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세계 상선을 준다고?
‘그러고 보니, 한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났겠군.’
양희수는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세계 그룹은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년 전부터 피를 깎는 심정으로 부채를 줄이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제2 금융권이 회수할 대출금만 해도 4천억이 넘었을 테지.’
완매채도 천억 이상에, 제1금융권 대출도 거의 1조에 가까웠을 거다.
그렇게 대출이 많았을 때 정부의 압력을 받았으면 세계 그룹은 부도를 면치 못했을 터.
그런 의미에서 한성은 세계 그룹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세계 상선의 가치를 생각하면 적어도 5백억은 주고 매각해야 할 텐데, 혜성 그룹에 그만한 돈이 있겠습니까?”
“돈이야 충분할 거다. 다만, 혜성에서 해운업에 진출할 의지가 없을 거라는 게 문제야.”
1982년부터 시작된 불황은 1985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이어 가고 있었다.
작년에는 백 개가 넘던 해운 회사가 33개 사로 통폐합되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사업적 감각이 남다른 한성이라면 해운업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점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에 하나 혜성 그룹에서 인수를 결정한다 해도 양도세가 50%나 되는데,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대기업이 자회사를 잘 매각하지 않는 이유가 그저 사업욕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회사를 팔아 봤자, 양도차익의 50%를 세금으로 떼었기에 어쩔 수 없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내년이 되면 해외 건설과 해운이 합리화 대상으로 지정받게 될 것이다. 그때는 세계 상선을 팔아 생긴 돈을 세금 공제 없이 전액 빚 갚기에 쓸 수 있겠지.”
“지금 당장은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세계 상선을 내년에 2백억 정도로 싸게 파는 조건으로 3백억을 빌릴 생각이다.”
3백억은 대출이니 제외한다 치면, 실질적으로 세계 상선을 2백억에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못해도 5백억 이상의 가치를 지닌 세계 상선을 그야말로 반값보다 싸게 파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계 그룹의 상황에서는 돈을 빌릴 수만 있다면 그 정도 조건이라고 제시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3백억을 빌릴 수만 있다면 세계 상선을 매각해도 그리 아깝지 않겠군요.”
한제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그는 평소에도 세계 상선을 매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세계 상선을 팔아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면 그로선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 * *
1985년 1월.
나는 신문지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결국, 정부의 보복이 시작되었군요.”
(양 회장이 여당의 선거를 돕지 않았으니, 예정된 결과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내 말에 노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원 역사보다 부채 비율이 줄어들긴 했지만, 자체적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부채가 아직도 많습니까?”
(당장 갚아야 할 돈만 수백억이야. 너의 충고를 들은 이후로 현금을 많이 늘렸다지만, 은행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한계가 있지.)
“은행은 절대 안 도와주겠죠?”
(안 도와준다. 정부의 미움을 샀다는 이유만으로 세계 그룹의 신용도가 큰 폭으로 떨어졌어. 원래 부채가 많은 기업이기도 했으니, 은행들은 절대 세계 그룹을 지원해 주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세계 그룹을 도와줄 수 있는 곳은 저희밖에 없겠군요.”
사채업자들도 웬만해서는 세계 그룹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재작년에 있었던 세무조사 이후로 정부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다른 기업들이라고 세계 그룹을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일성이나 미래처럼 다른 재벌 그룹들과 혼인 동맹을 구축한 것도 아니기에, 세계 그룹은 고립된 처지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도와줄 겁니다.”
내가 즉답하니, 노사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나 지원해 주려고?)
“최대 5백억까지 지원해 줄 생각입니다.”
(5백억이라. 그 정도나 동원해도 되겠냐?)
“주식으로 꽤 재미를 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황 노인이 3백억을 빌려준다고 말하기도 했고 말입니다.”
1984년에 워낙 많은 돈을 써서 천억으로 시작했던 나의 돈도 꽤 많이 깨졌다.
여러 계열사 중에 혜성 자동차 한 곳에서만 쓴 돈이 거의 7백억에 가까울 정도였다.
호텔이나 백화점을 짓는 데도 많은 돈을 썼었고 말이다.
‘하지만 돈을 쓴 만큼 새로 들어온 돈도 상당하지.’
일성 전자, 혜성 건설 등등 내가 보유한 주식의 가치만 8백억이 넘었다. 작년 한 해, 주식으로만 3백억 이상을 번 셈이었다.
부동산의 가치도 그새 많이 올라서 언제든 천억 이상을 빌릴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혜성 그룹의 전체적인 매출도 많이 올랐는데, 혜성 건설의 실적이 저조했는데도 불구하고 연 매출 1조를 달성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올해부터 매출이 폭발적으로 상승할 거라는 사실이야.’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스레 그룹의 매출도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기업보다도 준비를 많이 했으니,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세계 그룹에 수백억 빌려주는 것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본 부동산에 투자할 돈도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나는 노사의 그 같은 말에 씩 웃었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단 말이지. 과연 얼마나 벌어들일까?’
노사가 말하기를, 내후년인 1987년만 되도 ‘도쿄를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지금도 도쿄의 땅값이 비싸긴 해도 절대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 나로서는 얼마나 오를지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미리 엔화를 모아두고 있지 않습니까.”
(잘했다. 나비효과가 발생하지 않아서 선물까지 대박이 난다면, 내후년의 너는 세계적인 거부가 될 거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선물은 위험부담이 너무 커서 아주 작은 시드머니로만 거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플라자 협의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그 작은 시드머니가 엄청난 돈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노사와 세계 그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지 불과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양 회장이 혜성 건설 사옥을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양 회장은 그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네.”
그의 입에서 예상했던 말이 나왔다.
하기야, 한창 급박한 시기에 나를 찾아올 이유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 말고 없기도 했다.
“말씀하십시오.”
“자네도 알다시피, 요즘 세계 그룹의 자금 사정이 여의치가 않네.”
“예, 저도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평소처럼 편하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돈을 빌리는 입장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양 회장의 이런 기죽은 모습을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네가 그리 말해주니 정말 고맙군. 알겠네. 편하게 용건을 말하지. 혹시 세계 상선에 대해 알고 있나?”
“세계 상선 말씀입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돈 빌려달라는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는데, 세계 상선을 거론하니 의아한 기분이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해운 쪽으로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순위 안에 드는 기업이지 않습니까?”
세계 상선은 한때 노사가 탐을 냈던 회사였다.
양인정과 혼인하여 지참금으로 받아오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
‘나중에 해운 쪽으로 진출할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탐이 나는 회사이긴 하지.’
지금은 불황이지만, 몇 년만 지나도 한국의 해운업은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노사 역시도 바로 그 해운업의 전성기에 해운 사업을 하여 재계 70위권의 중견 그룹을 키워냈다.
그래서 나 또한 해운업에 진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계획이 없었지만 말이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사실 이번에 자금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 상선을 매각할까 생각 중이네.”
“……그렇습니까? 어려운 결단을 내리셨군요.”
놀라운 이야기였다.
자회사를 매각하여 자금을 확보하겠다니.
다른 재벌 회장들이라면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마 권오중 회장 같은 사람이라면 파산 직전까지 버티고 버텼겠지. 대마불사를 외치면서 말이야.’
대마불사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대기업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질 거 같으면 정부에서 금융 지원을 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양 회장의 결단이 놀랍게만 느껴졌다.
정부가 도와줄 거라는, 헛된 기대를 하지 않고서 13년을 함께 한 회사를 포기하면서까지 그룹 전체를 구하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그렇다면…….”
“맞네. 세계 상선을 매각하기 위해서지.”
“인수가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5백억이네.”
양 회장의 말에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어차피 5백억을 빌려줄 생각이었는데, 세계 상선을 얻는다면 나야 좋은 일이었다.
‘문제는 해운업의 불황이 몇 년 더 지속될 거라는 건데…….’
아마 1, 2년은 적자를 각오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뭐 그래봤자, 혜성 전자나 혜성 자동차의 적자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물론 나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니, 지금 당장 5백억을 달라고 하진 않겠네.”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기자, 양 회장이 살짝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수 제안을 거절할까 봐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먼저 3백억을 빌려준다면, 올해 안에 세계 상선을 2백억에 매각하겠네.”
“3백억을 빌려달란 말씀입니까?”
“반드시 1년 안에 갚겠네. 이자까지 쳐서 꼭……!”
양 회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3백억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
“예.”
“고, 고맙네! 정말 고마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손을 잡았다.
‘많이 힘드셨나 보군.’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양 회장이 3백억을 빌리는 정도로 이렇게까지 고마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소에는 천억 단위로 돈을 빌리기도 했던 세계 그룹이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세계 그룹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겠지.’
하기야 나에게는 황 노인이 있지만, 양 회장은 따로 현금을 구할 곳이 없었다.
예전이었으면 아무렇지 않을 수백억짜리 대출도 지금은 무척이나 크게 느껴질 것이다.
‘내가 세계 그룹의 은인이 된 셈인가?’
은인이고, 뭐고 세계 그룹이 무너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세계 그룹이 무너지면 5공의 다음 목표는 우리 혜성 그룹이 될 것이니 말이다.
* * *
(얼결에 세계 상선까지 얻게 되었구나.)
“아직 모르는 일이지요. 세계 그룹이 무너진다면 양 회장도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될 테니 말입니다.”
(설마 3백억까지 받았는데, 무너지겠어? 적어도 1, 2년은 더 버텨줄 거다.)
“1, 2년 뒤에는 무조건 무너질 거라는 뜻입니까?”
(무조건이란 게 있겠냐. 그저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뿐이야. 전대환 그놈이 집요하게 노린다면 세계 그룹의 재정 상태로는 오래 못 버텨.)
뭐, 미래의 이야기는 의미 없었다.
그때가 되면 내 자금 사정은 훨씬 더 여유로워질 테고, 세계 그룹도 내가 또 지원해 주면 되는 일이니까.
(그나저나 세계 상선을 얻은 건 좋은데, 정부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문제구나.)
“가만히 있지는 않겠죠?”
(전대환 그놈의 성깔을 생각하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다.)
노사의 말을 들으니 괜히 긴장됐다.
각오했던 일이긴 해도 상대가 상대다 보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