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내 사람으로 만들던가 해야지
모처럼 개최한 청와대 만찬회.
재벌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대한 전대환은 하나의 계획을 세웠다.
이번 만찬회를 통해 재벌 총수들, 그중에서 기부금을 적게 내는 일부 재벌들에게 따끔한 교훈을 내리기로 말이다.
‘세계 그룹의 양 회장과 혜성 그룹의 이 회장. 이 두 놈에게는 확실하게 가르침을 내려줘야겠어.’
전대환은 뇌물도 가장 적게 주고, 심지어 그 뇌물조차 어음으로 내는 두 기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중에 혜성 그룹의 경우는 고분고분 말 잘 따르는 고림 그룹을 괴롭히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고림 그룹이 지금까지 보여준 성의를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
하여 전대환은 만찬회 자리에서 혜성 그룹의 이한철 회장을 크게 혼내려고 했었다.
‘아니, 몇 마디 했다고 쓰러지면 어떻게 해?’
전대환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기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이한철 회장과 양익수 회장을 바라보며 협박조로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세계 그룹이든, 혜성 그룹이든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식의 협박을 말이다.
좌중이 쥐 죽은 듯 조용해지며 재벌 총수들의 얼굴에 공포심이 떠올랐을 때만 해도 전대환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때 뜬금없이 혜성 그룹의 이한철 회장이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헉!”
“이 회장! 정신 차려요. 이 회장!”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광경을 보면서 전대환은 아찔함을 느꼈다.
만약 만찬회 자리에서 이한철 회장이 죽기라도 한다면?
당장 내일부터 모든 신문사의 1면에 이한철 회장이 병원에 실려 가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기재될 것이다.
그리고 이한철 회장이 쓰러진 이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보도가 되겠지.
엠바고를 쳐도 소용이 없었다.
설령 국민들은 모른다 해도 재계에는 소문이 짝 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주치의를 불러와!”
전대환은 다급하게 호통쳤다.
‘반드시 살려야 한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좋지만, 진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것도 그 죽는 사람이 재벌 총수라면?
1980년 때만큼이나 정권의 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 * *
이한철 회장이 쓰러졌다니!
나는 다급하게 상심 병원으로 달려갔다.
(분명 얼마 전까지 멀쩡하셨는데, 왜 갑자기 쓰러지신 거지? 전대환,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한 건가.)
노사도 그답지 않게 초조한 분위기였다.
나와 다르게 이한철 회장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노사였다.
그러니 걱정되는 마음이 클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나라고 태연하지만은 않았다.
노사처럼 아버지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한철 회장을 든든한 조력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디 무사하셨으면…….’
내가 그렇게 초조해하며 이한철 회장이 입원한 병실에 달려가니, 병실에서 의외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빨리 왔구나.”
이한철 회장.
청와대에서 갑자기 쓰러졌다는 그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으니 이한철 회장이 피식 웃었다.
“염려 마라. 아픈 척 연기하고 있는 거다.”
“예?”
나는 어리둥절하였다.
쓰러진 게 연기였다고?
“뭐, 연기였다고 해도 쓰러진 거 자체는 사실이다. 요즘 과로를 했더니, 몸이 허해졌더구나.”
“……건강도 안 좋으신데 왜 과로를 하셨습니까.”
“아쉬움 때문이겠지. 왕국을 다스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렇게 말하는 이한철 회장이지만, 얼굴에는 후련함이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장직을 물려주는 거지만, 그에 대해 후회는 없는 거 같았다.
“그래도 일이 이렇게 된 게 오히려 잘된 일인 거 같다. 대통령 앞에서 쓰러졌으니, 대통령도 당분간은 우리 그룹을 건들지 않을 거야. 아무리 대통령이 무식하다 해도 여론을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까.”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우리는 사업가 아니냐. 나 하나의 건강보다 그룹의 생사가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모습은 역시 변함이 없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노사와 완전히 똑 닮았군.’
제삼자가 봤을 때 나의 모습도 저러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한철 회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던 겁니까?”
“대통령이 술에 취해서는 작정하고 우리를 비난하더구나. 언제든 우리 그룹을 망가뜨릴 수 있다고 하던데, 괜히 하는 말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 말을 들으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가 뭔데 우리 그룹을 협박해?’
수출도 조금씩 늘리고 있었으니 응원해줘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데 틈만 나면 뇌물을 뜯어가고 이제는 그룹을 망가뜨리겠다는 망언까지 해가며 협박을 하고 있었다.
전대환이란 사람은 도저히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는 거 같았다.
“아무튼, 나는 대통령 때문에라도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어야 할 거 같다.”
“언제쯤 퇴원하시려고요?”
“적어도 한 달은 있어야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 달 동안 네가 나 대신 회사를 이끌어야겠다. 뭐 어차피 곧 회장직까지 물려줄 거지만 말이다.”
일종의 회장 직무 대행이 되라는 건가?
‘예전 같았으면 즐거웠을 텐데, 지금은 썩 즐겁지가 않네.’
이런 식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회장이 됐을 일이었다.
그러니 기쁘기보단 당혹스럽게만 느껴졌다.
“조금 갑작스럽군요.”
“나라고 청와대에서 쓰러질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그래도 너라면 회사를 잘 이끌 수 있을 거다. 건설 임원들도 이제 네 말이면 곧잘 따르지 않느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혹스럽긴 해도, 나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부회장으로서 내가 하는 업무량도 이한철 회장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회사는 제가 잘 이끌어나가겠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시험 무대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실수를 저지른다고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실수를 저지른다면 좋을 게 없었다.
이한철 회장의 믿음이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회장직을 물려주고 난 이후에도 마치 태종처럼 상왕 행세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무사하셔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노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사는 얼굴에 노기를 띠며 말했다.
(이번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아버지는 과로로 쓰러진 거라고 하셨지만, 전대갈 그놈만 아니었으면 아버지가 쓰러질 일도 없었어.)
“그렇긴 합니다.”
(너는 반드시 한국 권력의 정점이 되어서 전대갈에게 복수를 해줘야 한다. 알겠느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계획대로만 흘러간다면 늦어도 90년대에는 복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 멀리서 비서실장 진봉현이 다가왔다.
“회장님과는 이야기를 잘 나누셨습니까?”
“예.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시더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건강이 안 좋으셔서 걱정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다른 이야기는 안 하셨습니까?”
“저보고 회장 직무 대행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내 말에 진봉현은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회장님의 부재가 걱정스러웠는데, 부회장님이 나서주신다면 걱정을 덜어도 될 거 같습니다.”
“비서실장님이 많이 도와주세요. 저 혼자서는 아무래도 힘듭니다.”
“안 그래도 회장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부회장님을 잘 보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 부회장님께서는 부담 가지지 마시고 언제든지 저를 불러주십시오.”
진봉현이 그리 말하자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비서실장은 회장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사실상 그룹의 이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나를 인정하지 않고 자존심을 세울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진봉현은 그런 성격이 아닌 듯싶었다.
‘하긴, 처음 봤을 때부터 나에게 도련님이라 부르며 잘 대해줬었지.’
원래 내 계획은 회장이 되면 비서실장 자리에 신은규나 혜성 유통의 김한선을 임명하는 거였는데, 진봉현의 성격을 보니 비서실장으로 유임시켜도 될 거 같았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니 곳곳에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부회장님께서 임직원들의 분위기를 다잡아 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진봉현의 말에 나는 즉각 대답했다.
“임원들을 회의실로 불러와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혜성 건설 임원들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당혹해하고 있군.’
회장이 갑자기 쓰러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특히 대통령에게 찍혔다는 이상한 소문까지 퍼지면서 임원들뿐만이 아니라 직원들까지도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이니, 국내 파트의 임원들이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물론 해외 파트라고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그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간단히 목 인사를 하였다.
“부회장님, 회장님께서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십니다.”
사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멀쩡하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지금은 동정 여론을 일으켜야 할 시점이었기에, 굳이 멀쩡하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다행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임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해외 파트 사장 안지호가 불쑥 물었다.
“그러면 회장님은 언제쯤 퇴원을 하십니까?”
“당장은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셔야 할 거 같습니다.”
“하, 한 달씩이나 말씀입니까?”
“허어!”
한 달.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회장이 한 달 동안 부재한 것은 꽤 심각한 일이었다.
“회장님께서는 지도력의 부재를 걱정하셔서, 저에게 직무 대행을 맡기셨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표정들을 보니 하나같이 당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아무리 내가 혜성 그룹의 후계자라 해도 다른 연륜 있는 임원들을 제치고 회장 직무 대행을 한다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몇몇은 내 말의 진의를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회장님께서 정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안 사장. 회장님의 비서실장인 제가 보증할 테니, 괜한 의심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진봉현이 그렇게 말하니 의심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은 사라졌다.
그때, 김명운 사장이 기운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부회장님이라면 누구보다 저희를 잘 이끌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김명운 사장이 나서자 다른 임원들도 눈치를 보다 한 명씩 나섰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한성 부회장님이 어떤 분입니까? 혜성 모직을 부활시키고, 혜성의 자산을 두 배 가까이 늘리신 분 아닙니까. 그 누구보다 직무 대행의 역할을 잘 수행하실 겁니다.”
“이한성 부회장님이 지휘봉을 드셨으니, 혜성 건설의 앞날은 그 어느 때보다 밝을 거 같습니다. 하하하!”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회장 직무 대행을 수행할 때 거의 유일하게 거쳐야 할 난관이 바로 혜성 건설 임원들이었다.
직원들이나, 다른 계열사 임원들은 문제 될 게 없었다.
오직 혜성 건설의 임원들만이 내 지시에 따라주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김명운 사장이 앞장서서 나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임원 대부분이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심지어 해외 파트 임원들도 안지호의 눈치를 살피며 나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을 정도였다.
‘안지호 사장도 이참에 확실하게 내 사람으로 만들던가 해야겠어.’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배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