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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82화 (82/300)

82화 어차피 적이다

“아, 그러십니까?”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백상현의 표정이 어딘가 퉁명스러웠다.

그의 직위는 고작해야 상무에 불과했다.

그런데 하는 행동을 보면 나보다 직위가 높은 것처럼 느껴졌다.

‘회장도 아니고 고작해야 후계자의 최측근일 뿐인 주제에 참 오만하군.’

하긴, 백상현은 이호승의 최측근이란 이유로 지금까지 상당한 대우를 받아왔을 것이다.

아마 나에게도 그런 대우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그럼 내일과 모래의 시간은 비워두세요. 제가 모시는 분이, 언제 시간이 괜찮아질지 저도 모르니까요.”

“…….”

“약속 날짜도 정했으니,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러시죠.”

“아, 그런데 여기는 커피가 별로군요. 다음에는 그냥 냉수를 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기분 나쁜 소리를 하고 가는 백상현이었다.

(쯧, 일개 상무 주제에 참 건방진 놈이구나.)

노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혜성을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더 답이 없는 놈이로군. 아직도 혜성을 우습게 보다니. 어떻게 그렇게 현실 파악을 못 할 수가 있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일성 그룹의 임원이니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매출이며, 자산이며 상대가 안 되는데 말입니다.”

(일성이라고 너무 고평가하지 마라. 미래의 일성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일성은 혜성이 언제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야.)

1년 전에 이런 말을 들었으면 그럴 리가 있겠냐며 고개를 내저었을 것이다.

하지만 혜성 그룹은 1년 동안 급성장을 거듭하였다.

새로 인수한 회사들의 매출까지 포함하면 연 매출도 거의 1조에 육박했을 정도였다.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길어야 2년이다. 2년 뒤에는 설령 일성 후계자라 해도, 너를 무시할 수 없게 될 거다.)

노사의 말이 맞았다.

지금 당장이야 기가 죽을 정도로 규모 차이가 크지만, 내년이 되면 그때는 차이가 그리 크게 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혜성 그룹은 지금보다 비약적인 발전을 한 상태일 테니까.

‘이렇게 굴욕을 당할 일도 어쩌면 올해가 마지막이겠지.’

내년, 늦어도 내후년에는 반드시 일성 그룹을 따라잡고 마리라.

그래서 누구도 혜성 그룹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 * *

저녁에는 미리 약속했던 종태 형과 술자리를 가졌다.

“형도 장가를 가긴 하네.”

“너 때문에 못 갈 뻔했는데, 다행히 늦게나마 가게 됐다. 하하.”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내 덕에 결혼하는 건데.”

“왜 네 덕이야?”

“내가 번듯한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으면 형수가 형이랑 만나줬겠어?”

“이 자식이? 아무튼 말은 잘한다니까.”

종태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하기로 했냐?”

“유지은 씨와 결혼해야지.”

“오, 결국 일성 쪽이랑 이어지는 거네.”

“그렇긴 한데, 후계자 쪽이랑은 라인이 달라.”

“한마디로 직계는 아니다?”

“뭐 그렇게도 볼 수 있고.”

“뭐가 됐건, 너도 이왕 결혼한 거 제수씨랑 잘 지내봐. 괜히 일에만 미쳐서 가정을 등한시하지 말고.”

“형한테까지 이런 말을 들으니, 진짜 내가 일에 미치긴 했었나 보네.”

“지금도 미쳤잖아. 나랑 술자리 가진 것도 거의 반년만 아니야?”

“됐어. 그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돼. 술 안 마시면 좋은 일이지. 그보다 형, 갖고 싶은 거 있어?”

“왜? 결혼 선물이라도 주게?”

“그래야지. 형도 혜성 그룹의 임원인데 결혼식 정도는 챙겨줘야지.”

“오! 준다면 나야 좋지.”

선물을 준다니 바로 반색하는 종태 형이었다.

나는 그런 종태 형을 보며 피식 웃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회장이 되면 종태 형에게 어떤 일을 맡기는 게 좋을까. 일단 혜성 모직의 부대표로 임명하는 게 좋겠지? 그 뒤에는…… 음, 혜성 유통에서 혜성 백화점 사업부를 독립시켜서 그쪽 대표로 임명하는 것도 괜찮겠어.’

혜성 그룹의 회장이 되면 그룹 임원진을 대대적으로 교체할 생각이었다.

종태 형처럼 능력이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더 높은 자리에 앉혀야 했다.

창업 공신이랍시고 능력도 없으면서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해임해야 할 것이고 말이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일단 앉으시죠.”

이호승의 악수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내가 용건부터 묻자, 그가 오른손으로 식탁을 가리켰다.

“식사부터 합시다.”

“아, 예.”

음식들은 맛있었다.

하지만 어색한 자리라서 그런지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도 아직 멀었군. 일성 그룹 회장도 아닌 일개 후계자를 만나는데 긴장을 하다니 말이야.)

노사의 질책 아닌 질책에 몸을 움찔하는데, 마침 이호승이 말을 걸었다.

“다 드셨습니까?”

“예,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식사가 입에 맞으신 거 같아서 다행이군요.”

이호승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카로운 눈을 하며 내게 물었다.

“아까 용건을 물으셨지요? 사실 이한성 부회장님께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지은이와 결혼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일단 그것부터 묻고 싶네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묻는 거라면, 사실이 맞습니다.”

“그렇군요.”

내 대답에 이호승은 예상했다는 듯, 무덤덤하게 대꾸하였다.

하기야 내가 직접 일성 화재 본사를 찾아가기까지 했는데 그가 우리 관계를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영이가 아닌, 지은이를 선택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말하는 나영이란 여인은 그의 처조카였다.

참고로 홍나영의 부친은 고려일보 사장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유지은 씨를 만났을 때부터 호감을 느껴왔습니다. 유지은 씨도 저에게 호감이 있었고, 그래서 양측 어른들을 설득하여 결혼까지 끌어냈습니다.”

“호감이라. 그렇군요.”

이호승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말을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유지은을 선택했다고 하니,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오늘 이후로 이호승과 적대 관계가 될 수도 있겠군.)

노사의 말에 나는 속으로 동의를 표했다.

내가 유지은을 선택했다는 건, 이호승이 아닌 이명승을 선택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이호승으로선 내가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으리라.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일성 전자의 주식을 매입하고 있으신데, 목적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목적은 어디까지나 수익입니다. 다른 목적은 없으니 괜한 우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성 전자의 지분을 벌써 3% 가까이 매입했는데, 이것도 다 투자 목적으로 매입한 겁니까.”

나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

이호승이 설마 내 투자 정보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동원한 계좌가 한두 개가 아닌데, 이걸 어떻게 알아차렸지?’

물론 내 계좌 전부를 알아차린 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내가 매입한 일성 전자의 지분은 4%가 넘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충격이 없을 수는 없었다.

나로서는 나름대로 잘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일성에서는 거의 다 파악하고 있었다니, 마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기분이었다.

(원래 일성의 정보력은 알아주는 편이지. 겨우 이 정도에 놀랄 건 없다.)

하긴, 이런 일로 놀랄 필요는 없지.

일성 전자의 지분을 매입한 것이 그렇게 대단한 정보가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일성 전자의 미래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매입한 시점에서 주가가 많이 오른 상태이지요.”

“그럼 앞으로도 일성 전자의 주식을 매입할 겁니까?”

“기회가 된다면 그러지 않겠습니까.”

내가 담담하게 그리 대꾸하니 이호승이 눈썹을 실룩였다.

그에게 있어 나는 이명승의 사람이나 다름없기에 내가 일성 전자의 지분을 매입하는 것도 껄끄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적당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일성 전자의 지분을 더 늘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억지를 부리시는군요. 저는 어디까지나 투자 목적으로 주식을 매입했을 뿐인데, 그게 뭐 잘못된 일입니까?”

내 말에 이호승은 아무 대답 없이 혀를 찼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형님에게 지참금으로 무엇을 받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성 그룹의 일에 깊게 관여하지 마세요.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입니다.”

이호승은 그렇게 경고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어이가 없군.’

얼마나 나를 우습게 봤으면 저런 식의 협박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노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솔직히 이렇게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이호승이 저에게 호의적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재계에서 나의 가치를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 이호승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재벌들이 나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부터 자신의 처조카와 나를 이으려고 시도했었던 자이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 만날 때도 나는 이호승이 나를 회유하려는 시도를 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호승은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부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날카로운 눈빛으로 은연중 적대감을 표출하였다.

마지막에는 협박까지 하며 아예 적대 관계가 되었고 말이다.

(이호승도 너를 포기한 듯싶다. 아버지를 몇 차례 만나 회유했는데도 결국 네가 선택한 것은 유지은이었으니 말이야.)

“그렇습니까.”

(어쨌든, 이미 지나간 일을 생각해 봐야 의미가 없다. 그보다 앞으로가 문제지. 너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계획대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계획대로라. 이호승이 눈치챘는데도 계속 지분을 매입하겠다고?)

“그쪽에서 눈치챈 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적이 될 사람인데.”

이호승의 협박에 굴복하여 계획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혜성이 비록 일성보다 작다지만, 상대는 회장이 아니라 일개 부회장에 불과하였다.

반면 나는 보름만 지나도 회장이 될 몸이고.

(전에도 말했듯, 눈에 띄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괜히 일성 회장에게 찍혀봐야 좋을 게 없어.)

“저 역시 전면에 나설 생각은 없습니다. 황인범 회장이나 다른 큰손을 이용해서 일성 전자의 지분을 모을 생각입니다.”

내 말에 노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 회장을 이용한다면 문제 될 게 없기는 하겠군. 지분은 몇 프로 모은 뒤에 이명승에게 알릴 생각이냐.)

“적어도 8%는 되어야 저의 계획에 따라주지 않겠습니까?”

(8%면, 당장은 충분하겠구나. 어차피 나중에 지분을 쉽게 모을 기회가 올 테니 말이야.)

노사와 나는 그 뒤로도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냥 평범한 대화가 아닌, 일성 그룹의 후계 구도를 바꿀 작전 계획을 말이다.

* * *

시간이 흘러 종태 형 결혼식 날이 되었다.

이날 나는 마치 내가 결혼하는 것처럼 긴장감을 느꼈다.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유지은을 소개해주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분이 한성이 네가 말했던 유지은 씨니?”

“예. 그렇습니다.”

“미인이시구나.”

“가, 감사합니다. 어머님.”

“언니! 정말 예쁘세요. 오빠보다 언니가 더 아깝게 느껴질 정도예요!”

다행히 가족들은 유지은을 환영해주었다.

나이 빼고는 모난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지은이 환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뵙네요. 이한성 부회장.”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뒤를 돌아보니, 낯선 인물이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한성 씨. 이분은 제 고모부이신, 이명승 사장님이세요.”

유지은의 소개에 나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이명승 사장님이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이한성 부회장입니다.”

“반가워요.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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