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플라자 합의를 준비해야겠군
이병건 회장도 어느덧 70대였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경쟁도 제대로 못 해보고 허무하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고 말 것이다.
‘실제로 이병건 회장이 별세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지.’
고작 2년.
2년 안에 어떻게든 이호승 부회장과 자웅을 겨룰 만한 세력과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지 이병건 회장이 갑자기 별세했을 때, 왕위 경쟁을 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가장 좋은 거는 이명승 사장이 이병건 회장에게 후계자로 임명받는 거지만 말이야.’
아마 그건 쉽지 않을 것이다.
이호승 부회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후계자라……. 이 회장은 저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보세요?”
“사장님은 장남이시지 않습니까. 장남이란 사실 하나만으로 후계자가 될 자격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장남은커녕 삼남에 불과한 내가 이런 소리를 하니 역설적이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 시대에 장남이란 것은 엄청난 메리트였다.
실제로 이병건 회장에게 찍혔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에도 이명승 사장을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은 것도 이명승 사장이 장남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저를 인정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야 그럴 것이다.
이병건 회장이 보기에 이명승 사장은 무르기 그지없었으니까.
너무 정도를 고집하기도 했고 말이다.
“제일제당으로 가십시오. 그러면 이병건 회장님께서도 사장님을 다시 보게 될 겁니다.”
“부사장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말씀이죠?”
“예. 사장이란 직책을 버리고 일성 그룹의 모태 기업인 제일제당에 가셔서 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십시오. 물론 이병건 회장님의 마음도 사로잡으셔야 합니다.”
나 역시 혜성 모직에서 시작했다.
매출이나, 인지도는 낮았지만, 그룹의 모태 기업이란 사실 하나 때문에 혜성 모직을 선택했던 것이다.
일성 그룹은 우리 혜성 그룹보다 역사가 길었다.
그러니 모태 기업의 정통성과 영향력은 훨씬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만약 이명승 사장이 일성 제일제당을 확실하게 자기 세력으로 만든다면, 후계 경쟁에서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저에게 이런 조언을 해준 사람은 이 회장님이 처음이에요. 한때 사장으로 근무했었던 곳을, 부사장이 되어 다시 들어가라니.”
“당장은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빠르게 가는 지름길일 겁니다.”
내 말에 이명승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 역시 이 회장의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이었다.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제 의견에 따라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내일 바로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려고요.”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제 의견을 따라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고맙죠. 아무도 해주지 않은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다니. 정말 저로서는 이 회장이 든든하게만 느껴져요.”
이명승 사장은 굳게 신뢰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조언으로 몇 번 이득을 본 일이 있어서 그런지, 나를 깊게 믿는 거 같았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어떤 거죠?”
“이병건 회장님께 반도체 산업의 비관적인 전망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원래 이명승 사장은 이병건 회장과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었다.
후계자의 자리를 박탈당한 뒤, 부자 관계가 극도로 악화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명승 사장은 내 조언을 받고서 이병건 회장과의 만남을 늘리고 있었는데, 그는 이병건 회장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는 했다.
물론 그가 표출하는 의견은 내가 조언해 준 내용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올해의 경제 흐름이나, 앞으로 치중해야 할 먹거리 사업 등에 관한 조언들을 말이다.
처음에는 이명승 사장의 의견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이병건 회장이지만, 경제 흐름이 이명승 사장이 이야기했던 대로 흘러가자, 태도가 달라졌다.
조금씩 이명승 사장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승이의 업적을 깎아내리라는 뜻이군요.”
“예. 반도체 산업의 평가가 부정적일수록, 이호승 부회장에 대한 지지와 신뢰도 점차 하락하게 될 겁니다.”
“흐음.”
일성 그룹에서 반도체 산업을 진두지휘했던 것이 이호승 부회장이었다.
당연히 일성 반도체의 적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호승 부회장에 대한 평가도 안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망설이는군. 무르다는 평가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어.’
사업가의 체질은 절대 아니었다.
장남이 아니었으면 후계자 자리에 도전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 같았다.
“결코 근거 없이 모함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이 회장은 정말로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전망하시는 건가요?”
“언제쯤 상황이 좋아질지는 저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년까지는 치킨 게임이 이어질 거라고 예상합니다.”
내후년에는 상황이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말해주진 않았다.
그가 반도체를 부정적으로 여길수록 나야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래요?”
이명승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민하는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결단을 내렸다.
“동생의 성과를 비난한다는 게 형으로선 못 할 짓이긴 한데, 어쩔 수 없군요.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그렇게 부정적이라면, 이 회장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나를 굳게 신뢰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 * *
(이명승이 네 말을 아주 잘 따르는구나.)
“그러게요. 저도 놀랐습니다.”
(만약 이명승이 일성 그룹 회장이 된다면 볼만하겠어. 물론 그때도 네 말을 따를지 의문이지만 말이야.)
뭐 사실 그거까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나의 공을 인정해주기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애초에 일성 그룹 회장이 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도 않지.’
이미 대세는 많이 기울어진 상황.
이명승 사장을 최대한 도와주기는 할 거지만, 전세를 뒤엎기는 힘들 거 같았다.
‘그래도 일성 반도체의 적자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야.’
제아무리 일성 그룹이 빅 4의 재벌이라 해도 수천억의 적자를 감수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내년쯤 일성 반도체의 적자가 무서울 정도로 오를 것이니, 그때 승부수를 띄우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요즘 이호승 부회장은 뭐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통돌이가 히트 친 일로 일성 회장에게 많이 깨진 모양이야. 그래서 임원들과 대책 회의를 거듭하고 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세탁기를 처음 출시했을 때만 해도 비웃기 바빴던 일성 그룹인데, 이제야 위기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직 이명승 사장에 대해서는 크게 경계하지 않나 봅니다.”
(이명승보다는 이명승 뒤에 있는 너를 더 경계하고 있지. 실제로 그의 입장에서는 네가 더 위협적이기도 하고.)
“또 귀찮게 굴 수도 있겠군요.”
요즘은 조용하지만, 언제 또 고려일보를 동원하여 혜성 그룹을 깎아내릴지 모른다.
아니면 다른 수작을 부릴 수도 있었고 말이다.
(걱정 마라. 내가 이호승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줄 테니.)
“요즘은 정부를 감시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감시할 필요가 있겠어? 109석이나 차지한 신한당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그도 그렇군요.”
신한당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다른 정당의 의원들이 신한당으로 계속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한당의 규모가 커질수록 5공의 시선도 국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재벌을 신경 쓸 여력이 사라진 것이다.
‘겨우 50억으로 이만한 위력을 발휘하다니. 돈의 힘이 확실히 대단하긴 해.’
이번 일로 새삼스럽게 금력의 힘을 깨달았다.
뭐, 신한당의 저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호승의 반격은 걱정하지 말고, 너는 어서 다른 가전제품을 출시하기나 해. 혜성 전자의 제품이 히트하면 히트할수록 이호승이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니 말이야.)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분도 매수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매수했고, 이명승 사장에게 조언해줄 것도 다 조언해주었으니 나는 이제 내 일에만 집중하면 될 거 같았다.
혜성 전자의 신제품들만 성공시켜도 일성 그룹의 후계 경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니 말이다.
* * *
결국 이명승 사장은 한성의 조언에 따라 일성 제일제당 부사장이 되었다.
측근들의 조언을 물리치고 한성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셋째는 부회장인데, 장남은 부사장이야? 불쌍하다, 정말. 동생한테 밀려나다니 말이야.”
“근데 본인이 자처했다는 소문이 있어.”
“에이, 설마? 본인이 자처해서 좌천당했다고?”
사장에서 부사장이 되었으니, 당연히 소문이 좋게 날 일은 없었다.
재계의 사람들은 이명승 사장이 좌천당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이는 일성 그룹 후계 경쟁이 완전히 끝이 났다고 결론 내리기도 했다.
‘이명승이란 자가 이한성 그놈이 밀어주는 자랬지?’
명동 큰손 4인방 중의 한 명인 방준호 회장은 이명승 제일제당 부사장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한때 한성에게 자발적으로 돈을 빌려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황 노인의 영향이 크기는 해도, 한성의 정보력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서 돈을 빌려주어, 그 대가로 정보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성과의 거래는 무산되고 말았다.
방준호 회장의 거래 제안에, 한성은 3백억을 아무런 담보 없이 빌려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하였고 자연스레 거래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방준호 회장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혜성 그룹의 미래가 아무리 유망해 보여도 담보 없이 3백억이란 거금을 빌려줄 수는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성과 혜성 그룹이 승승장구하였고 재계 7위를 위협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에 따라 한때 그의 경쟁자였던 황 노인이 지금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자본을 굴렸다.
방준호 회장으로선 이러한 결과를 지켜보고 나니 한성과의 일이 후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명승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예측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솔직히 나도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긴 한데……. 이한성 그놈이 밀어주고 있으니, 일성 그룹의 후계 경쟁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야.’
원래라면 이명승 제일제당 부사장 같은 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재벌 후계자도 아니고, 허울뿐인 장남인데 명색이 명동 큰손 4인방 중의 한 명인 그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한성이 이명승 제일제당 부사장을 밀어준다는 소식을 접하니 생각이 달라졌다.
이미 한 번 한성과 거래가 무산된 일로 깊게 후회를 하였는데, 또 기회를 놓쳐서 후회를 반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명승 제일제당 부사장에게 연락해. 오늘 안에 만나자고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아무도 이명승 제일제당 부사장의 가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
한마디로 저평가주인 상태였다.
이런 때 투자를 한다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황 씨 영감탱이. 내 비록 당신만큼은 못 해도, 다른 두 놈만큼은 추월해 보겠어.’
* * *
일이 재미있게 돌아갔다.
‘방 회장이 무슨 생각으로 이명승 부사장에게 거금을 투자한 걸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충격을 주었다.
물론 나쁜 충격은 아니었다.
이호승이 아닌, 이명승을 지원하고 있었으니까.
‘이유야 뭐가 됐건, 3백억이면 앞으로 후계 경쟁에서 큰 도움이 되겠어.’
그냥 큰 도움 정도가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 3백억으로 후계 경쟁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회장님,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이소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손님이 찾아왔다.
지금 찾아온 손님들은 다름 아닌, 투자 전문가들이었다.
‘이제 슬슬 플라자 합의를 준비해야겠군.’
부동산부터 선물 거래까지.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그러니 세 달 넘게 남은 지금부터 서둘러 준비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