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나는 천억도 동원할 수 있다
“어떻습니까? 백억이면 인수가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요! 당연히 충분하죠!”
노영배는 크게 기뻐하는 얼굴로 그같이 말했다.
사실, 인수가가 높다고 그가 기뻐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회사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정부가 나서서 인수합병에 관여할 때는 비공식적으로 수수료라는 게 존재하였다.
수주 공사를 받을 때처럼 10%까지 받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1% 정도의 수수료는 받았다.
즉, 내가 거하 자동차를 백억에 인수할 경우, 관례상 노영배에게 1억 이상을 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노영배의 입장에서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권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하를 백억에 인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장관님. 인수가가 높다는 이유로 혜성 그룹에게 거하를 넘긴다면 뒤에서 말들이 많을 겁니다.”
“알아요. 당연히 저도 알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혜성 자동차는 자금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사업 연계성으로 보나 전문성으로 보나 뒤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어요!”
“…….”
권오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역시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결론이 나왔다는 사실을.
“이 회장. 혜성 자동차의 거하 자동차 인수에 대해서는 상공부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직 확정 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정우 그룹에서 돈을 더 쓰지 않는 한, 혜성의 승리나 마찬가지였다.
‘뭐 정우에서 백억 이상을 부른다면 나도 포기해야겠지.’
사실 백억도 엄청나게 많이 쓰는 것이었다.
매출로 보나, 규모로 보나 동화 자동차보다 못한 곳이 거하 자동차였으니까.
다만 나는 거하 자동차의 코렌드 하나만으로도 백억을 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코렌드의 브랜드 가치는 그만큼 대단하고 소중한 자산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아주 돈이 남아나는 모양이야? 거하를 인수하는데 백억이나 쓴다니.”
노영배가 자리를 비우고 단둘이 남게 되자, 권오중이 짜증 서린 목소리로 그같이 말했다.
“백억을 쓰는 게 대수겠습니까. 거하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 이상도 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싸움을 피할 거라고 생각하나?”
“자금력으로 승부를 보시고자 하신다면 저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어디 한번 누가 더 돈이 많을지 겨뤄봅시다.”
“뭣이? 지금 그 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물론 우리 혜성의 자금력으로는 정우 그룹을 이길 수 없으리란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당연하다.
상대는 무려 빅 4의 대기업이었다.
내가 아무리 부자여도 일개 개인의 부가 대기업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황 노인에게 돈을 빌린다 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 나대다니. 웃기는 놈이로군.”
“하지만 그러시지 않을 거란 거, 알고 있습니다. 한창 소형 승용차의 생산 능력을 증설시키느라 바쁘신데 거하 자동차를 백억 이상 주고 살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거하 자동차가 승용차를 생산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
정곡을 찔렸는지 권오중은 미간을 찌푸리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권오중의 모습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정하지. 이번엔 내가 진 거 같군.”
“거하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자네 말대로 백억 이상을 동원할 생각이 없으니, 포기해야지. 별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현명한 결정입니다.”
권오중은 코웃음을 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엔 백억이고 2백억이고 동원해 줄 테니, 각오하고 덤비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코웃음 쳤다.
‘백억과 2백억? 당신이 그 정도의 돈을 동원할 때쯤이면 나는 천억 단위의 돈도 동원할 수 있어.’
결과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거하, 혜성 자동차의 품으로!>
<혜성 자동차, 특장차 부문의 최강자로 급부상!>
마침내 거하 자동차를 인수하였다.
이로써 한국 최초의 SUV, 코렌드는 우리 회사의 것이 되었다.
“거하의 공장은 어떻습니까?”
“생산 시설이 충분하여 기존에 논의했던 생산 라인 증설은 폐기해도 될 거 같습니다.”
“직원들의 분위기는요?”
“갑작스러운 인수라서 조금 당황하는 것을 제외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운철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세한 중소기업의 직원에서 대기업 직원이 되었으니 거하의 직원들이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혜성 그룹에서 구조조정을 한 적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예정대로 거하 인수에 성공했으니, 뉴 코렌드를 개발하는데 전력을 다해주세요.”
“허허, 연구 자금을 추가로 투입해야겠습니다.”
“자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벤츠와의 협의도 꼭 성공하셔서 승용차 개발도 시작해야 합니다.”
“아직 이야기만 나누는 단계이긴 해도 벤츠 역시 우리와 제휴하는 것에 긍정적으로 여기는 거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올해 안에만 어떻게든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주십시오.”
“노력해보겠습니다.”
하운철이 물러나자 노사가 말을 걸었다.
(자동차 업계는 이제 확실하게 4분할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어.)
“4강 체제는 동화 자동차를 인수했을 때부터 이미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말이 4강이지, 혜성이 많이 쳐졌잖아. 안 그래?)
“물론 그렇긴 합니다.”
(아무튼, 코렌드까지 혜성 그룹의 손에 들어왔으니 자동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뭐, 1987년을 대비해 승용차 생산도 준비를 끝내야겠지만 말이야.)
“정우 자동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견제하긴 할 거다. 아마 정우뿐만이 아니라 미래에서도 너를 견제하기 시작할 거야.)
“앞으로 피곤한 일이 많아지겠군요.”
(그만큼 혜성이 커졌다는 거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그리고 내가 직접 살펴보니, 어차피 정우 쪽에서 당장 뭔가를 할 생각은 없어 보이던데.)
“그렇습니까?”
나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권오중 회장 앞에서야 당당히 기 싸움을 했지만, 솔직히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었다.
아직 혜성 그룹은 정우 그룹에 맞서기에는 체급에서 많이 밀렸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네 결혼식도 이제 일주일밖에 안 남았구나.)
“……예. 얼마 안 남았습니다.”
(떨리냐?)
“솔직히 긴장이 안 될 수는 없죠. 처음 하는 결혼인데.”
(그래도 다행이구나. 네 결혼 상대가 유지은이라서.)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네가 나처럼 결혼에 실패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었거든. 그런데 신붓감을 잘 골랐으니, 결혼에 실패할 일은 없을 거 같다.)
그의 말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별거 아닌 말인데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여자를 극도로 불신하는 노사에게도 인정을 받다니. 역시 유지은 씨와 결혼하기로 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어.’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노사는 마치 초를 치듯, 말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유지은을 100% 신뢰하라는 뜻은 아니다. 유지은은 사업욕이 강한 여자야. 언제 너의 회사를 노릴 줄 몰라. 그러니 계속 감시하고 견제해. 허튼수작을 못 부리게끔 말이야.)
“…….”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내를 감시하고 견제하라니.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참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거 같았다.
‘저런 성격이라서 여자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었을까?’
* * *
결혼식은 혜성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황인범 회장님,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가장 먼저 인사한 사람은 황 노인이었다.
“자네의 결혼식인데 당연히 참석해야지. 끌끌. 축의금은 조금만 넣었네.”
“그저 와주신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빈말하기는. 됐고, 나 같은 늙은이 오래 상대할 필요 없네. 자네를 찾은 사람이 많은 거 같은데, 어서 가 보게.”
“이따가 다시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황 노인에게 인사를 건넨 뒤에 세계 그룹의 양 회장을 응대하였다.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더 아쉽군! 이 회장을 어떻게 해서든, 내 사위로 삼았어야 했는데.”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혼여행 갔다 오면 찾아오게. 할 이야기들이 많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 뒤로도 수많은 하객을 상대하였다.
재벌 총수들부터, 정계의 실력자까지.
안기부에서 1차장을 역임하고 이제는 정계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한진영도 찾아왔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한진영 차장님. 아니, 앞으로는 의원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의원이라니. 허허! 아직은 아닙니다.”
“몇 달 뒤에, 되실 거지 않습니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무튼, 그렇게 말해주니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결혼식에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그리 말하자 한진영이 흐뭇하게 웃었다.
“선거 끝나면 한번 봅시다.”
“예, 불러만 주십시오.”
총선이 끝날 때면, 아마 서로가 즐거운 기분으로 보지 않을까 싶었다.
나비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한진영의 승리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저 사람, 이병건 회장 아니야.”
“맞아. 옆에는 부회장인 이호승도 있군.”
“정우의 권오중 회장도 참석했는데?”
“이야. 최근에 본 결혼식 중에 가장 화려한 결혼식인걸?”
하객들의 말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한 사람은 일성 그룹의 부회장인 이호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정우 그룹 회장인 권오중이었다.
‘이호승이야 일성 그룹의 일원이니 당연히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설마 권오중까지 참석할 줄은 몰랐군.’
그만큼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물론 권오중 말고도 미래 그룹이나 은성 그룹에서도 직계나 후계자가 참석하였다.
그야말로 빅 4의 재벌 전체가 나의 결혼식에 참석한 셈이었다.
* * *
전대환은 짜증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양가 놈은 여전히 뻣뻣하게 나온다지?”
“예, 각하. 양 회장은 이번에도 성금을 어음으로 주었습니다.”
“아주 죽으려고 작정을 했나 보군.”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12월이니, 어느덧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
‘세계 그룹이 협력하지 않으면 부산에서의 승리는 요원하다.’
독재자인 만큼, 더더욱 민심에 신경 쓰고 있는 전대환이었다.
그런 전대환이 보기에 부산의 민심은 이미 야당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부산의 12석 중의 3석을 지켜도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실제로 안기부에서도 부산만 위험지역이라 예측했고,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의 선거는 완승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번 만찬회 때, 단단히 경고해야겠어.”
“양 회장이 경고를 무시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이번에도 내 경고를 무시한다면, 총선이 어떻게 되든 세계 그룹을 해체하고 말 것이다.”
“……!”
그의 선언에 좌중은 경악하였다.
대통령의 입에서 재계 7위의 대기업을 해체하겠다는 말이 나왔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이한성이었던가? 혜성의 젊은 놈이 양가 놈이랑 아주 사이가 좋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양 회장이 한때 이한성 회장을 사윗감으로 점쳤다고 합니다. 이번에 이한성 회장의 결혼식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 친분을 과시하였었습니다.”
“재계 7위, 8위가 죽이 잘 맞는군.”
“사업적으로 부딪칠 일이 없어서 더 그런 거 같습니다.”
“혜성에게도 경고하는 게 좋겠어.”
“이한철 명예회장이 개과천선을 하였는데, 혜성까지 건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최근 들어 혜성 그룹에 대한 인식이 크게 좋아졌다.
뇌물도 곧잘 주고, 다른 기업들처럼 귀찮은 요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예의 발라졌다고 풀어줄 수는 없지. 성금도 더 달라고 하고, 세계 그룹과도 선을 확실하게 그으라고 전해. 세계 그룹을 돕는 짓 따위는 절대 하지 말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