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69화 (69/300)

69화 이게 웬 떡이야

이틀이 지나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신문부터 읽었다.

그런데 오늘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기사가 보도되어 있었다.

<고림 산업, 서울랜드 기부 체납 시기 놓고 실랑이.>

<서울랜드, 서울시가 직접 건설하나?>

민성준 회장이 크게 기대를 걸고 있는 사업이 바로 서울랜드였다.

무려 천억이 넘는 돈을 투자할 정도였는데, 기사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업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공사를 미루며 괜히 뻗대다가 된통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게 돈이 없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나는 조소를 흘렸다.

고림 그룹의 원래 계획이야, 일단 착공식부터 한 뒤에 서울시와 재협상을 해서 기부금의 규모를 줄이거나, 일정 기간 서울랜드의 소유권을 가지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착공식을 했으니 아무도 서울랜드를 노리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며 말이다.

하지만 고림 그룹은 나란 존재를 예상 못 했다.

설마 불문율을 깨고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할 사람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근데 이러다 진짜 서울랜드를 포기하는 거 아니야?’

민성준 회장이 언론에 밝혔던 이야기를 생각하면 웬만해서는 포기하지 않을 거 같기는 했다.

서울랜드를 차기 먹거리 사업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고림 그룹의 자금 사정은 더욱더 악화하고 있었다.

내가 찌라시를 통해 이런저런 안 좋은 소문들을 퍼뜨리니, 대출을 받기가 어려워졌던 것이다.

‘뭐 포기하면 그것도 나쁘진 않지. 진짜 우리가 건설해도 되는 일이니까.’

그렇게 신문을 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 때, 양기현이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형님, 도대체 가친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신 겁니까?”

비서들 때문인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픽 웃었다.

“왜 그러는데?”

“가친께서 갑자기 신사업을 포기하신답니다.”

“이번에 진출한다는 식품 사업이랑 호텔 사업을 말하는 거야?”

“예! 형님과 만나고 나서 바로 그런 말씀을 하시던데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신사업을 포기한다니.

설마 내 말을 듣고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인가?

‘엄청난 결단력이군. 이제 겨우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말이야.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양인정 씨와의 관계도 다시 고민해 봐야 하나?’

내가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할 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따르릉!

“여보세요?”

-한성이 자네 맞는가? 나 양익수일세.

“양익수 회장님. 어떻게 아침부터 전화를 주셨습니까?”

내 입에서 자기 아버지 이름이 나오자 양기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나는 손을 흔들어서 그를 쫓아냈다.

아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양기현은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자네의 말을 듣고 생각을 참 많이 했네.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지금이 과연 위기 상황이 맞는가. 그리고 위기 상황이 맞다면,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뭐 이런 생각들이었네.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양기현이 세계 그룹의 사업 축소를 거론한 것을 보면, 내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하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 자네의 말처럼, 세계 그룹은 매우 위태위태한 상황이네. 내부에서부터 곪아가고 있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양 회장이 그룹의 위기를 인지한 것.

그것만으로도 세계 그룹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었다.

-만약 자네가 나를 일깨워 주지 않았다면 차입 경영에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하다 한계에 직면했겠지.

“주제넘은 소리를 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야. 솔직히 자네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기분이 상하기는 했네만, 그것은 잠깐뿐이네. 미래를 내다보는 자네의 혜안을 생각하니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겠더군.

“제가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아무튼, 말이 길어졌으니 결론만 말하지. 나는 자네가 해준 말을 적극적으로 따르기로 결정했네. 무리한 사업 확장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자고 말일세.

“현명하신 결단입니다.”

-아까 사위들에게도 따끔하게 한마디 했으니, 그놈들도 부채를 늘리는 짓은 그만둘 거 같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양 회장 사위들은 하나같이 전문 경영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능력이 출중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능력이 출중한 만큼 사업 욕심도 크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사업을 확장해 갔고, 그 때문에 세계 그룹의 부채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이제라도 그들을 자제시켰다고 하니 다행이군.’

세계 그룹에서 양 회장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양 회장은 본인의 사위들을 아들 대하듯 대하였다.

양기현을 대하는 것처럼 엄격하게 대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양 회장의 사위들도 앞으로는 차입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을 조금씩 자제하게 될 거 같았다.

-다만 한 가지, 대통령에게 고개 숙이는 짓만큼은 절대 할 생각이 없네. 박 대통령이라면 모를까, 전대환 그놈에게 아부 떠는 짓은 절대 못 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양 회장이 괜한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었기에 뭐라 할 수는 없었다.

‘4년, 아니 실질적으로는 3년밖에 안 남은 시한부 권력인데 필요 이상 가까워질 필요는 없지. 괜히 나중에 5공 청문회에서 수모를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야.’

물론 차기 정권이 문제이긴 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나 다를 게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 알고 있었다.

1988년.

다른 재벌들이 눈치 보기 바쁠 때, 차기 대통령이 될 사람에게 일찌감치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준다면 향후 5년 동안 문제 생길 일은 없을 거 같았다.

“양 회장님의 뜻대로 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가 날 좀 도와주게. 혜성 그룹도 정부와 관계가 안 좋지 않은가?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하는 관계일세.

나는 흔쾌히 대답하였다.

“물론입니다.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세계 그룹과 힘을 합치면 군부 정권도 크게 두렵지 않았다.

원래의 혜성도 1986년까지 버텼는데, 나는 당연히 그보다 더 버티지 않겠는가.

-그럼 인정이와 결혼을 해서 아예 혼인 동맹을 하는 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흠흠! 내가 너무 앞서나갔군.

기회가 생겼다 하면 결혼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았다.

양 회장은 나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었다.

-그런데 자네, 현금이 많다고 했었지?

“예. 그동안 많이 쓰긴 했는데, 아직도 꽤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혹시 땅에 관해 관심이 있나?

“부동산 말씀입니까?”

-내가 가진 땅이 좀 많네. 부산에도 많고, 서울에도 알짜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 그런데 워낙 빚이 많다 보니까, 이번에 그 땅과 건물들을 조금 정리할까 해.

놀라웠다.

원래 재벌 회장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갖고 있는 게 땅 욕심이었다.

이한철 회장 역시 부동산으로 재벌이 되어서 그런지 땅 욕심이 상당한 편이었고.

그렇다 보니 부동산을 정리하려는 양 회장의 결정이 나로선 놀랍게만 느껴졌다.

“제 현금을 물으신 걸 보니, 회장님께서 갖고 계신 부동산들을 저에게 파시려는 겁니까?”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지 않았는가? 내 자네에게만큼은 싸게 줄 수 있네.

“정말입니까!?”

나는 놀라서 큰 소리로 물었다.

안 그래도 투자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양 회장이 부동산을 저렴하게 팔아준다면 나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자네도 어지간히 땅을 좋아하나 보군.

“땅을 싫어하는 한국인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땅이 좋으면 인정이를 데려가지 그러나? 그럼 내가 혼수 겸 예단 삼아 알짜 건물들을 챙겨주겠네.

“…….”

-내가 또 주책을 부렸구먼. 아무튼, 땅을 갖고 싶어 하는 거 같으니 내가 비서를 보내겠네. 며칠 고민해 보고 어떤 땅을 사고 싶은지 알려주게.

“예! 감사합니다.”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세계 그룹을 도우려는 행동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과연 어떤 땅을 가지고 계실까?’

양 회장 정도면 알짜 중의 알짜를 가지고 있을 터.

여러모로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양익수 회장이 급매하려는 부동산 목록이냐?)

한성 주택 사무실에서 양 회장의 비서가 건네준 수첩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노사가 불쑥 나타나 물었다.

“아, 맞습니다.”

(청량리라. 이건 별로구나. 오, 신반포? 건물을 살펴봐야겠지만 위치는 나쁘지 않아.)

“이건 어떻습니까?”

(흠. 청담동이면 손해 볼 일은 없겠지. 그 아래에 있는 서초동 건물도 마찬가지고.)

“여기 잠실도 있는데, 잠실은 무조건 챙기는 게 좋겠죠?”

(챙기면 좋지. 앞으로 오를 땅값도 땅값이지만, 샤롯에게 잠실을 빼앗겨서야 되겠어?)

여자들이 백화점을 갈 때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노사와 함께 매물들을 고르고 있으니, 괜히 신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걸 다 매입하면 11월에 거하 자동차 인수할 자금이 부족하겠는데요?”

갖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래도 노사와 상의 끝에 알짜만 남겨뒀는데, 그 알짜들조차도 가격이 상당하였다.

무려 5백억이 넘는 돈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근데 놓치긴 아쉬워.’

양 회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매물들을 싸게 팔아준다더니, 정말로 시세보다 30% 가까이 낮은 가격을 제시하였다.

물론 그 대신 현금을 일시불로 지급하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말이다.

‘몇 년만 지나도 5백억이 네 배 이상 늘어날 거야.’

올해에는 수익률을 높일 기회가 마땅치 않았는데 이건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확실히 돈이 부족하긴 하군.)

“예. 여기 적혀 있는 매물들을 매입하려면 추가로 대출을 받던가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잠실에 백화점도 세워야 하니, 아예 5백억 정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어차피 그동안 자산이 늘기도 했고 말이야.)

“백화점이요? 잠실 백화점은 내년에 짓는 거 아니었습니까?”

(샤롯에서 선수 치기 전에 백화점을 세워야 한다. 지금 한창 돈을 모아서 잠실에 이것저것 지을 준비를 하고 있거든.)

“또 어디서 돈을 모았답니까?”

(어디긴 어디야. 일본에서 모았지.)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귀찮게 구는 샤롯이었다.

‘노사의 말대로 잠실에 백화점을 세우긴 세워야 할 거 같은데…… 돈이 문제네.’

물론 내 돈은 여전히 많았다.

이한철 회장이 물려준 혜성 그룹 계열사들의 지분들부터,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일성 전자의 지분이나 혜성 건설의 지분 등.

일단 지분 가치만 따져도 5백억이 넘었다.

더군다나 한성 주택이 보유한 부동산의 가치는 거의 천억에 가까웠다.

하지만 현금이 거의 떨어져 간다는 게 문제였다.

은행에서 빌린 돈을 포함해 현재 남아 있는 현금은 고작 6백억.

양 회장이 처분하는 매물을 매입하면 백억밖에 안 남는다.

혜성 주류나 혜성 호텔, 그리고 잠실에 세워질 혜성 백화점까지 앞으로 현금이 필요한 일은 수두룩했기에 백억이란 돈이 턱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샤롯의 신진호 회장이 부럽군요. 일본에 자금줄이 있어서 언제든지 돈을 융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자금줄은 우리에게도 있잖아.)

“조흔 은행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조흔 은행과 아무리 관계가 좋다고 해도 이 이상 은행 빚을 늘려 봐야 좋을 게 없지. 지금 빚지고 있는 5백억도 언제 회수할지 모르니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돈을 빌립니까?”

(황인범 회장에게 빌리면 되지 않느냐.)

황 노인이라.

그러고 보면 양 회장 이상으로 나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황 노인이었다.

‘한번 연락을 해 봐야겠군.’

운이 좋아서 돈을 저리로 빌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거 같았다.

나는 바로 황 노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끌끌. 알겠네. 그날 보기로 하지.

전화상으로 돈 빌려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약속을 잡았더니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이번에는 뭐라고 말하면서 돈을 빌려야 할까. 그동안 도운 게 많으니 담보만 주고 빌려 달라고 할까?’

황 노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의 돈을 빌릴지 생각하는데 갑자기 사무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입니까?”

“방준호 회장이 찾아왔습니다.”

인정민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준호 회장이라면 명동 큰손 4인방 중의 한 명인 그 사람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 사람.”

“그 사람이 왜 저를 찾아왔답니까?”

“저도 그건 모르겠는데, 만나실 거라면 지금 바로 불러오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바깥이 시끄러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그 사람 성격이 꽤 급합니다.”

나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불러와 주세요.”

황 노인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같은 4인방으로 불리는 사람이니 만나서 손해 볼 것은 없을 거 같았다.

‘설마 인제 와서 복수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실제로 얼굴을 맞댄 적은 없었지만, 한율 그룹과 관련해서 한 번 마찰이 생긴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그 뒤로 별다른 일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사무실을 찾아오니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