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68화 (68/300)

68화 내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을걸?

1985년 1월.

재계 순위 7위인 세계 그룹은 순식간에 해체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지금이 1984년 4월이니, 세계 그룹이 몰락하기까지 불과 반년 조금 넘게 남은 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혜성 그룹에 있어 최선은 세계 그룹이 무너지지 않게 막는 거야.’

원래 역사처럼 세계 그룹이 무너진다고 해서 혜성 그룹까지 무너지리란 법은 없었다.

지금의 혜성 그룹은 원 역사의 혜성 그룹과 달리 재정 상태가 탄탄했으니까.

하지만 세계 그룹과 혜성 그룹이 순망치한의 관계인 것은 분명했다.

세계 그룹이 무너진다면 우리는 혼자서 정부를 상대해야 할 터.

그렇기에 나는 세계 그룹에 힘을 보태 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몇 가지 조언을 해서 세계 그룹이 해체되는 것을 막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다만 세계 그룹 회장님이 고집을 피우신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지.’

양 회장이 나의 조언을 듣지 않는다면?

그걸로 세계 그룹과의 인연은 끝이었다.

괜히 세계 그룹과 세트로 묶여서 대통령의 진노를 사느니, 그 전에 손절하는 게 나았다.

“형님이 참 부럽습니다.”

양기현이 불쑥 그같이 말했다.

“갑자기 내가 왜 부러워?”

언제나 존경한다는 소리만 하던 양기현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니 나로선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늘 형님 이야기만 하십니다. 어떨 때 보면 형님이 아버지의 아들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설마 그러려고. 그냥 엄격하신 분이라서 그렇게 말씀하는 거지, 실제로는 너를 더 높이 평가하실 거야.”

“아닙니다. 아버지는 형님을 칭찬할 때만큼은 늘 진심이십니다. 본인조차 배울 게 많다고 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래?”

“예. 그리고 제가 형님을 부러워하면서 존경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세계 그룹의 장남인 네가 남을 뭘 그렇게 부러워해?”

내가 황당하다는 듯 그리 말하자, 양기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저는 오직 형님만 부럽습니다.”

“그러냐. 그래서 뭐가 또 부럽다는 건데?”

“형님의 인기! 저는 그게 너무 부럽습니다!”

“인기? 내가 무슨 인기가 있다고 그래? 아, 인정 씨를 말하는 거야?”

“제 동생도 제 동생이지만, 요즘 재벌 2세 사이에서 형님 이야기가 많이 나돌고 있습니다. 형님이 최고의 신랑감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제가 아는 여자애들도 다 형님 이야기만 합니다.”

최고의 신랑감이라니.

나는 그저 일밖에 모르는 냉정한 사업가인데…….

‘하긴 내 재산이 재산이니 그것만으로도 일등 신랑감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게 없겠어.’

혜성 그룹의 후계자인데다 개인 재산은 억 소리 나게 많았다.

재계에서 최고의 신랑감이니 뭐니 그런 소리를 듣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형님. 소문에는 홍나영 씨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뭐? 내가 누구랑 결혼을 약속했다고?”

“홍나영 씨요. 왜 그, 일성 부회장의 처조카 있잖습니까.”

양기현의 말에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 무슨 결혼을 약속했다는 거야.”

“아니었습니까? 제가 다니는 모임에서는 거의 정설처럼 굳어진 소문인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유지은이라면 모를까, 만나본 적도 없는 상대와 그런 소문이 퍼지다니.

‘설마 일성 쪽에서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린 걸까?’

갑자기 재계에 그런 소문이 퍼진 게 수상했다.

어쩌면 일성 쪽에서 수작을 부린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뭐가 됐건 슬슬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긴 해야겠네.’

* * *

4월 7일.

차를 타고 성북동으로 가는 길에 거리에서 특이한 장면을 보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피켓을 든 채 조용히 행진하는 모습이었다.

“오늘 데모가 있나 보군요.”

내가 작게 중얼거리듯 말하니, 운전기사 겸 경호원을 맡은 김지태가 혀를 찼다.

“쯧! 부모가 고생해서 대학을 보내줬으면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

“신문을 보니까, 지구상에서 학생이 데모하는 나라들은 후진국밖에 없답니다. 우리나라도 저런 데모 문화를 없애지 않으면 영원히 후진국으로 남을 겁니다.”

직업군 출신이라서 그런지 역시 데모에 대해 부정적인 거 같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광화문으로 향하는 시위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민 여러분, 질서를 지킵시다!”

“질서! 질서!”

언론에선 시위대가 쓸데없이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보도를 하고는 한다.

상가에 돌을 던져 창문을 깨뜨렸다거나, 경찰들에게 상해를 입혔다던가.

사실 나 역시 그런 내용의 신문들을 보면 시위대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거리를 오가는 시위대의 모습은 매우 차분하였다.

질서를 외치는 몇 사람 빼고는 그저 피켓을 든 채 조용히 걸을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처럼 시위대가 폭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시위대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서 빨리 데모 없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군.’

데모 없는, 아니, 데모할 필요가 없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차는 어느덧 성북동의 양 회장 저택에 도착하였다.

“어서 오시게! 자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네.”

아들에게는 깐깐하기 그지없는 양 회장이 나에게는 팔을 벌리면서까지 격한 환영을 해주었다.

‘황 노인도 그렇고, 양 회장도 그렇고 나는 참 어른들에게 귀염을 받는 거 같군.’

양기현이 나보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부럽다고 했는데, 그건 틀린 소리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자들이 아니라 어른들, 그것도 60대 이상의 어른들이었다.

“강녕하셨습니까.”

“암! 강녕했지. 내 속을 그렇게나 썩이던 기현이 놈을 자네가 사람 구실 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제가 한 게 뭐 있겠습니까.”

“자네는 참 겸손하네. 또 진중하고 언행에 무게감이 있지. 그래서 정말 보기가 좋아.”

“하하…… 감사합니다.”

도대체 뭘 보고 저렇게 나를 좋아해 주는지 모르겠다.

양기현에게도 따로 해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자네는 결혼을 언제 할 생각인가?”

갑자기 훅 들어오네.

나는 양 회장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였다.

“글쎄요. 저도 때가 되면 결혼하지 않겠습니까?”

“이 회장님의 말씀이 사실인가 보군. 혼사에 관한 결정권은 자네에게 있는 거 같아.”

“그야 제 결혼이지 않습니까?”

“흠…….”

양 회장은 턱 끝을 쓰다듬더니 불쑥 말했다.

“그럼 내 딸아이는 어떤가?”

“예?”

“혼인 상대로 어떠냐는 말일세.”

설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이야.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솔직하게 답변하기로 하였다.

“저는 한 번도 인정 씨를 제 결혼 상대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왜? 자네가 보기엔 내 딸아이가 별로 안 예쁜가 보지?”

“예쁩니다. 성격도 좋고요.”

“그런데 왜 우리 딸아이를 혼인 상대로 고려하지 않는 건가?”

“결혼해서 얻을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양 회장이 눈을 치켜떴다.

“무슨 말인가? 얻을 게 없다니? 설마 자네는 내가 사위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로 생각하나? 만약 그런 거라면 나를 너무 야박한 사람으로 본 걸세.”

“양 회장님을 야박한 사람으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세계 그룹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인정 씨를 따로 챙겨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우리 그룹의 사정이 뭐 어떻다고?”

나를 보면 항상 미소를 짓던 양 회장이 처음으로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자신이 만든 그룹을 새파란 애송이가 무시하고 있는 셈이니, 분노할 만도 했다.

“기분 나쁘게 들리셨으면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양 회장님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했을 뿐입니다.”

“어쨌든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거군?”

“예.”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양 회장은 애써 노여움을 참아 삼키며 물었다.

“제가 알기로 세계 그룹의 부채 비율이 800%를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우리 그룹의 부채 비율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네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설마 부채가 많다는 이유로 우리 그룹이 망할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사업 규모를 줄이고 부채 비율을 낮추지 않는다면 세계 그룹의 장래는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겁니다.”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군. 다른 재벌 그룹이라고 부채 비율이 낮은 줄 아나? 자산은 천억이 안 되는데 부채는 조 단위인 재벌 그룹도 수두룩하네. 부채 비율로 따지면 그들은 진작에 1,000%를 넘은 셈이지.”

“하지만 그들은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설령 대통령과 관계가 없는 그룹일지라도, 정부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습니다. 반면 세계 그룹은 어떻습니까?”

“…….”

나의 직설적인 한마디에 양 회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3김처럼 5공의 총애를 받는 재벌 그룹은 자금 경색이 올 경우,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것이다.

그냥 돈을 빌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10년에서 20년 분할 상환이라는 혜택까지 주고서 지원해 줄 터.

반면에 세계 그룹은?

정부에서 지켜주기는커녕 이때다 하고 세계 그룹을 괴롭힐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세계 그룹이 무너지는 과정도 은행에서 대출해 주지 않아서였다.

이때 세계 그룹이 빌리려고 했던 돈은 겨우 2천억.

세계 그룹 같은 굴지의 대기업이 2천억을 빌리지 못해서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정작 위기에 처한 세계 그룹에는 돈을 빌려주지 않았으면서, 세계 그룹을 인수하려는 기업들엔 6천억이나 빌려줬다는 사실이었다.

“세계 그룹은 정부의 미움을 샀으니, 자금 경색이 올 경우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무너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럴 리는 없다. 대통령이 아무리 나를 싫어해도 세계 그룹이 무너지게 가만 놔둘 거 같으냐? 내년이 총선이야. 우리 그룹이 무너지면 부산의 표심은 포기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양 회장의 말도 분명 일리는 있었다.

상식적으로 정부가 직접 나서서 세계 그룹을 무너뜨리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한 해 매출만 1조가 넘는 대기업이 바로 세계 그룹이었다.

종업원 수도 무려 4만 명이나 됐다.

민심을 잡고자 경제 안정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는 지금 정권에서 세계 그룹을 해체하는 건 악수 중의 악수였다.

‘하지만 사람이 언제나 이성적이지는 않지.’

나도 대통령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추측하기로는, 세계 그룹을 본보기로 삼아 재벌 총수들의 뇌물을 더 뜯어내려는 수작일 거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세계 그룹이 해체되는 것은 곧 벌어질 현실이었다.

“애초에 혜성 그룹의 후계자인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어이가 없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반도체도 그렇고, 백화점이나 호텔도 그렇고 근 1년 사이에 사업을 그리도 넓힌 혜성에서 우리 그룹 보고 위기라는 소리를 하다니. 나는 너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희는 빚을 지고 사업을 넓히는 게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올해 인수한 기업들도 제 사재를 털어서 인수한 겁니다.”

나는 부채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룹의 자산을 늘리는 식으로 부채 비율을 낮추고 있었다.

아마 혜성 전자나 혜성 주류, 혜성 호텔 등이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면, 자연스럽게 그룹의 부채 비율도 낮아지게 될 것이다.

“끄응! 소문은 들었지만, 네 현금이 그리도 많았단 말이냐? 대출을 받지 않고도 여러 개의 기업을 한 번에 인수할 수 있을 정도로?”

“예. 정확히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문보다 액수가 컸으면 컸지 절대 작지는 않을 겁니다.”

“허어.”

양 회장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른다.

내가 소문을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축소되었다고 말하니 그로선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제가 한 말을 너무 고깝게 듣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양 회장님을 걱정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나는 변명하듯 그같이 말했다.

나야 미래를 아니 그렇게 말한 거지만, 뭐가 됐건 양 회장 앞에서 세계 그룹의 몰락을 운운한 것은 무례하면서도 주제넘은 행동이었다.

재계에 안 좋은 소문이 퍼져도 이상할 게 없는 행동인 것.

하지만 양 회장은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만약에 말이다.”

“예?”

“자네의 말대로 사업 규모도 줄이고 리스크도 최대한 관리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때는 우리 딸아이를 다시 한번 생각해 줄 수 있겠나?”

“……진지하게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양 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결심을 한 거 같은 얼굴이었다.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지…….’

이 시대의 대기업 총수들에게 있어 사업 확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기업들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규모를 키워 가는데 자기만 정체할 경우, 그건 정체가 아닌 퇴보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양 회장이 사업 확장을 자제할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세계 그룹은 한창 규모를 키워가며 빅 4를 위협하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에 내 말을 듣고 무언가를 느꼈다면?

대통령을 한층 더 경계하게 되었다면 어떨까.

어쩌면 지금부터라도 부채 비율을 줄이기 위해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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