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내가 아는 그 벤츠?
물론 모두가 죽상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나를 지지했던 사장들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내가 직접 영입했던 혜성 주류나 혜성 전자, 혜성 자동차 사장들의 얼굴은 편안하게 보였다.
혜성 자동차의 하운철 사장의 경우는 나를 보며 온화하게 웃기까지 하였다.
‘역시 한때는 회장이었던 분이라 그런지, 전혀 긴장감이 없으시군.’
하기야 긴장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내가 억지로 모셔온 상황인데, 하운철 사장의 입장에서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근데 하운철 사장님이야 그렇다치고, 민제훈 사장이 저리 여유를 부리는 건 뭔가 마음에 안 드네.’
민제훈.
창업 공신이자, 혜성 그룹 안에서 비중이 큰 혜성 모직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제훈이 실질적으로 혜성 모직에서 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회사에서 하는 거라곤 거래처 사장과 술 마시기 정도밖에 없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놀면서 회사에 다니는 수준.
‘그래도 가만 놔둘 수밖에 없겠지. 민제훈 사장에게 은혜를 입기도 했고 말이야.’
나도 사람인지라 나에게 잘 대해 준 사람을 함부로 취급할 수가 없었다.
민제훈은 내가 혜성 그룹에 막 입사했을 때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 주었던 인물이었다.
어차피 당장은 종태 형이 실권을 행사하며 혜성 모직을 잘 이끌어 가고 있으니, 민제훈은 저리 놔두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여러분께 다시 인사드립니다. 새롭게 회장으로 취임한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짝짝짝!
내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자 사장들이 열심히 손뼉을 쳤다.
“오늘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취임 인사 겸, 그룹 내의 모든 사업의 수익성과 미래 성장성을 면밀하게 분석하기 위함입니다.”
경청하는 사장들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분석을 토대로 자원 분배와 투자가 진행될 것입니다. 아울러,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사업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면 단호하게 정리할 생각입니다.”
“……!”
내 말에 사장들은 몸을 움찔하였다.
의례적인 발언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발언이 내가 회장에 취임하고 처음으로 한 발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가볍게 여길 수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나는 ‘돈’이 안 되거나 미래 성장성이 없는 사업은 축소할 계획이었다.
다른 재벌 그룹의 총수들처럼 외형을 키우기 위해 수익성 없는 사업에 마구잡이로 뛰어드는 일은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반대로 미래 성장성이 있는 사업에는 과감하게 투자를 진행할 것이니, 모두 주저 없이 발언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계열사 사장들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치 빠른 사장들이 가장 먼저 손을 들며 자신이 맡은 계열사가 얼마나 유망한지를 설명하였다.
여기서 뒤처지면 투자 규모가 줄어들거나, 아예 사업을 접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건설의 김명운 사장도 기민하게 움직이는군. 내가 이한철 회장과 다른 사람이란 것을 눈치챈 모양이야.’
예전 같았으면 혜성 건설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 부리기 바빴을 거다.
그룹의 핵심 계열사는 혜성 건설이었고, 모든 사업은 혜성 건설 위주로 돌아갔으니까.
하지만 내가 회장으로 취임한 이상, 건설 위주의 전략은 사실상 폐지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건설 사업의 비전이 예전 같지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혜성 건설 쪽에서도 절실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재 혜성 전자는 64K D램을 수출하고 있고, 올해의 매출은 컴퓨터 사업을 포함해서 3백억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세대로라면 흑자 전환까지 오래 걸리지 않겠군요.”
“하지만 일성 전자를 따라잡으려면 더욱더 많은 자금이 투자되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지원을 원합니까?”
“256K D램의 연구 개발비를 제외하더라도 2백억 이상의 투자가 있어야지만, 일성 전자와의 간격을 좁힐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반면 신사업을 담당하는 계열사들은 혜성 건설보다 미래 성장성이 뚜렷하였다.
이재현이 당당하게 2백억의 지원금을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역시 반도체 산업이 쉽지 않긴 하군. 돈이 거의 썰물처럼 나가는 느낌이야.’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나마 64K D램을 수출하면서 상황이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64K D램의 가격이 1.5달러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공장을 놀릴 수 없어서 억지로 생산하는 것일 뿐, 원가를 생각하면 거의 적자 수준이었다.
“혜성 자동차가 한국에서 제일가는 자동차 메이커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을 확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이라. 엔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세계의 유명 자동차 메이커들에 비해 많이 뒤처진 엔진 기술을 확충해야만 국내는 물론 세계를 압도할 수 있습니다.”
“정우처럼 연구소를 설립하는 게 좋겠군요.”
“기술 연구소를 세우고, 유명 자동차 메이커들과 제휴를 추진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후지 중공업이나 이스즈, 르노, 볼보 같은 자동차 회사들과 말입니다.”
“필요한 사업 자금으로 어느 정도를 예상하고 계십니까.”
“어떤 회사와 제휴를 맺고 주력 자동차로 무엇을 내세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백억 이상의 투자는 필요합니다.”
역시 돈 까먹는 건 자동차도 지지 않았다.
기존에 들어간 지원금이 적지 않은데도 백억을 추가로 부른 것이다.
‘이러다 천억도 금방 다 써 버리는 건 아닐지 모르겠어.’
그럴 리가 있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투자를 늘리긴 해야 했다.
11월에는 거하 자동차를 인수해야 했고, 내년에는 승용차 연구도 시작해야 할 것이니.
‘그러고 보면 승용차도 1987년이 되기 전에 생산 준비를 끝내 놔야 하군. 산업 합리화 조치가 끝날 때 바로 판매할 수 있게끔 말이야.’
D램도 그렇고, 승용차도 그렇고 1987년은 여러모로 기념적인 해가 될 거 같았다.
물론 정치적으로도 1987년에 큰 변혁이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 * *
<이한성 회장, 회장 취임 후 첫 사장단 회의.>
<연말에 인사 단행하나? 이한성 체제 더욱 공고화 전망.>
김동윤은 혀를 내둘렀다.
‘어느 신문이든 한성이 형님 이야기밖에 안 하네.’
괜히 재계 8위의 그룹이 아니었다.
심지어 한성의 나이는 28살.
나이 때문이라도 더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결혼식에서도 재계의 유력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었지? 심지어 우리 일성 그룹의 장남이신 이명승 사장님까지…….’
김종태의 결혼식에 참가했을 때, 김동윤은 깜짝 놀랐다.
일반인은 껴선 안 될 자리라고 느껴질 정도로 재계의 거물들이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한때 일성 그룹의 후계자로 불렸던 이명승 사장까지 참석했을 정도니 말 다 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분명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작은 봉제 공장의 사장이었는데, 혜성 그룹의 회장이 되시다니. 참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야.’
신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야, 혜성 그룹? 김 대리의 처가 가문 아니야.”
“아, 과장님.”
김동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놀리는 걸 좋아하는 구영준 과장이 혜성 그룹을 운운하니 왠지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부럽다. 부러워. 처가가 재벌 그룹이라니. 김 대리, 제수씨에게 용돈으로 몇백만 원 받는 거 아니야?”
“아직 사귀는 단계입니다.”
“에이, 혜성 그룹 임원의 결혼식까지 갔다 왔다며? 거기서 이명승 사장님도 뵙고 왔으면서 그냥 사귀는 거라고?”
구영준이 진심으로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혼할 상대가 무려 혜성 그룹 회장의 하나뿐인 여동생이니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지현이가 좋아서 사귀는 거뿐인데…….’
김동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 처할 때면 그는 왠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신데렐라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지현이와 사귀는 것도 어디까지나 순수한 사랑이었을 뿐, 혜성 그룹의 후광을 바라고 사귄 것은 아니었다.
‘이런 내 솔직한 생각을 말해도 분에 겨운 소리나 한다고 욕먹겠지?’
그래서 그냥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김 대리. 나중에 출세하게 되면 나도 끌어올려 줘. 알겠지? 혼자만 출세하지 말란 말이야.”
“하하…….”
“김동윤 대리님! 부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오! 김 대리 얼른 가 봐! 부장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나중에 꼭 알려 주고.”
“가 보겠습니다.”
김동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부장실로 향했다.
“김 대리. 한 가지 안 좋은 소식을 알려 줄까 해.”
“예?”
박현우 부장의 말에 김동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 대리는 평택으로 가게 될 거야.”
“평택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곧 전출 가게 될 거라고. 평택의 생산 지원 부서로 말이야.”
“…….”
갑자기 전출이라니.
그것도 평택을 가라는 말에 김동윤은 당혹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할 말 끝났으니 인제 그만 가 봐.”
냉정하게 축객령을 내리는 박현우 부장을 보며 김동윤은 다급하게 말했다.
“제가 왜 평택에 가야 하는 겁니까?”
“그건 본인이 알아야 하지 않나?”
“하지만 저는 잘못한 일도 없는데…….”
“잘못한 것은 없지만, 반대로 잘한 일도 없지 않나? 최근, 인사고과에 반영될 만한 성과를 낸 적이 없잖아.”
그 말에 김동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록 큰 성과는 없었어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야근에, 주말 근무에…….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좌천을 시킨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여자를 잘 사귀지 그랬나?”
“……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김 대리의 여자 친구 말이야. 혜성 그룹 회장의 동생이라지? 자네도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혜성 그룹 회장이 우리 부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렸어. 혜성 그룹은 우리 그룹에 단단히 찍혔다는 말일세.”
“……그럼 제가 좌천당하는 이유도?”
박현우 부장은 아무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김동윤은 그런 박현우 부장의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고작 이런 이유로 좌천을 당한다고?’
차라리 자신이 뭔가 잘못해서 좌천을 당했으면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 친구의 오빠가 혜성 그룹 회장이란 이유로 좌천을 당해야 한다니.
이건 절대 납득할 수 있는 처사가 아니었다.
‘일성맨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는데……. 회사는 나를 혜성 그룹의 사람으로 보는 건가.’
갑자기 회사 생활에 회의감이 들었다.
* * *
사장단 회의 이후, 그룹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지원을 확정받은 혜성 자동차와 혜성 전자의 경우는 다시 숨 가쁘게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일본 기업들과의 기술 제휴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군요.”
혜성 자동차에서 기술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한 이후, 가장 먼저 일본에 사람을 보냈다.
일본의 유명 자동차 메이커와 기술 제휴를 체결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일본 회사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사실 그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우리를 경계하는 거겠지.
실제로 일성 전자를 비롯하여 한국의 몇몇 대기업들이 기술 제휴를 받은 뒤로 무섭게 성장하여 일본 회사를 위협하였다.
혜성 그룹도 일본의 기업들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니, 제아무리 경제가 성장하면서 너그러워진 일본 기업들이라도 함부로 기술 제휴를 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볼보나 르노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렇습니까?”
노사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스승을 찾는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은 거 같았다.
뭐, 쉬웠다면 한국 자동차 회사들이 이미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했겠지만 말이다.
(다만, 벤츠라면 가능성이 있을 거야.)
“독일의 그 벤츠 말씀입니까?”
(벤츠가 그 벤츠 말고 또 있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유명한 벤츠와 기술 제휴를 맺는다고?
솔직히 말해서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벤츠가 뭐가 아쉽다고 우리에게 기술을 제휴해 준답니까?”
(동아시아 지역에 거점을 마련할 생각을 하고 있거든. 실제로 몇 년 뒤에 쌍호 자동차가 벤츠와 기술 제휴를 맺기도 하고 말이야.)
쌍호 자동차가 했다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거 같았다.
물론 몇 년의 오차가 있으니,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