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시도는 해봐도 되겠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반도체 사업부를 넘겨주겠다니.
일성 그룹에서 반도체 사업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하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이런 일로 이한성 부회장님께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어요?”
유정석이 그리 말했지만, 나로서는 의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일성에서 반도체에 투자한 돈이 얼마인데?’
당연히 우리보다 훨씬 많은 돈을 투자하였다.
천억이 넘는 돈이 투입됐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투자한 돈은 이제야 막 결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64K D램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이제는 256K D램까지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의심하는 눈을 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가 이한성 부회장께 왜 이런 제안을 하겠어요? 그만큼 회장이 되는 게 어렵다는 뜻 아니겠어요?”
하기야.
일성 그룹 장남인 이명승의 입장에서 회장이 된다는 조건이라면, 반도체 사업부라고 못 줄 이유는 없었다.
왕국 전체를 얻는데, 그깟 영지 하나쯤이야 아깝겠는가?
반도체 사업부가 아직은 일성 왕국의 핵심 영지라고 보기 어렵기도 했고 말이다.
“유정석 대표님과 이명승 사장님의 입장은 이해합니다. 다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왜 하필 저에게 그런 제안을 하냐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 이한성 부회장께서 반도체에 관심이 많다고 하던데, 아니었나요?”
“반도체에 관심이 많기는 합니다.”
“그러니 이한성 부회장께 제안한 거예요.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라면 이한성 부회장이 적극적으로 원할 거로 생각해서 말이죠.”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라면, 저 말고 다른 그룹에서도 원하지 않겠습니까? 정우와 미래 둘 다 반도체 산업에 진출한 상황인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늑대를 쫓아내려다 호랑이를 끌고 오는 상황을 원치 않았어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뜻은, 정우나 미래와 달리 혜성은 규모가 작으니 위협이 안 된다는 의미였다.
“물론 단순히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럼 또 뭐가 있습니까?”
“이한성 부회장은 자금력도 풍부한 데다 정보력도 최고라고 들었어요. 능력 면에서는 가장 믿음직스럽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미혼이라는 점이 동맹 상대로 가장 매력적이었어요.”
“왜 그렇습니까?”
“후계 경쟁을 하는데, 아무하고 동맹을 맺을 순 없겠죠. 적어도 결혼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신뢰가 가지 않겠어요?”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예상하였던 일이다.
아무리 회장직이 탐나도, 다른 그룹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결혼으로 이어졌다면 말이 달라지지.’
예나 지금이나 결혼은 개인과의 결합을 넘어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 개인이 재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유정석 대표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 알겠습니다.”
“그럼 제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금 고민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좀 갑작스러운 제안인지라.”
유정석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승낙해 주길 바랐던 모양이다.
“알겠어요. 하긴, 너무 갑작스럽긴 했죠.”
“예.”
“그래도 이번 제안과 무관하게, 저희 딸아이를 좋게 봤으면 좋겠어요. 제 딸아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생각이 깊고 착한 아이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늘 유지은 씨를 볼 때마다 저에게 과분한 여성이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기분 좋게 웃던 유정석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볼 테니, 제 제안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그렇게 유정석이 물러나자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후우. 설마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의외긴 의외구나. 내가 알기로 일성 그룹의 장남은 그렇게 야망이 큰 인물은 아니었었는데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정석의 제안 말이냐? 흠, 일단 고민할 가치는 있다고 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일성 반도체잖아?)
가치로 따지면 일성 반도체만 한 게 없기는 했다.
세계 그룹의 양 회장이 나를 아무리 예뻐해도 일성 반도체보다 가치 있는 계열사를 넘겨줄 일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
애초에 그런 계열사가 거의 없기도 했고.
“다만, 이명승 사장이 일성 그룹의 회장이 될 수 있을지가 문제네요.”
후계 경쟁에서 이기는 게 쉬웠다면 나에게 반도체 사업부라는 엄청난 조건을 제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명승이나 유정석이나 후계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그리 높게 보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계열사를 받아내고자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이리라.
(기회는 분명히 있다. 내후년까지 일성 반도체는 한해에 수백억의 손해를 보게 돼. 거의 천억에 가까운 손해를 말이야. 그 때문에 그룹 내부에서도 말이 많을 정도지.)
“반도체 사업을 주도한 게 지금의 일성 부회장이니, 그의 평가도 많이 안 좋아지겠군요.”
(그럴 거다. 일성 회장조차도 부회장을 다시 평가하게 될 거야.)
노사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기회는 있어 보였다.
물론 가능성이 그리 커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볼까?’
반도체 사업부를 먹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일성 그룹의 후계 경쟁에 관여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얻을 게 분명 있을 것이다.
* * *
유정석이 찾아온 뒤로 이호승 쪽에서도 사람을 보냈다.
내가 이명승 사장과 혈연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호승은 유정석처럼 특별한 제안을 하지는 않았다.
‘일성의 후계자와 혈연이 되는 것에 감지덕지하라는 분위기군.’
뭐 사실 그렇게 자신감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호승이 차기 회장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빅 4중 하나인 일성 그룹의 차기 회장과 혈연으로 이어진다면 혜성 그룹으로선 그저 감사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점점 심해지고 있는 다른 그룹의 견제나 외압도 일성 그룹에서 어느 정도 막아줄 수도 있었고 말이다.
‘근데 뭔가 조금 아쉽단 말이지.’
유정석이 반도체 사업부를 조건으로 제시해서 그런지, 우산이 되어주는 정도로는 성에 안 찼다.
확실히 눈이 높아지기는 한 거 같았다.
‘일단 회장이 된 뒤에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자. 어차피 곧 회장직을 물려주실 거 같으니 말이야.’
6월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퇴원하지 않고 있는 이한철 회장이었다.
나를 그만큼 믿고 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결혼에 관해서 조급하게 결정 내리지 않기로 하였다.
이한철 회장이 올해 안에 회장직을 물려주기로 확답을 했으니, 그것부터 기다리는 게 순서였다.
그때였다.
온화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래 기다렸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운철 회장님.”
“영광은 무슨. 제가 더 영광이죠! 하하.”
하운철 회장.
그는 동화 자동차의 주인이었다.
오늘 내가 그를 만난 이유도 동화 자동차 인수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이한성 부회장과 처음으로 만났으니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긴 한데, 자리가 자리인 만큼 본론부터 물을게요.”
“예. 말씀하십시오.”
“우리 회사에 인수 제안을 하셨는데, 진심으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할 생각입니까?”
“물론입니다.”
“그래요? 근데 사실 저는 이게 걱정입니다. 과연 혜성 그룹이 자동차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하 회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이 왜 그걸 걱정해?’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솔직히, 동화 자동차가 남을 걱정할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도 혜성 그룹처럼 잘 나가고 있는 재벌 그룹을 말이다.
“어떤 이유로 저희를 걱정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걱정이 이한성 부회장에게는 우습게 느껴질 거라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몇 년째 자금난을 겪다가 회사를 포기할 처지에 이르렀는데, 남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긴 하죠.”
“절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닙니다.”
“부회장에게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말이죠. 혜성 그룹이 제 회사를 인수한다면 과연 제 회사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동화 자동차의 운명도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닐까. 저는 사실 이게 걱정이에요.”
“한마디로 혜성 그룹의 자동차 사업이 망해서 회장님의 회사인 동화 자동차도 망할까 봐 걱정이시라는 거군요.”
“예. 제 솔직한 심정이 그래요. 혜성 그룹은 아무래도 자동차 산업에 처음으로 진출하는 것이니 우려가 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인수 금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는데, 설마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회사의 창업자라서 그런가? 돈보다는 명예를 더 중요시하는 거 같군.’
하긴, 아무리 경영을 포기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세운 회사가 망하는 꼴은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혜성 그룹은 최근에 백화점과 호텔, 그리고 전자와 주류 등의 신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론의 평가대로라면 혜성의 신사업은 대단히 성공적입니다. 실질적인 매출도 기대 이상이고 말입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던 반도체 산업이 벌써 괄목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백화점이나 주류 쪽은 흑자로 전환했거나, 곧 전환할 예정이었고 말이다.
이렇게 신사업들이 잘 풀리고 있었기에, 나는 자동차 사업도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자금력도 풍부하고 자동차 시장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도 알고 있으니, 자동차 시장에 자리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단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이 될지, 아니면 1, 2, 3위 중의 하나가 될지 그것만이 관심사일 뿐이었다.
“물론 혜성 그룹이 잘 나가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자동차 시장이란 게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에요.”
“혜성의 자금은 풍부합니다. 절대 망할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흠…… 부회장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솔직히 저로서는 혜성 그룹보단 정우 그룹 쪽이 더 믿음이 가요. 그룹의 규모도 규모지만, 아무래도 정우 그룹 쪽은 자동차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동차 회사가 없어서 문제라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니지. 나에게도 곧 자동차 회사가 생기잖아?’
아직 고림 그룹에서 공식적인 제안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사가 말하기를, 고림 그룹에서 곧 중대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중대한 결정이란 바로 고림 자동차를 나에게 넘겨주는 결정일 것이다.
“자동차 계열사가 필요한 이유는 규모와 경험 때문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이유가 크죠. 동화 자동차만으로는 규모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물론 경험도 필수적이고 말이에요.”
“그렇다면 만약, 고림 그룹에서 인수를 제안했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 겁니까?”
“고림 그룹이요? 왜 하필 고림 그룹을……? 뭐, 일단 질문에 대답해 보자면 정우보다 인수가를 높일 경우 고림 그룹도 고려의 대상이겠죠.”
“저희보다 고림 그룹을 더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고림 자동차 때문입니까?”
“그야 그렇죠. 자동차 회사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혜성이 앞서고 있으니 말이에요.”
다행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정우 그룹에 뺏길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좋습니다. 그러면 몇 달만 더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흠. 몇 달 기다린다고 상황이 달라질까요?”
“혜성에서 고림 자동차를 인수한다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예? 고림 자동차를 인수하실 거라고요?”
눈을 끔뻑거리는 하 회장을 보며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동화 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해 고림 자동차를 인수하다니. 뭔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기분이군. 물론 고림 자동차는 처음부터 인수할 계획이었으니 문제 될 건 없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