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당연히 내 거지
(그나저나 슬슬 준비해야겠구나.)
“어떤 것을 말입니까?”
(거하 자동차 말이다. 이제 두 달밖에 안 남지 않았느냐.)
노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거하 자동차의 사주가 두 달 뒤에 구속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 달 동안 어떤 준비를 하면 좋을까요?”
평범한 인수전이라면 인수 자금을 최대한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최근 들어 여기저기 돈 쓸 때가 많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내 자금 사정은 여유로웠다.
황 노인에게 추가로 빌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정 급하면 은행에서 빌리는 것도 언제든지 가능하였다.
하지만 거하 자동차는 돈만 있다고 인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단 시급한 것은 상공부를 네 편으로 만드는 일이다. 만약 상공부가 네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할 거야.)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군요.”
지금의 정부라면, 거하 자동차 인수를 방해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단순히 혜성 자동차가 재벌 그룹이란 이유로 인수를 막을 가능성도 있었다.
자동차 업계의 균형을 위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나마 그동안 쌓아온 인맥이 있어서 다행이군.’
물론 정우 그룹이나 미래 그룹도 인맥에서는 크게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나선다면 당연히 내가 유리할 게 뻔했다.
‘이한철 회장의 인맥까지 더한다면 상공부를 내 편으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겠어.’
내가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할 때, 노사가 말했다.
(그리고 경쟁자가 될 기업을 일찌감치 배제할 필요도 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네가 동화일보와 친하니, 기화 자동차의 사정을 보도하라고 전해 봐.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로 여전히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야.)
거하 자동차를 노릴 수 있는 회사는 아마 세 곳밖에 없을 것이다.
정우와 미래, 그리고 기화 이렇게 세 곳 말이다.
그런데 이 중에 기화는 노사의 말처럼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여론전을 잘 활용한다면, 기화 자동차를 확실하게 배제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물론 혜성 자동차도 두 곳을 연달아 인수했으니 그걸 문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하루빨리 혜성 자동차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어. 자금 사정이 풍족하다는 사실도 과시할 필요가 있고 말이야.)
뭐, 그거야 굳이 거하 자동차가 아니더라도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이제 혜성 자동차도 전면에 나설 때가 되었으니까.
“두 달 안에 내부 정리를 끝마친다면, 거하 자동차 인수는 거의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웬만해서는 그렇게 될 거다.)
노사의 말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거하 자동차까지 인수한다면, 미래 자동차는 힘들어도 정우 자동차나 기화 자동차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겠어.’
고림 자동차의 오토바이, 동화 자동차의 버스, 거하 자동차의 SUV.
이렇게 세 개의 회사가 합친다면 정우 자동차도 부럽지 않았다.
승용차 부문만 점유율이 제로일 뿐, 다른 부문에서는 우리 혜성 자동차가 독보적인 점유율을 가지게 될 테니 말이다.
* * *
“개인이 30억을 기부하다니. 이 정도면, 역대 최대 금액 아닌가?”
“와, 혜성 그룹 회장은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돈이 아무리 많다 해도, 30억을 기부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거 아니겠어?”
“그건 그렇지. 언론에서는 젊다고 계속 뭐라 하는데, 다른 그룹의 나이 많은 재벌들은 지금 뭐 하나 모르겠어.”
30억의 효과인지, 혜성 그룹의 여론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물론 나에 대한 평가도 많이 좋아졌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일보는 여전히 나에 대해 비판적이네.’
이호승이 부회장으로 있는 한, 고려일보의 논조가 바뀔 일은 없을 거 같았다.
고려일보에서는 이호승을 밀어줄 수밖에 없었으니까.
참고로 이호승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노사가 말하기를, 한국에 오자마자 이병건 회장에게 꾸중을 들었다나?
‘그러게 왜 괜히 나에게 시비를 걸어 가지고.’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었다.
가만있었으면 나도 전면에 나서서 일성 그룹을 적대할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이호승과는 단번에 승부를 낼 수 없었기에 감시와 견제만 하고서 나는 내 사업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가장 집중한 사업은 혜성 자동차였다.
11월에 거하 자동차를 인수하려면 혜성 자동차가 재무도 건전하고 사업성도 탄탄하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고림 자동차에 차입금이 많다는 게 문제군.’
동화 자동차야 재벌 그룹이 아니었기에 대출받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차입금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고림 자동차는 모기업을 믿고 차입 경영을 하였다.
부채만 천억이 넘을 정도였다.
‘그래도 현금이 많다는 게 다행이야.’
고림 자동차는 현금만 2백억을 보유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민성준 회장이 이 2백억의 현금을, 부품 회사를 인수하고 공장의 생산 라인을 증설시키는 데 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동화 자동차를 인수했고 거하 자동차까지 인수할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이 돈을 알차게 써서 혜성 자동차의 사업성이 얼마나 탄탄한지를 보여줄 계획이었다.
일단 신차 연구소를 차렸으니 여기에 거액의 연구 자금을 투입하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겠지.
똑똑!
“명예회장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오셨습니까?”
“내가 방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말씀 마세요. 언제든 찾아오셔도 됩니다.”
“그러마.”
“커피 갖다 드릴까요?”
“아니다. 금방 갈 거니, 여기 앉아라.”
“예.”
“회장실은 크게 바꾸질 않았군? 이것저것 꾸미면 좋았을 텐데.”
“원래도 잘 꾸며져 있어서 특별히 더 꾸밀 게 없었습니다.”
“그래?”
이한철 명예회장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불쑥 이 같은 말을 하였다.
“사돈과 결혼식 날짜를 정했다.”
순간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다.
갑자기 결혼식 일정이 잡혔다고 말하니,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서 물었다.
“언제입니까?”
“12월 16일이다.”
“석 달 남았군요.”
석 달이라…….
뭔가 복잡 미묘한 기분이었다.
몇 달 뒤에 결혼한다는 게 현실성이 없게 느껴졌다.
“제가 따로 준비할 것은 없겠습니까?”
“회사 일하느라 바쁜 걸 빤히 아는데, 너에게 뭘 맡기겠냐? 예비 며느리나 잘 챙겨줘라. 데이트도 자주 해주고.”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세계 그룹 회장님과도 자주 전화하고 그러는 게 어떻겠냐?”
“양 회장님 말씀입니까?”
“너에게 서운하신 거 같다. 네가 일성 그룹 쪽과 결혼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거리감이 생긴 거 같다고 말이야.”
거리감이라니.
나는 딱히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하긴, 요즘 전화를 별로 안 하긴 했지.’
이한철 명예회장이 당부하기도 했으니, 앞으로는 양 회장께 전화를 자주 드려야 할 거 같았다.
* * *
양 회장께 전화를 주니, 그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혜성 건설 사옥으로 달려왔다.
“이 회장, 오랜만일세. 회장 취임식 이후로 처음 보는 거 같아.”
“제가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앞으로라도 종종 찾아오게. 괜히 전화로 때우지 말고 말이야.”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유지은 씨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하시군.’
누가 보면 내 장인어른이 양 회장인 줄 알 거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네, 일성 부회장과의 일을 왜 내게 말 안 했었나?”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보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네. 자네와 내 관계가 보통 관계가 아니잖아. 제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말해줬어야지.”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꼭 내게 말하게. 말 안 하면 쓸데없이 고려일보의 수작에 놀아날 뿐이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고려일보에서 계속 두 그룹을 이간질하고 있으니, 이럴 때일수록 화합이 중요하였다.
구태여 사업 영역이 다른 세계 그룹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요즘 정부에서는 어떻게 나오고 있습니까?”
“달라질 게 있겠나. 아! 이건 달라졌다. 총선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어떻게든 우리를 선거에서 이용해 먹으려고 하고 있네.”
세계 그룹의 재무 건전성은 원 역사보다 훨씬 좋아졌다.
신사업도 대폭 줄였고, 구조조정까지 하여 순이익을 증가시켰다.
덕분에 부채율도 빠르게 낮아지고 있었는데, 800%에서 700%대까지 내려간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지.’
재무 건전성이 좋아졌다고 세계 그룹의 위기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와의 관계에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연말에 또 만찬회를 열 텐데, 그때가 걱정이야. 대통령이 또 어떤 말을 지껄일지.”
“저희 명예회장님 일도 있고 하니, 심하게 압박하지는 못할 겁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양 회장은 가볍게 웃으며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로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지만, 예의상 해줘야겠지. 이 회장, 결혼 축하하네.”
“아, 감사합니다.”
내가 허리를 꾸벅 숙이자 양 회장이 아쉬운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지참금이었으면 많이 챙겨줬을 텐데, 축의금은 많이 챙겨줄지 모르겠어.”
“결혼식에 참석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글쎄, 질투가 나서 불참할지도 모르니 내가 반드시 올 거란 기대는 하지 말게.”
저렇게 말했지만, 분명 참석할 것이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을 할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세계 그룹은 그렇다 치고, 과연 혜성 그룹은 안심할 수 있는 단계일까?’
1985년 초에 해체될 세계 그룹보단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혜성 그룹도 본래라면 1986년에 해체된다.
고작 2년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
‘정부와의 관계는 나름대로 괜찮은 거 같은데…….’
이한철 명예회장이 그룹을 이끌었을 때와 달리, 지금은 정부와의 관계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직 정권에 밉보일 만한 일을 하지 않았고, 이한철 명예회장이 뒤에서 대관 업무를 총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세계 그룹이 어떻게 되느냐를 보고 판단해야겠어.’
* * *
이한철 명예회장의 당부대로 유지은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렸다.
사흘에 한 번씩은 식사를 같이할 정도였다.
“인수인계는 잘하고 계십니까?”
“네. 당장에라도 혜성 호텔에 입사해도 될 정도예요.”
유지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혜성 호텔에 입사하면 한참 동안 정신이 없으실 겁니다. 올해 오픈하는 호텔만 두 곳에, 기존의 혜성 관광호텔과의 합병 작업도 한창 진행 중이거든요.”
혜성 관광호텔은 말이 관광호텔이지 70년대 여관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혜성 호텔에서 흡수 합병한 뒤에, 대대적으로 리뉴얼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재미있을 거 같네요.”
“그렇습니까?”
“네. 안 그래도 호텔업에 호기심이 갔었는데, 새롭게 만들어지는 회사라서 더 좋은 거 같아요.”
“지은 씨가 좋아하시니 다행이군요.”
역시 유지은도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다.
뭐 그게 싫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유지은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면서 한편으로는 혜성 자동차를 정상화하는 데 집중하였다.
그러다 어느덧 11월이 되었고 내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소식이 재계를 강타하였다.
<‘거하’ 김창영 씨 구속.>
<거하 자동차, 기업주 구속되자 순식간에 7억 부도!>
잘 나가던 거하 자동차가 김창영 회장의 구속 이후, 돌아오는 어음을 책임지고 막을 사람이 없어서 흑자 부도가 났다.
‘다행히 나비효과는 없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창영이 구속되지 않으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역사는 변하지 않았다.
‘역사가 바뀌지 않았으면 거하를 인수할 회사도 결국 우리가 될 거야.’
원래였으면 동화 자동차가 거하를 인수했을 터.
하지만 동화 자동차는 이미 혜성 자동차에 흡수된 상태였다.
그러니 거하도 우리가 인수하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