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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81화 (81/300)

81화 이젠 관심도 없어

결혼식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일성 화재 본사로 향하는 도중 로비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익숙한 얼굴이란 다름 아닌, 나와 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유지은이었다.

“그래서 언제 결혼할 건데?”

“그러게.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나?”

“애초에 지은이, 만나는 사람이 있긴 해? 나는 지은이가 남자랑 만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혜성 그룹이었던가? 거기 부회장일 걸? 근데, 그 사람은 다른 여자 만난다는 소문이 있던데…….”

친구들과 대화하는 거 같아서 처음엔 못 본 척 지나가려고 했었다.

굳이 민망한 상황을 연출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들의 대화 내용을 들으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축 늘어진 유지은의 어깨가 영 보기 안 좋았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겠군.’

뭔가 죄스러웠다.

늘 자신감 넘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 더더욱 죄스럽게 느껴졌다.

“유지은 씨.”

내가 뒤에서 말을 거니 유지은이 몸을 크게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 한성 씨?”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이곳에?”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려는데 옆에서 그녀의 지인이 끼어들었다.

“지은아, 이분 누구셔?”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그녀들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지은 씨 약혼잡니다.”

“헐!”

“약혼자라고요?”

내 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물론 유지은도 예외가 아니어서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이야, 지은아?”

유지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말 안 했어. 이렇게 멋진 분이 약혼자란 거!”

“훤칠하시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지은 씨보다 한 살 많습니다.”

“딱 좋다! 딱 좋아!”

“혜성 그룹 부회장이라던데, 사실이에요?”

“예, 사실입니다.”

“어머, 어머!”

나의 정체가 뭐 그리 궁금한지, 그녀들은 연신 이것저것 질문하였다.

난 유지은을 생각해서 그녀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유지은이 나섰다.

“한성 씨,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아, 저희 아버지를요?”

“혹시 이따 시간이 괜찮으시면 잠깐 데이트 좀 하죠. 대표님과의 대화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 같습니다.”

내 말에 유지은의 지인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데이트래, 데이트!”

“어머, 벌써 상견례까지 한 거야?”

“그러겠지! 약혼자라잖아!”

나는 그녀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유지은을 바라보았다.

“좋아요!”

다행히도 유지은은 싱긋 웃으며, 내 데이트 요청에 응해 주었다.

괜히 거절이라도 했으면 무안했을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 * *

“로비에서 대표님의 따님을 만났습니다.”

“오, 그래요? 지은이가 아직 퇴근을 안 했나 보군요.”

유정석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이따가 둘이서 저녁 식사하기로 했습니다.”

“하하, 일찍 보내드려야겠군요.”

너털웃음을 짓는 유정석을 보며 나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표님, 이제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유지은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이미 양 가문의 결합은 결정된 사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한철 회장이 유정석을 직접 만나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부회장님부터 장인어른이라고 부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럼 저도 노력해 볼게요. 하하!”

“하하.”

내가 어색하게 따라 웃으니 유정석이 말했다.

“날짜는 겨울로 정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겨울이라니?

순간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결혼식을 말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리고 되물었다.

“올해 말씀입니까?”

“더 시간 끌 필요가 있겠어요? 제 딸아이 나이를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일찍 보내야죠.”

조금 일찍인 게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정해주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나야 올해 결혼하나 내년에 결혼하나 큰 차이는 없었다.

어차피 다음 달이면 회장이 될 것이고, 유정석도 내가 회장이 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올해는 뭔가 일들이 많군.’

자동차를 비롯하여 여러 산업에 진출하였고 8월에는 회장직까지 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결혼까지 추가된다니.

내 인생에서 올해는 기념적인 해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뭐 내년이라고 평범할 거 같지는 않지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정석이 물었다.

“날짜 정해서, 이명승 사장님도 한번 봬야 하지 않겠어요?”

“아, 그래야겠죠.”

일성 그룹의 후계 경쟁에 관여하려는데 정작 이명승을 안 볼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이명승 사장님이 부회장님에게 관심이 많아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사업적으로 많이 배워야 한다면서, 최근에는 동화 자동차 인수전에서 승리한 것을 눈여겨보고 있어요. 무려 정우 그룹을 상대로 인수전에서 승리하셨잖아요?”

“운이 좋았습니다.”

“하하, 그 운이 일성 그룹에서도 통했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꼭 그럴 겁니다.”

내 대답에 유정석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에요. 금방 오셨는데요.”

“일단 식사하러 갈까요?”

“좋아요.”

나는 유지은과 함께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식사가 끝나자, 유지은이 불쑥 물었다.

“아버지와는 어떤 대화를 하셨어요?”

“결혼식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콜록! 콜록!”

내 말에 놀란 건지 유지은은 사레가 들린 듯, 연신 기침하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고마워요.”

“모르고 계셨나 봅니다.”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다고만 들었지, 이렇게 결혼식 날짜까지 잡고 있을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저도 날짜는 모르고 있었는데, 대표님은 겨울쯤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거 같습니다.”

“예? 올겨울이요?”

유지은이 다시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와의 결혼이 확정 난 것도 놀라운데 올해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 같았다.

“지은 씨가 싫으시다면, 제가 대표님께 대신 말해서 날짜를 미루겠습니다.”

“아, 아니요. 싫은 건 아니에요.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 거예요.”

그녀의 표정이 나쁘진 않았다.

나와 결혼한다는 것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저, 그런데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유지은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말씀하세요.”

“조금 거북하실 수도 있는 말인데 괜찮으세요?”

“예, 괜찮습니다.”

“저는 결혼한 이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하고 싶어요. 애를 낳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은 씨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지은이 오히려 놀랐다.

“정말 그래도 돼요?”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내가 알기로 유지은은 꽤 유능한 사람이었다.

일성 화재에서도 여자로서는 드물게 임원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물론 그녀의 아버지가 대표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나만큼이나 바깥일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굳이 억지로 집안일을 시킬 필요는 없지.’

집안일은 따로 사람을 쓰면 될 일.

다만, 일성에서 계속 일하면 괜히 이상한 말들이 오갈 수 있기 때문에 혜성으로 이직시킬 필요는 있었다.

“다만 일성 화재 말고, 혜성 그룹에서 일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혜성 그룹이요?”

“백화점이든, 호텔이든, 모직이든, 어디든 괜찮습니다. 저는 지은 씨가 혜성 그룹에서 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에 유지은은 잠시 망설였다.

갑자기 혜성으로 오라고 하니 부담을 느끼는 거 같았다.

하지만 그녀도 출가외인이란 말을 모르지 않았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일해 보고 싶단 생각을 언젠가 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이루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럼, 혜성 호텔에서 일해주시겠습니까?”

“대우는 어떻게 해주시게요?”

“일성에서 어렵게 영입했는데, 적어도 상무 이상의 자리는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유지은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싱긋 웃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혹시 다음 주 일요일에 시간 됩니까?”

“일요일이요? 따로 약속 잡은 게 없기는 해요.”

“제 사촌 형이 그날 결혼식이라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보다 더 노총각인 종태 형이 마침내 서른의 나이로 장가를 가게 되었다.

결혼 상대는 대학 동창으로 은행 여직원이었다.

“좋아요. 한성 씨 사촌의 결혼이라면 저도 가야죠.”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성 씨의 가족분들도 오시겠네요?”

“예. 회장님은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동생은 참가할 예정입니다.”

유지은이 낯빛을 흐렸다.

내 가족을 만나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잘됐네요. 한성 씨의 가족분들을 꼭 뵙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분명 지은 씨를 예뻐할 겁니다. 물론 제 동생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 * *

이한철 회장이 회사로 복귀했지만 내 일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이한철 회장이 부재했을 때처럼, 그룹 경영에 관한 대부분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회장님이 부르십니다.”

그러다가 간혹 이한철 회장의 호출이 떨어지면 그의 지시를 받거나, 업무 내용을 간단하게 보고할 뿐이었다.

“이제 네가 가진 혜성 건설의 지분도 25%를 넘었지?”

“예, 그렇습니다.”

오늘은 의외로 지분 이야기를 꺼냈다.

하긴, 회사에서 나눌 이야기치고 그룹 지분만큼 중요한 이야기가 없기도 했다.

“나머지도 곧 넘겨줄 테니,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느긋하게 기다릴 테니, 여유가 될 때 천천히 넘겨주십시오.”

내 말에 이한철 회장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하마.”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현금과 비자금을 넘기지 못하는 건 미안하게 됐어. 너도 알다시피, 대관 업무는 내가 관리해야 할 거 같거든.”

“아닙니다. 저도 현금 자산은 충분합니다.”

“내가 부동산만큼은 최대한 정리해서 넘겨주마.”

“그래 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뿐입니다.”

후계 작업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물론 이한철 회장에게 받아야 할 지분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대부분의 계열사에서 최대 지분을 확보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경영권에 대해서는 우려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회장이 되고 나면, 준성이는 어떻게 할 거냐?”

이한철 회장의 물음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 들어 옛일을 후회하고 있다더니, 장남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젠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

“그 사람이 정 걱정되신다면, 제가 나중에 따로 임대료 잘 나오는 빌딩 한 채를 증여해 주겠습니다.”

이한철 회장의 장남이라는 사실 빼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이준성이었다.

심지어 혜성 건설의 지분조차 나에게 강제로 뺏긴 상태.

고림 그룹에서도 이준성을 손절한 지가 오래됐기 때문에 더 신경 쓸 가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이한철 회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내 집무실로 다시 돌아오니 새로운 손님이 와있었다.

“일성에서 오셨다고요?”

“예, 저는 백상현 상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제가 모시는 분이 부회장님을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모시는 분이 누구신데요?”

“저희 일성 그룹의 이호승 부회장님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이명승 사장과 약속을 정한 게 엊그제인데 이호승 부회장까지 나를 찾을 줄은 몰랐다.

‘그 사람이랑도 한번 만나볼 때가 됐지.’

뭐, 결혼 이야기는 이미 끝났으니 소용없겠지만 말이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안 될 거 같고, 내일이나 모래는 시간이 될 거 같습니다.”

“흠, 이호승 부회장님이 어렵게 시간을 내주셨는데, 오늘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호승의 부하도 아닌데 말하는 어투가 영 듣기 거북했다.

“제가 말했을 텐데요. 약속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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