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예의는 그쪽에서 지켜야 할 거 같은데?
나는 혜성 자동차의 사장인 하운철에게 물었다.
“거하 자동차의 소식은 들으셨죠?”
“물론입니다. 허허, 코렌드의 신화를 열었던 거하 자동차가 저리 허망하게 몰락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내부에서 분열하면 대기업이어도 속수무책인 법입니다. 하물며 거하 자동차 같은 영세한 기업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정말 그런 거 같습니다. 다행히 혜성 그룹은 회장님 아래로 일치단결해서 걱정이 없는 거 같습니다.”
하운철의 아부 아닌 아부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거하 자동차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거하 자동차를 인수할 생각입니다.”
“허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안 될 게 있겠습니까? 이미 김창녕 회장은 정부에 매각 의사를 밝힌 상태입니다. 아마 지금쯤 상공부가 거하 자동차를 인수할 회사를 모색하고 있을 겁니다.”
“자금은 충분하신 겁니까?”
“거하 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해선 백억까지도 쓸 생각이 있습니다.”
“백억씩이나 말씀입니까?”
내 말에 하운철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올해 회사를 몇 개나 인수했는데 추가로 백억을 쓴다고 하니 그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지금 혜성 자동차에 현금이 꽤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내가 투자한 자금 외에도 고림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현금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혜성 자동차의 현금 동원력만큼은 아마 자동차 메이커, 4대 업체 중에 최고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은 신차 연구를 위해 필요한 투자 자금인데…….”
“백억을 빼도 남는 자금이 상당하지 않습니까. 일단 그 돈으로 연구를 진행하시고 돈이 부족해지면 제가 언제든 채워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허.”
하운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로선 내 배포가 놀랍기만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배포도 무지막지한 현금 동원력이 있어서 나올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자금만으로 인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다.
정부가 주관하는 것이니, 정부를 만족시켜야만 했다.
뭐, 내 생각에는 자금이 가장 중요한 거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일단 기화나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기화 자동차는 여력이 없고, 미래 자동차는 정부에서 막을 겁니다. 안 그래도 점유율이 높은데, 미래 자동차가 더 크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승용차 부문을 정우 자동차와 이원화하여 독점 생산하고 있는 미래 자동차였다.
8톤 이상의 트럭과 버스 부문에서도 꾸준히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었고, 특장차 부문에서도 큰 성과를 내는 미래 자동차였기에 정부에서도 제재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우 자동차와의 경쟁에서만 이긴다면 거하 자동차를 인수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겠습니다.”
“예. 정우 자동차와의 경쟁에서는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자본력도 그렇고, 점유율도 우리가 훨씬 낮으니, 정부에서도 웬만해서는 우리를 배려해줄 겁니다.”
덤으로 인맥 역시도 우리가 유리하였다.
이한철 회장의 인맥과 내 인맥을 합치면 적어도 상공부에서는 정우 자동차를 압도하였던 것이다.
“정말 준비가 철저하십니다.”
그야 당연하다.
오랫동안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회장님이 이렇게 준비하셨으니, 반드시 인수에 성공해야겠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정우의 권오중 회장은 1년에 절반 이상을 해외 출장 일정으로 할애하였다.
“내년부터는 해외 출장을 줄이고 내부를 챙겨야겠어.”
11월 12일.
권오중 회장이 신문지를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하자, 임원들이 크게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 경영을 외치던 그가, 내부를 챙기겠다는 말은 임원들의 성과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혜성 자동차를 어떻게 생각하나?”
눈치를 보던 정우 자동차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자금력은 풍부하나, 그뿐입니다. 인지도도 형편없고 매출은 더욱더 보잘것없는 수준입니다. 우리 정우 자동차를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그럼 혜성 그룹의 회장은?”
이번에는 부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일쇼크도, 경제위기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애송이입니다. 능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경험이 미숙하니 위기가 벌어지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쾅!
부회장의 말을 들은 권오중 회장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렇게 적을 낮잡아보니 혜성 그룹의 공세에 대응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 아닌가!”
“……!”
“이번에 거하 자동차도 그래. 혜성 자동차에서 여론전을 펼치는 동안 우리 그룹은 지금까지 뭐를 한 거야?”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임원들이 사죄를 청했지만, 권오중 회장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기색이었다.
‘무능한 것들 같으니.’
혜성 그룹의 추격은 무서울 정도였다.
10위에서 순식간에 8위까지 올라오더니, 이제는 세계 그룹과 거의 비등한 규모까지 성장하였다.
지금 기세라면 5위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빅 4를 제외한다면, 규모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으니 말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혜성 그룹의 부채 비율이 400%도 안 된다는 거야.’
빚을 늘리지 않으면서 사업을 미친 듯이 확장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우 그룹조차 안심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건설부터 전자와 자동차까지.
혜성 그룹과는 사업적으로 부딪칠 일이 많기에 더더욱 안심할 수가 없었다.
‘거하 자동차는 반드시 우리가 가져와야 한다!’
거하 자동차까지 빼앗긴다면 혜성 자동차가 정우 자동차를 추월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전자면 몰라도 자동차 경쟁에서 혜성에게 뒤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
하여 권오중 회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하 자동차를 인수하기로 하였다.
* * *
상공부 장관 노영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거하 때문에 골치가 아프군.”
매출액이라고 해봐야 5백억도 안 되는 회사였다.
원래라면 그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회사였을 터.
하지만 두 재벌 그룹이 거하 자동차를 탐내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혜성 그룹과 정우 그룹.
이렇게 두 개의 대기업을 조율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두 기업 중에 어떤 기업이 거하를 인수해야 맞는 거 같나?”
“당연히 정우 그룹이 거하를 인수하는 게 맞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본금도 훨씬 많고, 전문성도 압도적입니다.”
“맞습니다. 혜성 그룹은 올해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한 회사입니다. 고림 자동차에 동화 자동차까지 인수한 상태인데, 여기서 거하 자동차까지 인수하면 필히 문제가 생길 겁니다.”
“저는 혜성이 낫다고 봅니다. 요즘 혜성 그룹의 기세가 남다르지 않습니까?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있고, 이한성 회장이 새로 인수한 회사를 정상화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 혜성이 정우보다 낫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 업계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혜성 자동차가 인수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다.
사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두 기업 모두 최선책이 아니었으니,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기업 중에서는 거하를 인수할 곳이 없겠나? 미래 자동차나 기화 자동차를 제외하고 말일세.”
“거하를 인수할 정도의 자금력을 가진 자동차 회사는 네 곳 말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쯧!”
노영배는 혀를 찼다.
그 역시 알고 있던 일이지만, 그래도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각하께서는 점유율이 높은 회사들은 가능하면 제외하라고 하셨는데…….’
점유율 낮은 기업은 이미 대기업에 흡수된 지 오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소수의 자동차 회사는 영세하여 은행 빚을 갚는 것으로도 힘겨워하는 상황.
그렇기에 대안은 정우나 혜성밖에 없었다.
“일성 그룹에서 인수 의사를 밝혔는데, 일성에게 기회를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 차관보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하였다.
“일성이?”
“예. 일성 부회장이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거 같습니다.”
노영배는 잠시 고민하였다.
일성이라면 새로운 대안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각하께서 일성이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는 걸 용납할 거로 생각하나?”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일성은 제외하게.”
사실 일성만 제외된 게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회사들도 모두 제외되었다.
거하 자동차를 인수할 수 있는 회사는 오직 두 곳뿐.
“아무래도 두 그룹의 회장을 직접 불러와야겠어.”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두 그룹 모두에게 돈을 받은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두 그룹의 회장을 불러서 둘 사이를 중재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이한성 회장이 젊으니까, 그의 양보를 받아내는 게 좋겠지?’
* * *
나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서 오세요. 이한성 회장.”
“오래도 기다리게 하는군.”
두 사람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노영배는 반갑게 나를 맞이하였고 권오중은 대놓고 퉁명스럽게 대하였다.
“앉으시죠. 이한성 회장.”
“예, 감사합니다.”
“권오중 회장과는 처음 보시는 거죠?”
“이 친구가 회장으로 취임할 때, 외국에 나가 있어서 오늘 처음 봅니다.”
“아, 그래요? 잘됐네요. 두 사람 모두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의 수장인데 이참에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어요.”
노영배가 그리 말하니, 권오중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는 식으로 답변하였다.
물론 나 역시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처음부터 적대적으로 나오니, 권오중을 좋게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혼한다는 이야긴 들었어요. 축하해요. 이 회장.”
“감사합니다.”
“이제야 장가를 간다니. 어리긴, 어리군.”
“…….”
“그렇게 어린 나이에 회장이 되어서 정말 기분이 좋겠어. 그것도 혜성 그룹 같은 대기업에서 말이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놓고 애송이 취급하는군.’
그나마 장가를 곧 가니까 이 정도였다.
만약 만나는 여자도 없었다면?
같은 성인으로 취급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시대에 결혼 여부는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아직 넘어야 할 벽이 많아서 그런지, 들뜨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 넘어야 할 벽이 설마 정우 그룹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정우도 넘어야 할 벽 중에 하나겠지만, 사실 제가 더 노리는 것은 일성이나 미래 쪽입니다.”
내가 정우 그룹은 안중에도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하자 권오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남다른 자존심을 가진 그였으니, 내 말에 분노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빅 4를 노리기 전에 세계 그룹부터 확실하게 넘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려고 거하 자동차를 인수하려는 겁니다.”
나는 노영배를 보며 그같이 말했다.
그러자 권오중이 코웃음을 쳤다.
“거하 자동차는 포기해.”
“글쎄요. 권오중 회장님이 무슨 권리로 저에게 포기하란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야 우리 정우에서 인수할 거니 하는 말이지.”
권오중이 그리 말하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어려서 그런지 혈기가 넘치는 건 이해하겠는데, 혈기와 만용은 구분하는 게 좋을 거야. 올 한해에만 고림 자동차에, 동화 자동차까지 인수했는데, 거하까지 인수할 여유가 있겠어? 자네를 위해 충고하는 건데, 지금은 내부를 추스를 때야.”
“정우야말로 여유가 있으십니까? 얼마 전에 GM과 증자협약서를 조인하셨는데, 소형 승용차에 집중하셔야 할 거 같은데 말입니다.”
“자네 조금 건방지군?”
“회장님이야말로 같은 회장끼리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예의 좀 지키시는 게 어떠실지?”
내 말에 권오중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물론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어렵게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두 분이 다투면 제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겠어요?”
노영배가 중재하니, 권오중이 휙 고개를 돌렸다.
나는 노영배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였다.
“죄송합니다.”
“이 회장은 권 회장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으신 거죠?”
“절대 없습니다.”
“허, 난감하게 됐군요.”
“난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명확한 해결 방안이 있는데.”
내 말에 노영배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해결 방안이라니요? 이 회장,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어요?”
“인수가로 결정하는 겁니다. 참고로 저는 거하 자동차를 인수하는데 백억까지 쓸 의향이 있습니다.”
“백억이요?”
“……!”
거하 자동차를 인수하는 데 백억을 쓰겠다는 내 말에 두 사람은 눈을 부릅뜨며 놀라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