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정치인에게 기대 같은 건 하지 마
혜성 그룹의 이한성.
김영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재벌의 이름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의문의 후원자는 한성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이한성 회장이 왜 우리를 지원해 준 것이지?’
의문이었다.
차라리 세계 그룹이었으면 이해가 갔을 것이다.
세계 그룹은 부산 기업이었으니까.
하지만 혜성 그룹은 강남 개발로 대기업이 된 기업이었고, 부산이나 김영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원래도 정부와 사이가 안 좋았지만, 최근 들어 더 사이가 악화하였다지? 설마 그거 때문일까?’
김영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부와 사이가 안 좋아졌다는 이유로 신한당을 지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 같았다.
제아무리 재벌이라 해도 30억이란 돈이 적은 돈인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어쩌면 그냥 순수하게 민주화를 지지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실제로 혜성 그룹은 5공에게 따로 혜택을 받은 게 없기도 하니까 말이야.’
뭐가 됐건 그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해 줄 줄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지원한 30억만으로 총선의 결과를 바꾸기엔 충분하였다.
부산뿐만이 아니라, 서울과 경기도에서도 돌풍을 일으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혜성 그룹의 회장을 한번 만나봐야겠어.”
“이한성 회장을 말입니까? 왜 그를 만나려고 하시는지?”
“궁금한 게 있어서 뭐 좀 물어보려고 그러네.”
김영산은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그같이 말했다.
한성과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과연 그는 어떤 재벌일지 궁금하군.’
* * *
2.12 총선의 개표 결과가 나오자 전대환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개표 중계를 지켜볼 때부터 설마설마했었다.
허문대 청와대 정무1수석이나 최창원 비서관 등이 불안한 소리를 해도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었다.
아직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개표 결과가 나오고 나니, 그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신한당이 59석을 차지하다니.”
전대환은 쓸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하여 신한당을 방해하였다.
유명 인사들이 신한당에 합류하지 못하게 막는가 하면, 미국에서 귀국한 김태중을 김영산과 만나지 못하게끔 강제로 끌고 가기까지 했다.
물론 언론이 편파 보도를 하게 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2.12 총선의 결과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창당한 지 불과 보름밖에 되지 않은 신한당이 59석이나 차지한 것이다.
전국구 의석까지 포함하면 무려 80석이나 될 정도였다.
“이제 직선제 요구를 막는 것도 힘들어지겠군.”
“그, 그래도 여당이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안기부 부장이 애써 변명하듯 그리 위로하자, 전대환이 역정을 냈다.
“전국구가 있어서 그 정도라도 얻은 거지! 의석수를 득표율에 맞춰서 고르게 배정했다면,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졌을 거라고!”
여당에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지역구 1당이 전국구 의석의 2/3를 독식하는 선거 제도 덕에 간신히 276석 중의 140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선거제도가 아니었으면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져서, 직선제 개헌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대책이나 이야기해! 대책을!”
“……그, 야당을 분열시키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고의 선택이 아닐지.”
쾅!
“누가 그딴 뻔한 소리를 하라고 했나?”
“죄, 죄송합니다.”
“답답하기 그지없군!”
전대환은 안기부장을 보며 혀를 찼다.
‘안기부장, 저놈은 개표 예측부터 시작해서 뭐 하나 제대로 맞는 게 없어. 무능한 놈 같으니. 당장 해임해서 다른 놈을 불러와야겠어.’
마음 같아서는 안기부장뿐만이 아니라 죄다 갈아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측근들을 갈아 치워봤자 좋을 게 없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 * *
“축하드립니다. 한진영 의원님.”
“하하, 고마워요. 이 회장.”
한진영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상 여당이 참패한 상황이었지만, 한진영은 원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국회 입성에 성공하였다.
내가 상당한 자금을 지원해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거 참……. 내가 고향을 떠나자마자, 고향에 큰일이 생겼다고 하니 기분이 묘합니다.”
“고향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안기부 말이에요. 안기부.”
“아…….”
한진영의 말에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안기부장이 곧 해임된다지?’
대통령이 총선 결과로 큰 충격을 받긴 한 거 같았다.
자신의 오랜 측근인 안기부장도 해임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꼴좋다.’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한진영을 위로해주었다.
“지금이야 어수선해도, 금방 좋아질 겁니다.”
“그렇지요?”
“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기부가 설마 이런 일로 문제 생길 리 있겠습니까.”
“이 회장이 그리 말해주니 참 위로가 되는 거 같군요.”
“아닙니다. 그저 당연한 말을 했을 뿐입니다.”
“선거 도와준 일도 그렇고, 이 회장에겐 고마운 점이 많아요. 혹시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겉으로야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 두 눈을 빛냈다.
한진영은 안기부 고위 간부 출신의 정치인이었다.
1985년인 올해부터 안기부의 권력이 전성기를 맞이할 테니, 그의 존재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안기부를 떠났다고 그가 안기부 출신이란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역시 그를 밀어주길 잘했어.’
그가 일개 야인이 되었을 때도 나는 변함없이 그를 대하였었다.
선거에서도 금전적인 도움을 많이 줬었고 말이다.
아마 그는 나를 은인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도움을 청하면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것이다.
한진영에게 쓴 돈이 10억이 채 안 되니 나로선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저는 그럼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봐요. 이 회장.”
“예.”
그렇게 한진영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니 노사가 불쑥 말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당연히 기분이 좋지요. 신한당이 80석이나 확보하는 쾌거를 이뤄냈는데.”
원 역사보다 무려 10석이나 늘어났다.
그리고 그 의석 대부분이 여당의 것을 빼앗은 것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더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정부도 한동안은 세계 그룹과 우리 혜성 그룹을 방해하지 못하겠죠?”
(그렇겠지. 당분간은 국회를 신경 쓰느라 정신없이 바쁠 거다. 직선제 개헌 요구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것이니 말이야.)
“신한당을 지원하길 잘한 거 같습니다.”
(내 예상보다 훨씬 결과가 좋았다. 김영산 쪽에서도 너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같고 말이야.)
“김영산 의장님이 제가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까?”
나는 들뜬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노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의장? 김영산이 뭐라고 그렇게 공손하게 불러? 그냥 의원이라고 부르면 될 것이지.)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의장이시지 않습니까. 김태중 선생님과 함께 공동으로 말입니다.”
김영산은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극소수의 정치인 중에 한 명이었다.
물론 김태중도 마찬가지였는데, 나는 정치에 크게 관심을 두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정치 행보에 대해서만큼은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문과 감금을 당하고 23일 단식 투쟁을 하면서까지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두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5공 정권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도 있었고 말이다.
(혹시나 김영산이나 김태중에게 정치인으로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면, 그런 기대는 접는 것이 좋을 거다.)
노사가 경고하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런 노사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상당하시군.’
노사도 한때는 나처럼 김영산이나 김태중을 존경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기대를 배신당하고 정치인 전체를 불신하게 된 것일 테지.
“크게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전대환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내 말을 부정하지 못하는 노사의 모습을 보며 픽 웃고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김영산 의장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별거 없다. 고마운 감정을 느끼고 있기는 한데, 그보다는 네가 왜 신한당을 지원했는지 의문스럽게 여기고 있어.)
“그렇습니까.”
(아마 곧 너를 찾을 거 같은데, 굳이 만나줄 필요는 없다.)
“김영산 의장님을 만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5공이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뭐 하게? 이미 눈도장은 확실하게 찍었으니, 나중에 5공의 힘이 약해지고 나서 만나도 충분해.)
하긴, 맞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5공의 입장에서는 혜성 그룹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질 텐데, 이런 상황에서 김영산을 만나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래도 아쉽군.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정치인인데 말이야.’
* * *
세계 그룹도 위기를 무사히 넘겼고, 정부도 2.12 총선 결과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다시 회사를 경영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2월 중순에는 벤츠와의 협의를 위해 독일에 잠시 들르기도 하였다.
‘늦었지만 그래도 결국 벤츠와의 협의를 이루어냈군.’
오랜 협의 끝에 마침내 벤츠의 디젤엔진을 공급받는 데 성공했다.
동아시아에 진출하려는 벤츠와 이해관계가 일치한 덕분이었다.
“뉴 코렌드는 새롭지 않은 건 이름뿐일 정도로 혁신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예! 회장님!”
벤츠에게 기술 제휴를 받게 되자 나는 더욱더 적극적인 투자를 이어나갔다.
우선, 오래된 자동차인 코렌드를 2백억가량 투자하여 신차 개발을 시작하였다.
정통 지프 스타일에, 승용차의 디자인 요소를 조합하였는데, 출시만 된다면 젊은 층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 거 같았다.
‘이 차가 출시될 때쯤이면 내수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할 때이니,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사겠지?’
실용성을 강조하면서 디자인도 혁신적이었다.
노사가 알려준 역사적 사례도 있으니, 실패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세단에도 신경 쓰세요. 내후년에는 반드시 출시해야 합니다.”
승용차 개발도 시작한 상태였다.
현재 혜성 자동차는 SUV 전문 브랜드로 알려졌지만 나는 SUV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1987년에는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도 끝이 날 터.
그러니 그때를 대비하여 승용차 개발을 진행하였다.
기화 자동차처럼 시기를 놓쳐봐야 좋을 게 없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세단 역시 벤츠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SUV처럼 단순히 기술 제휴만 받는 것이 아닌, 차의 디자인부터 벤츠가 담당하였는데, 꽤 모험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벤츠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수출은 어떨지 몰라도 국내에서는 매출이 어느 정도 보장이 될 거 같았다.
* * *
아쉽게도 혜성 자동차의 신차 개발에 관한 결과를 보려면 1년에서 2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자동차 개발이라는 게 단기간에 성과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혜성 전자의 제품들은 달랐다.
세탁기는 벌써 제품 개발이 끝나 출시 시기만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회장님. 이게 바로 세탁기 연구소에서 새로 개발한 통돌이입니다.”
“아주 튼튼해 보이는군요.”
“예! 다른 기업들의 세탁기에 비하면 기능이 별로 없지만, 잔고장이 없고, 오래 가는 세탁기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세탁 기능은 굉장히 뛰어난 편이고 말입니다.”
고창모 연구소장의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감탄이 섞인 눈빛으로 통돌이를 쓰다듬었다.
유려한 곡선이니 뭐니 그런 건 전혀 없었다.
디자인적으로는 투박하고 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원하던 것처럼 한눈에 봐도 튼튼하게 보이긴 했다.
‘세탁기가 꼭 예쁠 필요는 없지. 저렴하면서 고장이 안 나는 게 가장 최고의 제품이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도 바로 이 통돌이 같은 세탁기일 게 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