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아무리 생각해도 일성 반도체야
7월이 되자 마침내 이한철 회장이 복귀하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휴식을 취하니 많이 좋아지긴 했다.”
“그렇습니까?”
“미국에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으면 완치할 수도 있을 거라더군.”
나는 다행이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한철 회장이 불쑥 말했다.
“정말 대단하더구나. 회사를 정말 잘 이끌어 줬어.”
“회장님께서 믿고 맡겼으니, 기대에 부응했을 뿐입니다.”
“기대에 부응한 수준이 아닌 거 같던데. 설마 고림 자동차까지 인수할 줄은 몰랐다.”
요즘 들어 자주 듣는 이야기였다.
하기야,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니 그럴 만도 했다.
“고림 자동차를 인수하는 것이 자동차 사업에서 성공하기 위한 최선의 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동화 자동차를 인수한 것도?”
“예. 규모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고림 자동차만으로 부족해서 동화 자동차까지 인수했습니다.”
“허어.”
이한철 회장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회사를, 그것도 규모가 상당한 자동차 회사를 무슨 옷 하나 사 오는 것처럼 간단하게 말하자 기가 막힌 거 같았다.
“올해 말에 어쩌면 또 하나의 자동차 회사를 인수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를? 어떤 회사를 말이냐.”
“거하 자동차입니다.”
거하 자동차란 말에 이한철 회장이 눈을 크게 떴다.
동화 자동차와 거의 엇비슷한 규모의 회사였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인수할 거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껏 해온 결과가 있으니, 그걸 믿는 것이다.
“혜성 건설의 수주실적도 다른 회사에 비하면 양호하더구나.”
이한철 회장은 이번엔 혜성 건설의 성과를 치하하였다.
“일찍이 중동을 포기한 게 탁월한 선택이었던 거 같습니다.”
“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을 추진했다지?”
“독단적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임원들도 제가 차분하게 설득하니,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너의 추진력에 대해 칭찬하려는 거지.”
“중동의 가치가 예전만 못하다는 게 뻔히 보이는 데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대단하구나. 나였으면 끝까지 미련을 놓지 못했을 거다. 혜성 건설이 이만큼 규모를 키운 것은 중동 사업에서 비롯되었으니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노사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뿐인데, 과찬을 들으니 뭔가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너에게 회사를 넘겨줄 때가 된 거 같구나.”
“……!”
갑작스러운 이한철 회장의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갑자기 말씀입니까?”
“원래도 너에게 회사를 넘겨줄 생각이었지만, 이번에 확신을 갖게 됐다. 회장의 자리는 네가 나보다 훨씬 어울린다는 사실을.”
“……저에게도 과분한 자리입니다.”
“빈말할 필요 없다. 너는 사업가가 되기 위해 태어났고, 혜성 그룹을 한국 제일의 대기업으로 만들 능력과 재능을 가졌어.”
“한국 제일의 대기업 말씀입니까.”
“왜, 어렵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계 1위라면 몰라도, 국내 1위는 못할 게 없을 거 같았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말이다.
“아닙니다. 세계를 노리고 있는데 재계 1위 정도는 당연히 해 봐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역시,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쯤 은퇴하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8월에 이취임식을 갖자꾸나.”
8월이라.
한 달 뒤에 정식으로 혜성 그룹의 회장이 된다는 건가?
기쁘기도 하면서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회장직을 물려주신다면, 절대 후회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더 빼지 않고 그같이 말했다.
“적어도 한 번은 거절할 줄 알았는데, 하하…….”
“이미 결정을 내리셨는데 굳이 그런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한철 회장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
“어떤 게 우려스러우십니까?”
“네가 나처럼 될까, 그게 우려스럽다.”
“예?”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생각을 많이 했다. 지난 인생을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었지. 그런데, 후회가 들더구나.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가정에 소홀히 하였다는 게 말이야.”
“…….”
“너도 그렇고, 지현이도 그렇고, 재성이나 준성이도 그렇고……. 나는 아버지로서 완전히 실격이었다. 물론, 남편으로서도 실격이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제야 그런 후회를 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있어 이한철 회장은 아버지가 아닌, 직장 상사에 불과하였다.
“지금의 너를 보면 나처럼 될 거 같아 걱정이 든다.”
“……그렇습니까?”
“네가 잘못하고 있다는 게 아니야. 단지, 나는 네가 나와 같은 후회를 하게 될까, 그게 걱정이야.”
이한철 회장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과거를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사업이 우선이었다.
‘효도랍시고 했던 게 용돈을 드리거나 백화점에 같이 가드리는 거밖에 없었지.’
지현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을 위해 내가 한 것은 오직 하나.
돈을 주는 것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지금도 이런데 나중에 결혼하면 달라질까?’
글쎄.
그때는 돈이나 보내고 말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내 아내나 나중에 태어날 자식들을 대할 때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 같았다.
그룹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업에 집중하게 될 테니까.
“회장님이 염려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너라면 나처럼 후회할 일은 없을 거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사람이란 그렇게 쉽게 변하는 생물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한철 회장처럼 무책임한 가장으로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씩 바꾸긴 해야겠어.’
나는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다가, 이한철 회장에게 말했다.
“마침 이런 이야기가 나왔으니, 결혼에 관한 이야기도 해 볼까 합니다.”
내 말에 이한철 회장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대를 정한 거야?”
“예. 일성 화재 대표의 자녀분과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결국 유지은과 결혼하기로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성 반도체보다 좋은 건 없지.’
물론 유지은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허어. 일성의 후계자가 아닌, 장남을 선택했구나.”
“제가 이명승 사장을 밀어주기로 한 이상, 일성의 후계자도 바뀌게 될 겁니다. 셋째에서 첫째로 말입니다.”
“……!”
놀라는 이한철 회장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그날 저녁.
나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식사 시간을 가졌다.
“오빠, 웬일이야? 밥도 같이 먹고.”
“너랑 할 이야기도 있고 해서 시간 좀 냈다.”
“나랑?”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에는 식사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워낙 일에만 치이다 보니 가족과의 식사 자리도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이것도 좀 고쳐야겠어.’
일도 좋지만, 가정에도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뭐 이런 생각이 언제까지 갈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머니. 장학 재단을 운영하는데, 힘든 일은 없으세요?”
“힘든 일이 있겠니. 직원들이 다 하는데.”
“그래도 어머니가 계셔서 직원들이 더 열심히 하는 거 아니겠어요.”
“정말 열심히 하기는 하더구나. 벌써 백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해줬어.”
혜성 장학 재단은 내 의도대로 재능이 있으면서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지금은 겨우 백 명으로 미미한 시작이었지만, 몇 년 안에는 수천 명의 학생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이들 중 일부만 고위 공직자가 되고 검찰 간부가 돼도 결코 손해가 아니지.’
굳이 의리나 은혜 때문이 아니더라도 혜성 장학생 출신은 권력자가 되어서도 웬만해서는 나를 공격할 수가 없었다.
장학금을 받은 순간부터, 일종에 불문율이란 게 생기기 때문이었다.
“적성에 맞으신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그럼! 정말 즐겁더구나.”
미소를 짓는 어머니의 모습에 나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요즘 어때?”
“응? 나야 졸업 준비하고 있지.”
“김동윤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네 남자친구랑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예전이랑 똑같아. 잘 되고는 있는데, 음…….”
“왜?”
“요즘 들어 결혼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 그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직 오빠도 결혼 안 했는데, 내가 먼저 할 수는 없잖아?”
지현의 말에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하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기회라고 여겼는지 불쑥 물었다.
“한성아. 혹시 누구 만나는 여자 있니? 여기저기서 말들이 들려오긴 하는데, 아들이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나는 순간 어떤 답변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결정을 내리고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소개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정말이니? 지금 만나는 여자가 있는 거야?”
“와, 누군데? 상대도 어디 재벌 딸이야? 아니면 그냥 평범한 사람?”
슬슬 가족들에게도 밝힐 때가 되었다.
유지은과 혼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 알려줄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다.
“누군지는 다음에 알려줄게.”
“아, 왜. 그냥 알려주지.”
“그런데 너는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랑 결혼할 생각이야?”
“당연하지. 몇 년이나 만났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동윤이라는 사람과 지현이가 어울릴 거 같으세요?”
“괜찮지. 한번 만나봤는데 지현이 신랑감으로 딱 맞은 거 같더라. 남자답고, 배려심도 깊어. 1등 신랑감이야.”
“아, 만나 보셨어요?”
“그래. 지난달에 지현이가 데려와서 식사만 같이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현이 남자친구와 어머니가 만났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니.
“네 남자친구에게 말해. 나랑도 한번 보자고.”
“오빠는 왜?”
“왜는 뭘 왜야. 네가 결혼한다는데 어떤 사람인지 나도 알아야지.”
물론 노사가 뒷조사를 이미 해 왔기에, 김동윤이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만, 지금은 일만 열심히 하는 모범 청년이었다.
가족관계나 주변 관계도 모난 구석이 하나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현이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려면, 나도 한 번쯤 만나볼 필요가 있겠지.’
* * *
‘너는 도대체 언제 결혼할 거니? 노처녀 소리 듣는 거 지겹지도 않아?’
‘여자가 무슨 일이야! 집안일이나 해!’
‘30살 넘기면 결혼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된다, 너?’
유지은이 25살을 넘긴 날부터 지겹도록 들은 말이었다.
지금 시대에서는 노처녀가 맞으니,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변명과 핑곗거리가 하나 있었다.
“걱정하지 마.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으니까.”
누군가가 결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녀는 늘 이렇게 변명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변명도 1년이란 시간이 지나자 더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언제 결혼할 건데?”
“그러게.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나?”
“애초에 지은이, 만나는 사람이 있긴 해? 나는 지은이가 남자랑 만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혜성 그룹이었던가? 거기 부회장일걸? 근데, 그 사람은 다른 여자 만난다는 소문이 있던데…….”
유지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점점 사람을 만나는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누구를 만나도 노처녀 소리를 들으니, 대인기피증이 생길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작년, 이한철 회장이 주최한 연회장에서 한성이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유지은은 그 말만 믿고 1년을 기다렸다.
그런데 1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한성은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녀로선 한성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 * *
“유지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