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86화 (86/300)

86화 가전 시장에 진출할 때야

“반갑습니다. 혜성 그룹의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혜성을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창모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고창모가 반색하는 얼굴로 답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퇴사하시면 바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 세탁기란 게 단기간에 개발하기가 쉽지 않은데, 개발 기간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세탁기 개발이 쉽지 않으리란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쉬웠다면 나 역시 진즉에 개발을 시도했을 터.

‘아마 모터를 개발하는데도 한세월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시도할 가치는 있었다.

정우 전자라는 사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년까지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아, 그럼 다행입니다. 5년이라면 일성 전자나 은성 전자만큼은 아니어도 중공 같은 곳에 수출할 세탁기를 개발하고 생산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일성이나 은성과는 다른 방향으로 세탁기를 개발하고 싶습니다.”

5년이란 개발 시간이 주어져도 일성 전자나 은성 전자를 따라잡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우리가 세탁기를 개발하는 동안 그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두 곳을 따라잡기 위해선 다른 방향으로 세탁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혜성 전자의 가전 부문은 앞으로 탱크주의 전략으로 갈 겁니다.”

“탱크주의요?”

고창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시겠지만, 자체 기술력이 부족한 혜성 전자는 타사와 기능 경쟁에서 굉장히 불리한 입장입니다. 그렇기에 조금 더 저렴하면서 절대 고장 나지 않는 제품을 개발하여 타사와는 차별화된 전략을 사용하는 게 최선의 수입니다.”

가전제품은 고장이 잦았다.

TV 같은 경우는 브라운관 위를 때려야 화면이 잡힐 정도였다.

세탁기나 냉장고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잔고장은 기능이 복잡해지는 최신 제품일수록 심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성과 은성은 기술에만 집착하였다.

소비자가 원하는 게 오직 기술력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내부 구조를 최대한 단순하게 해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핵심 기능만 이용할 수 있으면 됩니다. 굳이 기능이 많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연구소장으로 취임하면 바로 탱크주의식 세탁기를 개발해내겠습니다.”

“소비자가 원하는 성능만 정확하게 개발해 주십시오.”

“예!”

고창모의 답변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5년을 말했지만, 핵심 기능만 구현하는 정도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길어야 3년.’

내가 원하는 제품이 3년 안에 개발된다면 가전제품에서 일성 전자나 은성 전자를 따라잡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저렴하면서 핵심 기능만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제품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외국으로 수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에서는 힘들지 몰라도 중공이나 인도, 동남아 같은 지역에서는 우리 제품의 인기가 더 많을 것이다.

‘내년부터는 바로 청소기와 냉장고 쪽으로도 진출해야겠어.’

물론 청소기와 냉장고도 탱크주의 전략으로 갈 생각이었다.

* * *

이번에 새로 신설한 인재 정보팀 실장인 송기우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보고하였다.

“지금까지 임원급 두 명, 중간 관리자급 아홉 명, 일반 직원 열아홉 명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고창모 선임연구원도 물론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고 말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혜성 전자에서 내건 조건이 워낙에 좋아서, 영입하는 게 수월했습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건도 좋지 않았다면, 일성 전자의 직원을 영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직 혜성 그룹은 일성 그룹과 비교하면 많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빅 5가 되고 싶군.’

일성의 부회장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마음이 조급해지는 기분이었다.

규모가 작아서 손해 보는 일이 원체 많다 보니 더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거 같았다.

“실장님의 활약 덕에 업체 전체가 소란스러워졌군요.”

“후후. 이러다 이공계 고급 인력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게 아닐까 걱정입니다.”

<전자 업계 비상! 혜성 전자가 불러일으킨 스카우트 열풍!>

나는 일성 전자의 유능한 인재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보복도 할 겸, 혜성 전자를 본격적으로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잠잠하던 미래 전자와 정우 전자도 나를 따라서 인재 영입을 시도했고, 그 때문에 업계 전체가 들썩였다.

‘일성 전자도 집안 단속에 정신이 없다지?’

빅 4라고 직원들의 대우가 엄청나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월급이야 조금 더 받는다지만, 주 6일 내내 야근을 했고, 일요일까지 반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인재 영입에 나서니까, 겨우 며칠 만에 일성 전자와 은성 전자 쪽에서 직원 복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아마 월급도 조금씩이나마 늘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나저나 아쉽군. 이호승의 반응을 보고 싶었는데, 하필 이때 일본에 가 있다니 말이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송기우에게 말했다.

“앞으로도 일성 전자의 인재들을 영입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주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유가 되시면 은성 쪽의 인재도 영입하시면 좋습니다.”

나는 욕심이 많았다.

단순히 돈이나 명예에 관한 욕심뿐만이 아니라, 인재에 관한 욕심도 매우 많은 편이었다.

‘기회가 생겼으니 최대한 영입해야지.’

원래라면 업계의 암묵적인 규칙이 있어서 함부로 스카우트를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일성 전자가 나의 심기를 거슬렀고, 나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인재를 빼앗았다.

그러자 업계 전체가 요동을 치며 스카우트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무런 제약 없이 인재들을 영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혜성의 인재를 빼앗기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다행히 집안 단속이라면 어떤 기업보다 자신이 있었다.

일단 우리 기업은 급성장 중이었으므로 미래 잠재력이 뚜렷했고, 월급이나 복지도 업계 최고 수준이었다.

특히나 성과를 냈을 때 주는 성과급이 엄청났기에, 웬만해서는 우리 인재가 다른 기업으로 이직할 일은 없을 것이다.

쏴아-

그때였다.

갑자기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비가 온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엄청나게 쏟아질 모양입니다. 벌써 이렇게 많은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송기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쾌청한 하늘이었는데, 지금은 새까만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노사께서 말씀하신 태풍이 오늘부터 시작되는 건가.’

순식간에 쏟아지는 폭우를 보며 나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리고 있는 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목숨을 잃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질 수밖에 없었다.

* * *

9월 3일.

회사에 출근한 나는 진봉현 비서실장에게 가장 먼저 태풍 피해를 물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망자는 90명에 실종자는 45명이라고 합니다.”

“피해가 엄청나군요.”

“이재민은 지금까지 10만 이상이라는데, 남부 지방에서는 아직 비가 그치지 않고 있으니 피해는 더 늘어날 전망입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실로 엄청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최종 집결 때는 사망자와 실종자가 2백 명 가까이로 늘어나겠지?’

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나는 신이 아니었다.

인재(人災)라면 막을 수 있겠지만 태풍 같은 천재지변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날짜만 정확히 알았으면, 조금 달랐을까?’

사실, 태풍이 언제 상륙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노사가 기억력이 좋기는 해도 모든 사건의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기업들이 수해 의연금을 내고 있다 들었는데, 얼마씩 내고 있습니까?”

“예. 센터투자금융의 대표이사가 천만 원으로 가장 많이 냈고, JC 엔지니어링 사장이 50만 원, 한조통상 주식회사의 장춘길 사장이 30만 원을 냈습니다.”

“대기업들은요?”

“대기업 중에는 아직 따로 낸 기업은 없고, 정부에서 지침이 내려지면 그때 의연금을 낼 거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웅산 테러 때도 그랬지만, 기업들은 정부의 지시가 떨어지면 그때 움직인다.

어차피 정부에게 돈을 뜯길 것인데, 굳이 미리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론에 알리세요. 30억을 기부하겠다고.”

“예? 30억을 말씀입니까?”

진봉현이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정부가 나서기도 전에 선뜻 기부한다니, 그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 사재로 기부할 것이니.”

혜성 그룹은 나중에 정부가 재단을 만들어 의연금을 모집하면 그때 기부하면 된다.

물론 그 돈이 이재민들에게 갈지, 권력자들의 뒷주머니로 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회장님이 그렇게 많은 돈을 기부한다고 정부가 과연 좋아하겠습니까?”

“정부 좋으라고 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

30억을 기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래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말이다.

“회장님께선 참으로 마음이 따뜻하신 거 같습니다. 30억씩이나 기부를 하신다니 말입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시긴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진봉현이 부담스러운 눈빛을 하며 그같이 말했다.

30억이라는 거액을, 그것도 사재를 털어 기부한다고 하니 내가 성인군자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괜한 오해를 하시는군. 나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오해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가족들부터, 혜성 그룹의 임직원들까지.

심지어 다음 날, 9월 4일에는 국무총리가 직접 전화까지 주었다.

-이 회장! 정말 고마워요.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이 회장이 뜻깊은 일을 해줬어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30억이나 통 크게 기부했는데 당연한 일이라니. 허허! 다른 재벌 그룹의 회장들도 이 회장을 본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닙니다.”

-아무튼, 정부와 국민들을 대신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제가 최대한 도울게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겸손하기까지! 하하하! 다음에는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 봐요, 우리.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국무총리와의 통화가 끝나자 노사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30억의 위력이 크긴 하구나. 국무총리가 직접 전화를 다 주다니 말이야.)

“저는 딱히 이럴 의도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뭐,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니냐. 이재민들도 돕고, 인맥도 생기고. 더군다나 혜성 그룹의 평판도 더 좋아졌고 말이다.)

“그렇긴 하죠.”

(아무튼, 태풍 피해에 대해서는 너무 마음 쓰지 마라. 네가 신도 아닌데, 자연재해를 어떻게 막아? 태풍은 불가항력이야.)

솔직히 불가항력까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미친 척하고 미래를 예언하고 다녔으면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이렇게 됐는데.’

지나간 일을 후회해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그러니, 지나간 일에 신경 쓰기보단, 앞으로 있을 인재(人災)를 막는 일에 신경 쓰는 게 옳았다.

대교든, 백화점이든, 앞으로 대형 재난이 몇 번이나 벌어질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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