호텔에서 있는 시간이 가장 길 것이니, 호텔에서의 의전이 가장 중요할 거 같습니다.”
“호텔도 역시 혜성 호텔에서 묵게 하는 게 좋겠지요?”
“예. 그래야 그룹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귀빈을 환영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괜히 샤롯이나 일성 그룹의 호텔에 가면 의전하기도 번거로웠고, 내가 직접 찾아가기도 애매해진다.
그러니 혜성 호텔을 최대한 꽃단장하여, 스티브 잡스를 혜성 호텔로 부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앞으로 혜성 호텔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어.’
원래도 유지은이 일하는 곳이라서 신경을 많이 쓰긴 했었다.
요즘 매출이 많이 올라가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88올림픽과 스티브 잡스를 의전하는 일까지 더해지자 혜성 호텔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 느낌이었다.
‘이왕 꽃단장할 거, 외국인들이 한국이란 나라를 다시 볼 수 있게끔 만들어야지. 물론 혜성 그룹의 브랜드 이미지도 챙기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