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 꼴은 볼 수 없지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유지은이 제주도에 있는 혜성 관광호텔을 구경하고 싶다 해서 제주도로 결정이 난 것이다.
“어떻습니까?”
“풍경이 정말 좋아요. 마치 그림을 보는 거 같아요.”
결혼한 사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높임말을 썼다.
유지은을 향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사실 내가 편해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나중에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때는 말을 놓지 않을까?’
어쨌든, 우리는 신혼여행을 즐기기 위해 제주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말 처음 타 보세요?”
“예. 처음입니다.”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말도 타 봤는데, 나는 승마가 처음이라 유지은의 리드를 받았다.
승마 체험이 끝난 뒤에는 한라산도 가 보고, 바다도 구경하였다.
‘확실히,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는 섬이네.’
미래에 유명 관광지가 된다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 같았다.
다음에도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땅이나 좀 사둘까? 땅값만 생각한다면 굳이 지금 살 필요가 없기는 한데…… 문제는 시간 끌다가 좋은 땅을 놓칠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마침 혜성 관광호텔 소유의 호텔이 정면에 보였다.
“저기가 제주 오라 호텔과 그랜드 골프장입니다.”
내 말에 유지은이 주의 깊게 오라 호텔을 살펴봤다.
표정을 보니, 단순히 호기심 삼아 구경하는 게 아니라, 사업적인 분석을 하는 거 같았다.
‘뭔가 신혼여행 하러 온 게 아니고, 사업 이야기를 하러 온 기분이군.’
실제로 유지은은 오라 호텔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매출액은 얼마고, 객실은 몇 개고, 손님은 몇 명이나 찾아오는지 등등.
혜성 호텔에 입사하려고 많은 준비를 했는지, 그녀의 모습에서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질문 하나하나를 성실하게 답변해 주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일 이야기만 했죠?”
그러다 문뜩 그녀가 정말 미안한 얼굴로 사과하였다.
별생각 없이 이것저것 물었다가, 자신이 신혼여행 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거 같았다.
“아닙니다. 저도 일 이야기 하는 거 좋아합니다.”
“정말요?”
“아시잖습니까. 저도 지은 씨 못지않은 일 중독자라는 사실을.”
빈말이 아니었다.
내가 유지은을 특히나 마음에 들어 했던 게, 성격적으로 잘 맞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일까?
지금처럼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가 특히나 즐거운 기분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진심인걸요.”
내 말에 유지은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 * *
사업 이야기만 실컷 했지만, 어쨌든 즐거웠던 신혼여행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니, 업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며칠 쉬었을 뿐인데, 그새 이렇게 쌓였네.’
하긴, 대기업이 괜히 대기업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우리 그룹은 아직 부회장도 공석인 상황이었으니 나의 업무는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부회장을 임명해야 하나? 근데 아직 마땅히 사람이 없는데…… 이제 막 혜성 모직의 부대표가 된 종태 형을 또 승진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꼭 부회장이 아니더라도 내가 올 상반기까지 맡았던 정책본부장 같은 자리에라도 다시 사람을 채워야 할 거 같았다.
그룹은 계속해서 커지는 데 언제까지 나 혼자 모든 일을 도맡아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업무가 모두 끝난 뒤에는 유지은과 함께 방배동을 찾아, 이한철 명예회장께 인사를 드렸다.
이한철은 나와 유지은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을 보니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여행은 잘 갔다 왔느냐?”
유지은이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이한철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예, 잘 쉬다 왔습니다.”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한철이 불쑥 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2세 계획은?”
“……예?”
“손주는 언제 낳을 생각이냐고.”
아들이라…….
안 그래도 유지은과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지은 씨는 아이를 최대한 늦게 낳고 싶어 했었지.’
일을 워낙에 좋아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유지은은 애를 낳는 것을 기피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합방을 피하지는 않았는데, 나도 그녀를 배려해 주고 있는 터라 아마 1년 정도는 지나야 애를 낳지 않을까 싶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서른이 되기 전에는 손주를 봤으면 좋겠구나.”
“……노력해 보겠습니다.”
내 나이도 이제 곧 29이니, 서른이면 딱 1년 남은 셈이었다.
‘1년 동안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사업 계획은 곧잘 세우는 나지만, 2세 계획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거 같았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강요할 처지가 아니기도 하고 말이야.”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도 이제는 회장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의 가정에 신경 쓴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심이냐?”
“예, 진심입니다.”
“고맙구나.”
이한철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사업할 때만 해도 누구보다 냉정하고 차가웠던 그인데, 요즘 들어 감정적으로 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나도 노사처럼 이한철을 아버지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직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어색하단 말이지.’
결혼식 때도 명예회장님이라 불렀으니 말 다 했다.
뭐,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한성아. 한 가지 너에게 해 줘야 할 말이 있다.”
“어떤 겁니까?”
“정부에서 세계 그룹을 노리고 있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꽤 진심인 거 같아. 나에게도 경고하였는데, 혜성 그룹에서 세계 그룹을 도우면 용서치 않는다고 하였다.”
세계 그룹과 선을 그으라는 건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모양이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원 역사에서 세계 그룹이 해체된 것도 지금으로부터 불과 한 달 뒤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회장님께선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내가 그리 묻자, 이한철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에게 물을 필요 없다. 나는 그저 이야기만 전해 주러 온 것이지, 이번 건은 한성이 네가 오롯이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야.”
“그렇습니까.”
“다만 알아둬야 할 것은, 세계 그룹이 정부의 압력에 굴복한다면 앞으로 정부는 더더욱 기세등등해질 거란 사실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굴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너지게 되는데…….’
이한철도 아마 세계 그룹이 무너질 것이란 사실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기야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재계 7위의 대기업이 하루아침에 몰락할 거란 사실을.
‘이한철 명예회장의 말처럼, 세계 그룹이 몰락하면 정부는 더욱 기고만장해지겠지. 뇌물 요구도 더욱 심해질 것이고.’
상상만 해도 끔찍한 미래가 아닐 수 없었다.
아마 그때가 되면 주식도 함부로 못 할 거 같았다.
탐욕스러운 5공의 권력자들이 내가 앉아서 수백억을 벌고 있는데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역시 세계 그룹의 몰락을 막는 게 최선이야.’
세계 그룹과 혜성 그룹의 관계는 순망치한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니 전대환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으면서, 세계 그룹을 도와야 할 거 같았다.
* * *
세계 그룹 회장, 양희수는 불편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불렀는지. 나 참.’
청와대를 올 때마다 무언가 가슴에 박힌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청와대 만찬회에 불참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한성에게 단단히 경고를 들었다.
이번 만찬회에 절대 지각해서도, 불참해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누구보다 일찍 만찬회에 참석하였다.
“대통령 각하께서 입장하고 계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오랜 기다림 끝에 대통령이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잘 지냈나?”
“각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대통령은 어느 때처럼, 자신이 아끼는 재벌 회장들에게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김두현, 김승연, 김종우.
흔히 3김이라 불리는 재벌 회장들에게 말이다.
반대로 자신이 싫어하거나, 불편하게 여기는 재벌 회장들에겐 차가운 말투로 일관하였다.
물론 양희수를 대하는 태도는 그중에 가장 최악이었다.
애국심이 부족하다느니, 나라에 도움이 안 된다느니, 온갖 핀잔을 주었다.
“내년에도 바뀌지 않는다면, 세계 그룹의 운명은 1985년이 마지막일 거야.”
심지어 사형 선고에 가까운 협박까지 하였다.
말을 안 들으면 내년에 끝장을 내겠다는 식의 협박이었다.
‘폭거도 이런 폭거가 없군. 누가 독재자 아니랄까 봐. 쯧쯧!’
양희수는 혀를 찼다.
겉으론 고분고분한 척,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대통령의 경고를 무시하였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고, 어차피 전대환, 네놈의 권력도 오래가지는 못할 거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대통령의 권력이 앞으로 몇 년도 채 가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의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영원할 거 같던 5공의 권력도 1987년이 되면서 추락하게 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남의 운명은 잘 봤지만, 본인의 운명은 보지 못했다.
“회, 회장님. 정부에서 완매채 지원방침을 철회하겠다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완매채를?”
만찬회가 있고 불과 나흘 뒤에 정부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신종사채의 일종으로 기능하고 있는 완매채를 전격 금지한 것이었다.
현재 세계 그룹이 증권사 등에서 차입하던 완매채의 규모는 모두 450억.
세계 그룹은 갑자기 450억이라는 거액의 돈을 갚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빌어먹을! 이러면 내가 굴복할 거로 생각하는 건가?”
누가 독재자 아니랄까 봐, 지독하리만치 오만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독재자로 인해 세계 그룹의 위기가 시작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제2 금융권에서 여신을 회수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고작 450억 때문에 여신을 회수한다는 거야?”
“그보다는 정부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 금융권에 퍼져서 그런 거 같습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세계 그룹이 해체된다는 소문도…….”
“하! 어이가 없군.”
양희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재계 굴지의 대기업이 대통령에게 밉보였다는 이유 하나로 신용도가 대폭 하락하는 지금의 상황이 그저 황당하게만 느껴졌다.
“회장님, 정부에 조금만 협조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딴 식으로 우리를 핍박하는데, 전대환 그놈에게 협조하라고?”
“하지만 이대로 정부와 척을 진다면 좋을 게 없습니다.”
세계상사 대표이자, 그룹 부회장을 맡고 있는 한제인의 말에 양희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부산의 민심이 누구를 지지하는지 모르는 거야? 우리가 도와준다고 대세가 바뀔 리는 없어. 오히려 도와주고도 욕먹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러자 한제인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러면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시겠습니까? 당장 이틀 뒤에 상환해야 할 돈이 적지 않습니다.”
“조흥 은행이나 다른 은행에서도 대출이 안 나온다고 했지?”
“예. 주거래 은행조차 저희의 신용도를 의심하는 상황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대출금은 자력으로 갚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기업은 빚으로 빚을 갚는 이른바 돌려막기로 대출을 상환하고 있었다.
세계 그룹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은행 대출이 막히자 순식간에 자금난에 휘말렸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부도를 피할 수 없겠군.”
“……예, 그렇습니다.”
“좋은 방도가 있겠나?”
“정부와 교섭하는 것밖에는…….”
“쯧.”
다시금 혀를 찬 양희수는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혜성 그룹에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겠어.”
“예? 혜성에 말씀입니까? 하지만 혜성과의 관계가 아무리 좋아도 그들이 저희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이야기였다.
세계 그룹이 필요한 자금은 백억 단위였다.
혜성 그룹도 한창 사업을 넓혀 가느라 돈이 급할 텐데, 세계 그룹에 수백억이나 빌려줄 자금은 없을 것이다.
설령 그만한 돈이 있다 하더라도 선뜻 건네줄 만큼 두 그룹이 죽고 못 사는 사이인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만약 내가 그놈의 장인이었으면 빌려달라고 말이라도 해봤겠지…….’
어쨌거나, 장인도 아니고 혜성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푼 것도 아니었기에,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는 염치없는 행동은 할 생각이 없었다.
“혜성 그룹에 세계 상선을 매각하는 것이 내가 생각한 최후의 수단이다.”
그의 말에 한제인은 입을 떡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