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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67화 (67/300)

67화 결정지을 때도 됐지

“한 달. 딱 한 달만 시간을 주신다면, 조립 작업과 검사 작업을 자체 기술로 처리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정말 한 달이면 됩니까?”

“예! 연구원들이 한창 3천 개의 64K D램 칩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벨 연구소에서 보내준 자료도 있으니, 한 달이면 64K D램의 분석 작업을 끝마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이재현 부대표의 자신감 넘치는 답변을 듣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빠르군. 이 정도면 올해 안에 256K D램 개발을 시작할 수 있겠는데?’

1월부터 미국의 벨 연구소와 계약을 맺어, 반도체 생산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연구원도 백 명이나 뽑아서 반도체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진척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핵심 제조 공정 기술이야 아직 어림도 없었지만, 반도체를 조립하고 검사하는 작업까진 자체 기술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말 잘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반드시 올해 안에 모든 공정을 개발해서 칩의 생산부터 조립, 검사 과정을 모두 자체 기술로 할 수 있게끔 노력해 주십시오.”

“노력하겠습니다!”

“시간을 앞당기면 앞당길수록 포상이 는다는 걸 연구원들에게 확실히 알려주세요. 상반기 안에 일괄 생산까지 끝마친다면, 연구원 개개인에게 3백만 원 이상의 포상을 약속하겠습니다.”

경영지원팀 직원들은 혜성 전자에 투자하는 비용이 너무 크다며, 인건비라도 줄이자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후발 주자로서 일성 전자를 쫓아가려면 인재를 한 명이라도 늘려야 할 때였다.

그리고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선 후한 대접을 해줘야 했고 그 후한 대접이 바로 월급과 성과급이었다.

‘빅 4가 모두 반도체 산업에 진출한 상황에서 재계 순위가 한참 밀리는 우리 그룹이 그들과의 인재 경쟁에서 이기려면 돈지랄을 하는 수밖에 없지.’

돈지랄이라면 자신 있었다.

작년 한 해에만 내가 벌어들인 수익이 얼마던가.

계산해보면 거의 천억에 가까웠다.

물론 올해의 수익은 작년보다 못할 것이다.

올해는 주식에 크게 영향을 끼칠 만한 사건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년은 다르다.

내년부터 일본의 지가는 미친 듯이 폭등을 거듭할 터.

그때는 정말 억 소리 나는 돈을 벌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진 자산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인건비를 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3백만 원이요? 히유~! 연구원들의 사기가 아주 높아질 거 같습니다!”

“꼭 상반기가 아니어도 포상은 줄 것이니,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주세요.”

“물론입니다. 하하! 반드시 올해 안에 결실을 내보겠습니다.”

반도체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 그다음에는 컴퓨터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참고로 인천에서 매입했던 공장 부지는 올해 1월부터 준공을 시작했다.

내년쯤에 준공이 끝나면 그때부턴 본격적으로 컴퓨터의 핵심 부품들을 자체 생산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군요. 매출도 꽤 늘었고요.”

“다만, 미국의 휼리트-패커드나 텐디사 등이 한국에 진출했고 반도체 메이커로 유명한 인텔 같은 곳도 한국에 진출하려고 하고 있으니 경쟁은 더더욱 치열해질 거 같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컴퓨터 시장도 커지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그런 기대는 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국민 PC 시대가 올 거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 경쟁이 치열해진 것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싶었다.

* * *

혜성 전자에 가장 많은 투자를 했다고 해서, 혜성 전자만 신경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반도체 투자를 이어나가려면 다른 계열사에서 힘을 써줘야 하는 법.

‘쁘띠엘르나 원더우더는 올해도 잘 나가고 있군.’

내가 처음 입사한 뒤로, 매년 300% 이상의 매출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는 혜성 모직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매출 성장이 예고되었는데, 잘하면 두 브랜드를 합쳐서 천억 매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신생 브랜드, 드봉이 문제네.’

드봉.

종태 형이 직접 기획하고 준비했던 신생 브랜드였다.

외국의 브랜드 제품처럼 옷 가격이 최소가 3만 원이었다.

혜성 백화점에서는 그런대로 반응이 좋았지만, 쁘띠엘르나 원더우더처럼 직영점을 열거나 가맹점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격이 원체 비싸다 보니 디자인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구입하는 소비자가 한정적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라면 연 매출이 30억 정도에 불과하겠군. 적자라고 볼 수는 없지만, 시간을 쏟은 것에 비하면 결과가 영 실망스러워.’

예상했던 일이긴 했다.

그래도 막상 결과를 확인하니, 실망스러운 마음이 없을 수는 없었다.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

“한 길만 팠어야 했는데, 내가 괜한 짓을 했어.”

종태 형이 자책하듯 말했다.

드봉의 성공을 가장 기대했던 게 종태 형인 만큼, 나보다 실망감이 클 것이다.

“괜한 짓은 무슨. 내가 허락했던 일이잖아.”

“그래도 내가 하자고 안 했으면 안 했을 거잖아? 나 때문에 괜히 네 명성에 먹칠한 거 같다.”

“됐어. 아직 실패한 것도 아닌데 왜 벌써 그래?”

“그렇긴 한데…….”

“걱정하지 마. 올해는 안 돼도 내년엔 반드시 성공할 거니까.”

내가 자신감 있게 말하니 그제야 안도하는 종태 형이었다.

‘뭐 내년부터 경제가 급성장할 테니 그걸 믿어봐야지. 일본이랑 대만에도 한번 팔아보고 말이야.’

지금이야 비싸서 백화점에서밖에 판매할 수가 없었지만, 내년부터는 달랐다.

날이 갈수록 인심을 후해질 터.

IMF가 오기 전까지는 3만 원이 아니라 5만 원, 10만 원짜리 옷들도 잘만 팔리게 될 것이다.

“너 이 자식. 왜 이렇게 듬직하냐? 네가 위로해 주니까, 진짜 걱정이 하나도 안 든다.”

“회장이 될 사람인데 당연한 거 아니야?”

“그래, 너 잘 났다. 잘 났어. 아무튼, 네가 드봉 계속해 보라고 했으니까, 나도 포기하지 않고 해볼게.”

“올 한 해 동안은 적자 나도 괜찮으니까, 형 마음껏 해봐. 그렇다고 가격 낮추거나 그러지는 말고.”

“알았어.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한 입으로 두말하면 쓰나. 가격대는 명품 기준으로 높이면 높였지, 낮추지는 않을게. 적자는 최대한 안 나게 할 테니까, 나를 믿고 기다려줘라.”

“그럼. 당연히 믿고 가야지. 형이 누군데?”

내 말에 종태 형이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그저 격려 차원에서 한 말로 받아들인 거 같았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종태 형을 믿었다.

종태 형의 미래가 어떤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작년의 성과만 봐도 종태 형의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

낙하산인데도 낙하산 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만큼 능력이 출중하다는 뜻.

이미 혜성 모직은 확실하게 장악했고, 매출까지 증대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종태 형을 믿고 맡기면 될 듯싶었다.

“나는 이만 일어나 볼 테니까, 일 열심히 해.”

“잘 가.”

그렇게 종태 형이 떠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문뜩 위스키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혜성 주류에서도 곧 신생 브랜드가 나오는구나.’

1월에 인수하였던 백약 양조.

현재는 혜성 주류로 이름을 바꾸고 활발한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벌써 혜성 주류에서 사용한 광고비만 8억.

새로운 브랜드의 사업비로도 14억 정도를 지출하였다.

‘돈을 이렇게나 썼는데, 잘 되겠지?’

내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사업 실패에 대한 걱정이 없을 수는 없었다.

특히나 주류 업계는 노사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니 더 걱정스러웠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니, 남은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도전하는 사업에서 성공하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나는 내년부터 원자탄이니, 수소탄이니 온갖 폭탄주가 개발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것만 믿고 도전을 계속하면 될 거 같았다.

* * *

박기룡은 대자보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대자보에는 전대환 정권을 규탄하는 내용과 주말에 시위가 있으니 꼭 참가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도 함께하고 싶은데…….’

작년까진 그도 광화문 시위에 자주 참여하였었다.

학교에서도 열심히 유인물을 나눠주었었고 학생회 활동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옛날 일이었다.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면서 그는 본인 삶 챙기기도 급급해졌다.

‘애들아. 미안하다.’

방학 동안 간신히 벌었던 돈이 등록금 한 번으로 다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앞으로 돈 나갈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숙비도 내야 했고, 교재비에 교통비까지 생각해야 했다.

백만 원은 있어야지만 한 학기를 무사히 다닐 수 있을 터.

이런 상황이었기에 박기룡은 시위에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할 수가 없었다.

“박기룡!”

그때였다.

뒤에서 동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 교수님이 너 불러오래.”

“정 교수님이?”

“어, 빨리 오라는데?”

동기의 말에 박기룡은 서둘러 정 교수의 연구실로 향하였다.

연구실에는 정 교수와 함께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교수님, 부르셨습니까?”

박기룡은 정 교수에게 인사하면서 여성의 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인물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의문이었다.

“박기룡. 너 설마 요즘도 불법 과외를 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음식점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는 몇 시간이나 하는데?”

“학교 끝나면 저녁 9시까지 합니다.”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의아해하는 박기룡에게 정 교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는 참 보면 볼수록 대견하구나.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평균 학점이 B라니.”

“총명해 보이시는 게 금전적인 어려움만 해결되면 훌륭한 연구원이 되실 거 같습니다.”

“그렇지요? 하하하.”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니 더욱더 의문이 깊어졌다.

“이런! 소개가 늦었구나. 여기 계신 이분은 혜성 장학 재단에서 인재 육성을 담당하시는 이윤경 부장님이시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박기룡 군을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혹시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그럼요. 각 대학의 우수 학생을 찾고 있는데, 여기 계신 정 교수님께서 박기룡 군을 추천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박기룡은 눈을 부릅떴다.

장학 재단에서 자신을 찾았다는 말이 심상치 않게 들렸다.

“저, 저를 찾은 이유가 그럼?”

“혜성 장학 재단에서는 사회에 환원하는 차원에서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드리려고 해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요. 혜성 그룹이 겨우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겠어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혜성 그룹이라는 대기업이 세운 장학 재단인데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는 그러면 장학금을 받기 위해 뭘 해야 하나요?”

“남은 학기 동안 평균 성적을 B 학점 이상으로만 유지해 주세요.”

어렸을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들었던 그에게 B 학점을 유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정말 그거면 됩니까? 졸업 이후에 혜성 그룹에 취직하거나, 그래야 하는 게 아니고요?”

“박기룡 군이 저희 그룹에 취직해 주면 정말 좋겠죠. 하지만 장학 재단을 세우신 이한성 부회장님께서는 장학금을 빌미로 학생들에게 족쇄를 채우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

그 말을 듣자 박기룡은 참을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박기룡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정 교수와 이윤경 부장, 그리고 이곳에 없는 혜성 그룹의 부회장에게 감사 인사를 하였다.

그가 25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본 대가 없는 호의였다.

* * *

여느 때처럼 정신없던 3월을 보내고 어느덧 4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올해도 참 시간이 빨리 가네.’

3개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4월이 된 거 같은 기분이었다.

“부회장님!”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양기현이 다가와서 나를 불렀다.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부르라니까.”

“회사에선 이렇게 부르는 것이 더 편한 거 같습니다. 하하.”

“네가 그렇다면 할 수 없고. 그런데 무슨 일이야?”

“저……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왜? 또 인정 씨에게 임무 받았어?”

양인정.

세계 그룹 양 회장의 막내딸인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오빠인 양기현을 시켜서 나와의 만남을 주선케 하였던 것이다.

‘말수가 없어서 소심한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의외였어.’

내가 그렇게 양인정을 생각하고 있을 때, 양기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이번에는 인정이가 아니라, 저희 가친께서 부회장님을 뵙자고 하셨습니다.”

“마침 잘 됐군.”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와 같이 말했다.

“예?”

“나도 양 회장님을 뵈려고 했었거든.”

이제는 세계 그룹과의 관계를 결정지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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