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복수를 미룰 필요는 없지
“새로운 직장은 마음에 드세요?”
내가 불쑥 묻자 집무실을 구경하던 유지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혜성 호텔의 모든 게 마음에 들었어요.”
“다행이군요.”
“물론 임원분들이 저의 눈치를 본다는 게 조금 난감하기는 해요.”
“그렇습니까?”
나는 픽 웃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유지은은 혜성 그룹의 안주인이었다.
내 최측근도 아니고, 거의 다 외부에서 스카우트 받고 들어온 혜성 호텔의 임원들이니 그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혜성 호텔은 정말 잠재력이 있는 회사에요. 앞으로 있을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생각하면 매출 역시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거 같아요.”
“투자를 더 늘려달라는 말씀처럼 들리는군요.”
“투자를 늘려주시면 좋죠.”
“고민해 보겠습니다.”
“너무 부담가지시지는 마세요. 그냥 제 개인의 의견이니까요.”
“그런 말씀을 하시니 더 부담되는군요.”
“그런가요?”
“농담이고, 사실 저 역시 혜성 호텔에 대한 투자를 늘릴 생각입니다.”
“정말요?”
그녀의 말처럼 혜성 호텔은 충분한 잠재력이 있었다.
지금이야 작년에 인수한 청담동 호텔을 제외하면 제대로 개업한 곳이 없었지만, 그 청담동 호텔의 매출부터가 상당한 수준이었다.
개업한 지 반년도 안 지났는데 매출이 벌써 80억이었다.
그리고 새로 지어지고 있는 혜성 호텔의 서면점이나 70년대 여관식 호텔에서 현대식 호텔로 탈바꿈하고 있는 기존의 혜성 관광호텔들도 기대가 되었다.
대부분 입지가 좋았으니 굉장한 수준의 매출을 보여줄 거 같았다.
“투자를 늘려주는 대신,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이라니요. 저도 회사에서는 회장님의 부하 임원인데요.”
“그럼 지시라고 정정하겠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반드시 샤롯 호텔을 꺾어주십시오. 저는 제가 가진 어떤 회사도 샤롯에게 밀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샤롯 그룹.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틈이 날 때마다 나를 귀찮게 만들었던 기업이었다.
기업 순위도 크게 벌어졌으니, 새삼스레 경쟁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었지만 그래도 샤롯 그룹에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저는 혜성 호텔을 업계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 생각이에요! 샤롯 호텔이든, 뭐든, 반드시 꺾어낼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유지은과 혜성 호텔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소희가 손님이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손성수 재무관님이 오셨다고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거절했을 것이다.
유지은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굳이 약속도 안 잡은 손님을 접대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상, 만남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참 예의가 없군.’
이렇게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하물며 나는 혜성 그룹의 회장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필 지은 씨가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죄송합니다, 지은 씨.”
“아니에요. 이따 집에서 봐요.”
“예. 들어가세요.”
그렇게 유지은이 물러나고 손성수 청와대 재무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손성수는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 회장, 이번에는 성급하셨어요.”
“다짜고짜 성급하다고 말씀하시니 당혹스럽군요. 정확히,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세계 그룹에 3백억을 빌려줬다고 들었어요.”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세계 그룹을 도운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함인 듯싶었다.
“예, 그렇습니다.”
“어쩌자고 그러셨어요? 세계 그룹이 각하의 미움을 샀다는 사실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내가 내 돈을 빌려주겠다는데, 지가 왜 난리인지 참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최대한 저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양희수 회장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부탁하니, 나이가 어린 저로선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5백억 빌려달라는 것을 조금 줄여서 빌려준 겁니다.”
“쯧, 그렇게 변명해 봐야 의미가 없어요. 이번에 각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간단히 대답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 거 같습니까?”
“성의를 보여야겠죠. 최대한의 성의를.”
그가 말하는 성의란 결국 뇌물을 의미하였다.
그것도 한두 푼의 뇌물이 아닌, 십억 단위의 뇌물을 말이다.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혜성 그룹도 세계 그룹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될 거예요.”
“…….”
“물론 혜성 쪽에서 뒤늦게 성의를 보인다 해도, 어느 정도는 피해를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각하에게 거역했는데 아무런 조치가 없을 수는 없으니 말이에요.”
대놓고 보복을 선언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참 기분이 엿 같군.’
마음 같아서는 ‘해볼 테면 해봐!’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대놓고 대통령에 맞서봐야 좋을 게 없었다.
내후년, 아니, 적어도 내년은 되어야 대통령에게 맞서도 좋을 여건이 만들어질 것이다.
* * *
내가 지원해준 3백억이 큰 역할을 한 것일까?
원래라면 지금쯤 부도 위기를 겪었어야 할 세계 그룹은 다행히도 큰 위기 없이 정부의 압박에 대응하고 있었다.
아마 원 역사처럼 순식간에 무너질 일은 없을 거 같았다.
노사의 말했던 대로 올해는 어떻게든 버텨내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 사실에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정부가 세계 그룹이 아닌, 우리 혜성 그룹을 압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재계 10위 안에 드는 재벌 중에 가장 재무가 건전한데도 대출이 막히다니. 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습니다.”
사실 정부는 특별한 조치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소문 하나를 퍼뜨렸을 뿐이었다.
다름 아닌, 혜성 그룹이 정부에 찍혔다는 소문을 말이다.
하지만 그 별거 아닌 소문 하나에도 혜성 그룹에는 작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세계 그룹이 그랬던 것처럼, 대출이 막히는 동시에 신용도가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이다.
(전대환의 미움을 샀으니 어쩌겠냐. 독재 국가에서 이건 당연한 결과야.)
“정말 마음에 안 듭니다. 마음 같아서는 노사께서 말씀하신 복수를 지금 당장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내가 괜히 전대환 그놈을 복수 대상으로 삼은 게 아니야. 그놈은 내 원수일 뿐 아니라 너의 원수이기도 하다. 그러니 너는 지금 느끼고 있는 기분과 굴욕을 잊지 마라. 언젠가 꼭 복수해야 하니 말이야.)
나도 이 기분을 잊을 생각이 없었다.
언젠가 반드시 대통령을 비롯한 5공의 핵심 인물들을 응징하고 마리라.
‘아니. 꼭 나중을 기약할 필요가 있을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야 내가 힘이 없었으니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자금력이란 걸 가진 상태였다.
금력으로만 따진다면 한국에서 제일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내가 아무리 부자라 해도 대놓고 정부에 맞설 수는 없었다.
혜성이 설령 재계 1위의 대기업이어도 정부에 맞선다면,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대놓고만 맞서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돈만 있으면 방법은 많았다.
이를테면 선거를 방해한다던가.
“신한당이 이번 선거에 돌풍을 일으킨다고 하셨죠?”
나는 노사에게 불쑥 그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래. 내가 기억하기로 신한당은 50석에 가까운 의석을 확보해서 제1 야당으로 급부상하게 될 거다.)
나로선 선뜻 믿기 어려운 결과였다.
지금 날짜는 1월 21일.
신한당이 창당한 지 불과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막 창당한 정당이 열흘 정도밖에 안 남은 2.12 총선을 통해 제1 야당으로 급부상한다니.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노사의 말이었으니까.
“만약에 저희가 지원해 준다면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한당에게 선거 자금을 지원하자는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여당은 재벌들에게 뜯은 자금으로 돈이 남아돌 지경인 데 반해, 신한당의 자금 사정은 굉장히 열악하였다.
오직 국민의 지지 하나로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만약 선거 자금까지 풍부해진다면?
돌풍 정도로 안 끝날 수도 있다.
어쩌면 폭풍이 되어 5공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갈 수도 있으리라.
(나쁘지 않겠구나. 총선에서 신한당이 큰 성과를 내면, 우리 혜성을 압박하는 일도 줄어들 테고 말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신한당에서 50석 수준이 아니라 6, 70석을 차지한다면, 5공 정권은 우리를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야당을 견제하기 바빠질 테니까.
(다만 네가 신한당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전대환에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단순히 혜성 그룹을 보복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거다. 전대환은 아마 너를 납치하든, 사고사 처리하든, 둘 중 하나는 할 거야.)
“알고 있습니다.”
노사의 말은 실로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이럴 때 쓰려고 비자금을 많이 모아놨었지.’
엔화로 일본에다 따로 모으고 있는 비자금을 제외해도, 내 비자금의 규모는 250억이 넘었다.
여당이라면 모를까, 야당 그중에서 신진 야당인 신한당에게는 이 돈도 실로 엄청난 돈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250억 전부를 지원해 줄 수는 없었고, 아마 이 중에 50억만 지원해 줘도 신한당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50억을 주면 나중에 대통령이 될 김영산에게도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겠어. 가장 어려운 처지에 가장 극적인 도움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야.’
단순히 5공 정부에게 보복하려는 차원에서 신한당을 지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신한당의 실세인 김영산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가 더 컸다.
김영산은 머지않은 미래에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네 뜻이 그렇다면 최대한 도와주마. 정부에 걸리지 않게끔 말이야.)
“노사님께는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됐다. 네가 전대환 그놈에게 한 방 먹여준다는데,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노사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마치 내가 이런 선택을 하기만을 기다렸던 거 같았다.
* * *
“오늘도 거액의 후원금이 들어왔습니다!”
김영산은 자신의 최측근, 서재석의 말에 크게 반색하였다.
“또 10억이 왔어?”
“그렇습니다! 이번 선거는 정말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해볼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의문의 후원자에게서 지금까지 지원받은 금액만 30억이었다.
이 정도 선거 자금이라면, 모든 야당을 압도하고 여당과도 정면 승부를 겨룰 수 있을 거 같았다.
‘심지어 선거 자금만 지원받은 게 아니지.’
의문의 후원자는 여당 후보의 약점이나 비리에 관한 정보도 주었다.
그렇게 제공된 정보 대부분이 선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보들이었다.
“이번에도 편지 말미에 방배동이라고 적혀 있었나?”
“예!”
“방배동에 사는 거액의 후원자라…….”
김영산은 턱 끝을 쓰다듬었다.
30억이란 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한당은 한 개인에게서 30억의 돈을 지원받았다.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야. 아마 재벌 중의 한 명일 테지.’
당연하다.
평범한 사람이 그 정도의 자금력에 정보력까지 갖추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정보력과 자금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재벌이 가장 유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방배동에 사는 재벌 중에 우리를 지원해 줄 사람은 한 명밖에 안 떠오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