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85화 (85/300)

85화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벤츠와 협력해서 승용차까지 개발한다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유명 메이커인 벤츠와 힘을 합친다니.

그렇게만 된다면 일본 회사들이 제휴를 거절한 것은 아쉬운 일도 아니었다.

(근데 지금은 자동차에 신경 쓸 때가 아닌 거 같다.)

노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습니까?”

(일성 부회장이 너를 공격하기 시작했어.)

“저를 공격했다고요?”

(고려일보의 기사를 봐라. 집요하게 너를 깎아내리고 있지 않으냐?)

나는 턱 끝을 문질렀다.

아침에 신문을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쁘긴 했다.

신문사에서 여전히 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있으니까.

‘누가 보면 기자가 혜성 그룹에 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혜성 그룹을 걱정해 줬었지.’

조금 기분 나쁘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내가 원체 젊으니 괜히 자극적인 보도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노사가 고려일보를 거론하니 왠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거 같았다.

“이호승 부회장이 처가를 이용한 겁니까?”

(그래. 고려일보뿐만이 아니라, 여러 언론을 동원해서 너의 흠집을 잡으려 하고 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일성 그룹의 후계자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보복할 줄은 몰랐다.

‘하긴, 나를 상대로 돈지랄을 할 수도 없으니 공격 수단이 한정되어 있었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노사가 말을 이었다.

(부회장의 공격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야. 이제 곧 지현이 남자친구도 지방으로 좌천당하게 될 거다.)

“김동윤이 좌천을 당한다니요?”

(너의 매부가 일성 전자에 다니고 있으니 부회장으로선 눈엣가시처럼 느껴지지 않았겠어?)

“저 때문에 지방으로 좌천당한다는 겁니까.”

이를 악물었다.

실로 치졸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결혼도 안 한 동생의 남자친구에게까지 피해를 주다니.

‘적당히 뒤에서 지분만 사 모으려고 했는데…….’

이호승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하고 마리라.

* * *

“소식은 들었다. 평택으로 가게 됐다며?”

“……예. 어쩌다 그렇게 됐습니다.”

애써 덤덤한 모습으로 대답하는 김동윤의 모습에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안하게 됐다.”

“형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사과하세요?”

“평택 가는 이유가 나 때문인 거 알아. 내가 너희 그룹 부회장과 사이가 안 좋아졌거든.”

솔직히 말하면, 사이가 나빠진 정도가 아니었다.

이호승은 나를 아예 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였으니까.

나 역시도 이번 일로 이호승에 대한 감정이 많이 안 좋아졌고 말이다.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게 형님 탓은 아니죠. 우리 일성에서 속 좁게 행동한 거 아니겠습니까.”

김동윤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하자, 나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혜성으로 와라.”

“혜성이라면, 혜성 전자로 오시라는 말입니까.”

“그래. 굳이 이번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너 정도로 능력 있는 인재면 특별채용해서라도 모셔와야 해.”

“……저를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그런데 이대로 일성을 떠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왜?”

“저는 일성맨입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일성 전자에 뼈를 묻기로 각오했던 터라, 끝까지 가 보고 싶습니다.”

“일성에서 찬밥 대우를 받는다고 해도 말이냐?”

“설령 찬밥 대우를 받는다 한들, 일성에서 해고하지만 않는다면, 저는 영원한 일성맨입니다.”

그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올곧은 성격임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왠지 그 성격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뭐 이런 성격이니 지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거겠지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김동윤에게 말했다.

“정 버티기 힘들다고 느껴지면 언제든 말해라. 너라면 당장에라도 혜성 전자의 임원으로 영입해 줄 테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형님.”

나는 김동윤과 헤어진 뒤, 유정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접니다.”

-마침 전화 잘 주셨어요. 안 그래도 회장님에게 먼저 통화를 걸 생각이었어요.

“대표님도 알고 계셨나 보군요.”

-이한성 회장님께는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고려일보가 부회장의 처가라서 저희 쪽에서도 따로 막을 방법이 없었어요.

유정석은 김동윤이 좌천당한 일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하긴, 그에게 있어 김동윤이 당한 일은 거론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김동윤이 누군지 모를 수도 있었고 말이다.

-고려일보에게는 확실한 경고를 남기겠습니다. 저희 쪽에서 압박을 주면 고려일보에서도 더는 그런 식의 보도를 하지 못할 거예요.

“경고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그러면 다른 방도가 있을까요?

“일단 저는 보복 차원에서 고려일보에 주는 광고를 모두 끊을 생각입니다.”

나는 돈 내고 욕먹는 취미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고려일보는 세계 그룹과 비교하면서 노골적으로 세계 그룹과 혜성 그룹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었다.

고려일보에서 명백한 적대행위를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고려일보의 광고를 끊고 경쟁 언론사인 동화일보에 광고를 더 늘릴 생각이었다.

-광고를요?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면 어쩌시려고……?

“이명승 사장님이 일성 그룹 회장이 되신다면 그때는 고려일보도 알아서 숙이고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유정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반드시 고려일보의 사죄를 받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 뒤로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잠실로 갑시다.”

잠실에 잠시 들린 나는, 인정민에게 이 같은 지시를 내렸다.

“용인에서 일성 그룹이 땅을 사들이고 있을 겁니다. 어떤 땅을 사들이고 있는지 알아내시고 바로 연락하십시오.”

“일성 그룹의 땅을 빼앗을 생각입니까?”

“예. 정확히는 일성 부회장이 눈독 들이는 땅들을 빼앗을 겁니다.”

“호오. 재미있는 일이 되겠습니다. 하하.”

“구태여 은밀하게 행동하지 않아도 됩니다.”

“회장님이 나섰다는 걸 일성에서 알게 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내 말에 인정민이 피식 웃었다.

“맡겨 주십시오. 도발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습니다. 흐흐.”

그런 인정민의 모습에 나는 든든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돈지랄이 뭔지 보여주마.’

기업을 인수하려고 하면 기업을 빼앗고, 부동산을 사들이려고 하면 부동산을 빼앗는다.

그야말로 돈지랄을 해서라도 이호승을 악착같이 방해할 생각이었다.

나를 건드린 것을 후회하게끔 말이다.

‘인재도 빼앗아줘야겠지. 일성 전자의 인재를 말이야.’

* * *

일성 전자에서 세탁기 개발 1팀 선임연구원이란 직책을 가진 고창모는 축 처진 어깨로 퇴근길에 나섰다.

요즘 들어 야근이 잦았다.

8시에 끝나면 양호한 수준이었고 오늘처럼 9시 넘어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도 이렇게 늦게 끝날 줄이야. 설마 정희가 이 시간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몸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집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이었다.

잠잘 시간이 넘었음에도 그를 기다린다고 억지로 깨어 있을 게 분명하였다.

‘그나저나 잔업이 남아서 이번 주 약속은 못 지킬 거 같은데, 어떡할까. 정희가 크게 실망할 텐데.’

고창모는 가정적인 남자였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은 가족들과 함께 어디론가 놀러 가고는 했다.

이번 주에도 용인에 있는 공원을 가기로 약속하였는데, 아무래도 그 약속은 지키기 힘들 거 같았다.

일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승진해야 야근이 줄어들 텐데……. 과연 언제쯤 승진을 할 수 있을지.’

가전 개발 능력만으로 승진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선임연구원을 넘어 팀장, 어쩌면 실장까지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팀장 이상부터는 가전 개발 능력 말고 다른 능력이 필요하였다.

그 능력이란 다름 아닌 ‘정치’였다.

아쉽게도 고창모는 사내 정치와는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학연, 지연, 혈연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말이다.

“고창모 선임연구원님 맞으십니까?”

그때였다.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창모가 뒤를 돌아보니,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30대 사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 누구십니까?”

낯선 사내의 모습에 고창모는 흠칫 놀랐다.

어둠 속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걸면 누구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샤롯 호텔에서 조폭 간의 칼부림까지 나지 않았던가.

인신매매나 강도 살인도 빈번히 일어나는 시대였으니, 성인 남성인 고창모로서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저는 혜성 그룹에서 나왔습니다.”

“혜성이라니요?”

사내의 말에 고창모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혜성 그룹을 거론한 것을 보니, 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시간 괜찮으시다면 근처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고창모는 고개를 저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모르는 사람과 낯선 장소로 가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 기다리는데 시간을 끌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냥 여기서 용건만 간단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혜성 그룹 회장님께서는 고창모 선임연구원님을 높게 평가하고 계십니다. 고창모 선임연구원님이 개발하신 세탁기를 직접 사용하고 계실 정도입니다.”

사내의 말에 고창모는 눈을 부릅떴다.

저 말만 들어도 사내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설마 영입 제안을 하시려고 저를 미행하신 겁니까?”

“미행이라니요. 오해십니다. 원래는 연구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먼저 가셨더라고요. 그래서 다급히 쫓아온 거였습니다. 괜히 미행이나 이런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어쨌든, 스카우트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맞습니다. 저희 혜성 그룹 회장님이 직접 고창모 선임연구원님을 영입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자신이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대기업 회장이 영입 지시를 내린단 말인가.

사내가 하는 말은 입에 발린 말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일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다.

“명함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제 명함에는 혜성 그룹이라고 적혀 있지는 않습니다만, 일단 보여드리겠습니다.”

“한성 주택? 아, 이한성 회장님이 직접 세운 개인 회사군요.”

“예. 맞습니다. 잘 아시고 계시네요. 하하하.”

고창모는 자리에 선 채로 고민하였다.

예상치 못한 혜성 전자의 영입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고창모는 단호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안을 거절하시는 겁니까?”

“예, 저는 일성에 남아야 할 거 같습니다.”

솔직히 지금 받는 대우가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박봉에다 승진 가능성도 적었고 야근에, 주말 근무에 쉬지 않고 일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일성 그룹은 빅 4의 대기업이었다.

혜성 그룹이 비록 재계 순위 8위까지 올랐다고 해도, 일성 그룹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임원직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이, 임원직이요?”

고창모의 눈이 흔들렸다.

임원직이라니.

이건 상상도 못 한 제안이었다.

“어떤 직책을 맡기시려고 임원직을 보장해 주신다는 겁니까? 혜성 그룹에는 세탁기 사업부도 없는 거로 아는데.”

“바로 그 세탁기 사업부를 담당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확히는 세탁기 연구소장으로 말입니다.”

연구소장!

실로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일개 선임연구원에 지나지 않은 그로선, 그야말로 꿈의 자리였다.

‘하지만 혜성 전자의 세탁기 사업이 과연 성공할까? 만약 실패한다면 내 처지도 붕 뜨게 될 텐데, 아무리 임원직을 보장받는다고 해도 혜성으로 가는 게 맞는 선택일지 모르겠군.’

고민하는 그에게 사내가 말했다.

“연봉은 천만 원까지 보장해드리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하, 하겠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

설령 그렇다 한들 연봉이 천만 원이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2년만 버텨도 강남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