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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75화 (75/300)

75화 결혼할 때가 됐어

“정말 대단하군요. 우리 혜성 전자가 일성 전자를 비롯하여 일본과 미국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어요.”

“맞습니다! 왜놈과 양키 놈들이 그동안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봤습니까? 규모가 열악하다느니, 기술이 빈약하다느니, 온갖 안 좋은 소리를 하며 우리를 무시하지 않았습니까? 일성 전자에 이어 우리 혜성까지 이걸 생산하게 되었으니 그들도 더는 우리를 무시 못 할 겁니다!”

‘우리’가 혜성 전자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나라를 말하는 건지 아리송하였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동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연구원이 모두 123명이었죠?”

“정확하십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인원까지 합해서 모두 123명입니다!”

“6월 안에 목표 수율에 도달하였으니, 성과금은 최대한으로 드리겠습니다. 인당 3백만 원 이상은 챙기실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 듣기만 해도 좋습니다! 연구원들도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겁니다. 사실 어제 미리 성과금 이야기를 했더니, 회장님과 부회장님 이름을 외치며 만세를 부르지 뭡니까? 하하하!”

그의 말에 픽 웃고는 다시금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64K D램을 바라보았다.

이 조그만 반도체 칩에 1억4천4백만 개의 셀이 집적되어 있었다.

309가지에 이르는 공정 프로세스와 조림, 검사 기술을 거쳐서 완성된 반도체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조회사조차 갖추지 못했던 혜성이었는데…….’

이렇게 뿌듯한 순간은 난생처음인 거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과 일본, 한국을 제외하면 어떤 나라에서도 생산하지 못하는 초고밀도 집적회로 아닌가.

혜성의 입장에서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지.’

엄청난 기술력을 확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만 경영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결코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었다.

D램의 가격은 일성 전자 등 신규 업체의 등장으로 꾸준하게 하락세를 보이는 중이었다.

이미 1.6달러까지 가격이 내려간 상태.

원가가 1.3달러라고 치면 팔아봤자 고작해야 0.3달러밖에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겨우 0.3달러, 그러니까 30센트 이익으로는 흑자를 거두기는커녕 본전을 되찾기도 불가능했다.

심지어 노사는 D램의 가격이 1달러까지 떨어진다고 예견하였다.

그 말은 즉,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손해를 보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64K D램의 자체 생산에 성공했다고 만족할 수만은 없었다.

“연구원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시고 휴식이 끝나면 바로 256K D램을 개발할 준비를 해주세요.”

웃음을 짓던 이재현은 내 말에 웃음기를 지웠다.

“256K D램은 아시다시피, 현존하는 반도체 가운데 집적도가 최고인 제품입니다. 일본 NEC나 후지쓰, 미국 인텔 같은 업체에서만 생산하고 있습니다.”

“못 하겠다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닐 거라 믿습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겨우 이 정도에 겁을 먹었으면, 64K D램을 도전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256K D램을 개발하려면 엄청난 투자가 따라야 한다는 걸 이야기하려던 거였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64K D램을 연구할 때도 많은 투자 자금이 필요했으니, 256K D램은 그보다 더 많이 필요할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나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들어도 처음 구미 공장을 인수했을 때보다 많이 들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물론 그럴 겁니다. 구미 공장을 인수했을 때처럼 5백억가량이 한 번에 들어갈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자금에 대해서는 제가 얼마든지 마련할 것이니, 부대표께서는 연구에만 집중해주십시오. 아, 물론 컴퓨터 사업도 신경을 써야겠지만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우려스러운 게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256K D램을 자체 생산하는 데 성공해도, 그때쯤이면 또 새로운 반도체가 시장을 장악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저희 64K D램도 시기가 많이 늦었지 않습니까?”

다른 나라나 다른 대기업에서 괜히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반도체 산업은 제품의 생명주기가 매우 짧고 기술혁신도 급속하게 진행되는 편이었다.

큰돈을 들여 제품을 개발해봤자 이미 그 제품의 유행은 이미 끝난 상태이니 흑자 전환은커녕 투자 자금을 복구하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이재현도 이런 사례를 들어 256K D램이 자체 생산 준비를 끝내도 이익을 볼 수 있을지를 우려하였다.

“괜찮습니다. 1987년 안에만 자체 생산 준비를 끝마친다면, 시기를 놓치지는 않을 겁니다.”

굳이 1987년을 거론한 이유는 별거 없었다.

1985년부터 미국과 일본 간에 무역 분쟁이 발생하여 그 여파로 두 나라 모두 D램 개발을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최대 반도체 생산 업체인 인텔조차 D램 생산을 포기할 정도니 말 다 했지.’

아무튼, 256K D램을 1987년이 되기 전에만 생산 준비를 끝마쳐 놓는다면 지금까지 투자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수익을 벌 수 있을 것이다.

* * *

혜성 전자에서 64K D램을 개발했다는 소식이 언론에 강타하였다.

일성에 이어 두 번째 성과였고 혜성 그룹은 또다시 재계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요즘 혜성 그룹이 잘 나가는군요. 이 회장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각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말입니다. 허허.”

이한철 회장은 쓰게 웃었다.

덕담이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말을 하는 상대가 대통령의 최측근인 손성수 청와대 재무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각하께서 여러모로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다. 청와대로 가신다면, 대통령 각하께 감사 인사를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그런데 이 회장, 내가 이런 소문을 들었어요.”

“어떤 소문입니까?”

“이 회장이 이대로 은퇴할 거라는 소문이요. 내가 잘못 들은 소문이겠죠? 이 회장은 한창 현역인데 은퇴라니. 허허!”

혜성 그룹은 장안의 화제였다.

그렇다 보니, 차기 회장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는데 이한철 회장이 한성에게 회장직을 물려줄 거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사실 제가 고혈압도 심하고 몸이 많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가 병원 치료를 받을까 생각 중입니다.”

“이 회장이 그렇게 미국으로 가면 혜성 그룹은 어쩌고요?”

“아들에게 회장직을 물려줄 생각입니다.”

“아들이라면 이한성 부회장을 말하는 거죠?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당연히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너무 어리잖아요.”

“나이는 어리긴 한데, 능력은 빼어나다고 자부합니다. 지금도 저 대신 회사를 잘 이끌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한철 회장의 말에 손성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한성의 능력이나 자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한철 회장보다 한성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런데 나는 걱정이에요. 이한성 부회장이 사업 잘하는 거, 나도 알아요.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요? 혈기 넘치는 나이인데, 과연 대관 일도 잘하겠어요?”

걱정하듯 그렇게 묻는 손성수의 저의는 단순했다.

한성이 뇌물을 잘 건네줄지를 묻는 것이었다.

“저도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기는 합니다.”

“당연히 걱정해야죠. 안 그래도 위에 계신 분 중에 혜성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아요. 물론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닌데, 워낙 성의도 부족하고 하니까…… 알죠?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말에 이한철 회장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

병실에 입원한 상태에서조차 뇌물을 적게 낸 일을 따지고 드니, 그로서는 불쾌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차분히 숨을 내쉬며 애써 평정을 잃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무관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거죠? 말해보세요.”

“혹여나 금전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대신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아들놈은 아직 그런 게 미숙해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회장직은 물려주더라도 뇌물은 내가 내겠다.

그러니 한성에게 뇌물을 요구하지 마라.

이한철 회장의 제안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였다.

“이 회장이 대신 성의를 보인다면야 2, 3년 정도는 그냥 지켜봐 줄 수 있죠. 허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혜성 그룹의 규모가 커진 만큼 그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여줬으면 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사업이 잘되고 있으니 뇌물도 더 많이 내라는 말에 이한철 회장은 참담한 심정을 느꼈다.

이럴 때면 종종 회의감을 느끼곤 했다.

회사를 키워봤자 권력자들의 배만 채우는 꼴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 제가 각하께 누를 끼쳤으니, 송구한 마음으로 앞으로는 충분한 성의를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좋아요. 좋아.”

손성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병원에 입원하고서 고분고분하게 바뀐 이한철 회장의 모습에 흡족함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손성수가 함지막한 미소를 지으며 병실을 떠나자, 혼자 남은 이한철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양 회장께는 정말 죄송스러운 마음이야.’

원래는 세계 그룹과 공조해서 정부에 비협조적인 자세로 일관하려고 했었다.

굳이 도움도 주지 않는 정부에게 뇌물까지 뜯겨가며 저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한성에게 회장직을 넘겨준 이후의 일을 생각하니, 정부와의 관계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몇 년간 한성을 지켜보면서 한성이 얼마나 자존심 강하고, 불같은 성격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2년에서 3년 정도의 시간을 벌었으니, 그동안 한성이 최대한 혜성 그룹의 힘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군.’

혜성 그룹이 빅 4에 버금가는 규모가 된다면 정부도 감히 함부로 혜성 그룹을 핍박하지 못할 것이다.

* * *

혜성 건설의 업무까지 총괄하니 워커홀릭인 나조차도 힘에 부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중동 사업의 규모를 줄이고 동남아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부쩍 업무가 늘어난 상태였다.

해외 파트 사장인 안지호가 능력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혼자서 모든 걸 하려고 했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거 같았다.

‘그래도 성과가 하나 있어서 다행이야.’

방글라데시에서 작은 규모지만 수주 공사를 따냈다.

630만 달러짜리 변전 설비의 수주 계약을 따낸 것이다.

중동 외의 지역에서는 첫 번째 수주였고, 미수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무난하게 순항 중이구나.)

혼자서 업무를 보는데 노사가 불쑥 나타나서는 말을 걸었다.

“예. 혜성 주류도 이번에 다쓰야사 사를 통해 백화주를 수출키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규모는 연간 50만 달러입니다.”

(처음 치고 나쁘지 않군.)

“혜성 전자야 말할 것도 없고, 혜성 모직이나 혜성 유통도 잘 되고 있으니, 전체적으로 순항하고 있다 봐도 무방할 거 같습니다.”

나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올 초부터 기대하고 있던 혜성 백화점도 기대에 부응하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던 혜성 전자나 혜성 주류에서도 하나둘,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혜성 출판사 역시도 매출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

마무리 공사 중인 혜성 호텔만 성공적으로 오픈한다면 올 상반기는 완벽하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동차 시장도 마침 비수기니, 자동차 회사들을 인수하는 것도 한결 수월하겠어.)

“안 그래도 하 회장이 95억을 불렀습니다.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5억이나 저렴해진 셈입니다.”

(고림 그룹에는 연락이 없었어?)

“예, 고림 그룹에서는 아직까진 따로 연락이 없었습니다.”

(아마 곧 어떤 식으로든 연락이 올 거다. 그 사이 고림 그룹의 사정이 더 안 좋아졌거든.)

“그거 참 희소식이군요.”

(만약에 고림에서 고림 자동차를 받아낸다면, 그 뒤로 바로 혼인부터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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