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네 인맥이 셀까, 내 금력이 셀까?
군산시 월명동.
나는 한 위스키 공장에 와 있었다.
한때는 위스키 부문에서 시장 점유율 68.5%를 기록하였던 기업의 공장이었다.
“직원들이 관리를 잘했는지, 공장이 참 깔끔한 거 같습니다.”
공장 내부를 살펴보고 의례적인 칭찬을 하니, 강석준 회장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제 경영방침이 주질 본위입니다. 술맛에 위생도 중요하니,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경영방침이 참 마음에 듭니다.”
“아쉬운 건, 경영방침대로 술만 만들었어야 했는데, 괜히 다른 사업에 도전했다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운이 없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없어도 너무 없었죠! 하필 대통령이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소주만 다른 기업에 팔았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소주만 잘 나가고 저희의 주력군인 맥주나 위스키는 완전히 죽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까.”
“비록 지금은 다른 업체들에게 시장 점유율을 많이 뺏겼지만, 저희 백약 양조는 한때 소주나 양주, 청주를 가리지 않고 모든 부분에서 잘 나갔었습니다. 인수하셔도 절대 손해는 없을 겁니다.”
백약 양조가 과거에 잘 나갔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주류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던 기업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기업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와 미래였다.
그리고 백약 양조는 1980년에 소주 사업을 포기하고 건설 같은 신규 사업을 하다가 심한 자금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차입금만 130억이 넘을 정도.
반면 매출은 73억, 순이익은 2억이 조금 안 됐다.
더 중요한 것은 올해의 매출은 이보다 더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었다.
‘다른 기업들은 광고 선전비에 20억씩 쏟아붓는데 백약 양조는 그럴 여력이 되지 않으니, 당연히 매출은 떨어지겠지.’
나는 속으로 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강석준 회장 앞에서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혀 봤자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강석준 회장이 묻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수하겠습니다.”
“그럼 인수 금액은 원래 이야기했던 대로 주십니까?”
“20억을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일체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였다.
사실 공장에 오기 전부터 이미 인수하기로 결정했었다.
단지 마지막으로 확인 차원에서 공장을 방문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제시하고 싶은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잔금은 일주일 내에 완납할 테니 4억만 깎아 주시지요?”
“으음…….”
돈이야 많다지만, 줄일 수 있을 때 줄이는 게 좋았다.
“좋습니다!”
강석준 회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내 제안에 응하였다.
자금이 급한 상황이기에 강석준 회장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 회사와 직원들을 잘 부탁하겠습니다.”
“예. 혜성의 품으로 들어온 이상, 최고의 회사가 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내가 경영하게 되었으니 백약 양조는 반드시 최고의 주류업체가 되어야만 했다.
“그나저나 혜성의 자금력이 참 대단한 거 같습니다. 얼핏 듣기로 전자 쪽에 상당한 자금을 투자한다고 들었는데, 주류 쪽으로도 사업을 키우시다니.”
“혜성이 인수하는 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혜성이 인수하는 게 아니라니?”
“인수 주체는 혜성이 아니라 저입니다.”
“허어! 정말입니까? 부회장이 돈 많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이거 참…….”
그의 반응에 나는 싱긋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저녁을 드시고 가시지.”
“괜찮습니다. 남은 업무가 있어서, 바로 서울로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강석준 회장은 나를 어지간히 보내기 싫었는지,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작별 인사를 하였다.
‘노사께서는 내년부터 양주 소비문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 하셨지?’
3저 호황으로 곧 나라 전체에 돈이 넘쳐나게 될 예정이다.
그리고 이 같은 호황은 흥청망청 술을 마시는 문화를 만들어 냈는데, 이른바 ‘폭탄주’의 등장으로 양주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원자탄부터, 수소탄, 그리고 고성능화한 중성자탄까지 개발될 예정이니, 위스키의 매출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광고를 늘린 상태로 준비하고 있는 양주 브랜드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올해부터 매년 200% 이상의 성장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회사도 원래 샤롯이 인수하는 회사네. 의도한 바는 아닌데, 샤롯의 미래 먹거리를 하나하나씩 뺏어가는 기분이야.’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신진호 회장이 분노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 * *
“요즘 표정이 참 좋아 보이십니다. 하하.”
인정민이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그 같이 말했다.
“쇼핑하는 게 즐겁더군요.”
“쇼핑이요? 아, 설마 기업 인수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옷을 사거나, 먹을 것을 사는 것보다 기업을 사는 게 가장 재미있는 거 같습니다.”
내가 웃으며 그리 말하자 인정민이 혀를 내둘렀다.
“사장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기업 인수가 마치 옷 쇼핑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벌써 세 곳이나 인수하셨지 않습니까?”
“예. 백약 양조까지 모두 세 곳이죠.”
“이야. 백약 양조면, 저도 아는 곳인데 거기까지 인수하셨다니.”
“가격은 그래도 가장 쌌습니다.”
20억.
아니 할인된 금액으로 16억이었다.
다른 곳은 60억, 45억이었으니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어떤 게 말입니까?”
“호텔에, 주류에, 출판까지. 한 번에 너무 많은 사업을 하시는 게 아닌지 살짝 걱정됩니다. 더군다나 인수한 기업들의 사정이 말이 아니라고 하던데…… 물론 제가 감히 할 걱정은 아니긴 하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걱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호텔이야, 아직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을 인수했으니 나중에 신경 쓰면 된다지만, 다른 두 기업은 한창 침체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도 관리하기 힘든 판국에 두 개를 동시에 관리하는 게 쉬울 리는 없었다. 본업도 따로 있는 판국에 말이다.
‘그래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원래라면 1985년이 되기 전까지 자금 압박을 받다가 이후에는 승승장구할 회사들이었다.
1년만 지나도 절대 이렇게 싼값에 인수할 수 없었을 터.
그렇기에 무리해서라도 인수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무리했다고 보기도 힘들지. 인수 금액은 내 재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까. 나중에 투자해야 될 돈도 마찬가지고.’
다 합해서 백억 정도밖에 쓰지 않았다.
아직 내 자산은 9백억 이상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회사 몇 곳은 더 인수해도 감당할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에 거화 자동차나 동화 자동차를 인수하려면 돈을 열심히 모아둬야 하겠지만 말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동화 출판사도 그렇고, 백약 양조도 그렇고, 회사는 건실하니 매출도 금세 쭉쭉 오를 겁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고림 그룹과 관련해서 보고하실 내용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참. 돈 이야기를 하니까 정신을 못 차리고 정작 중요한 걸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하하!”
인정민은 겸연쩍게 웃고는, 짐짓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고림 그룹에서 대통령의 형제인 전동환 씨를 그룹 고문으로 영입했다고 합니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뇌물을 그렇게 주더니, 이제는 대통령의 인척까지 이용하려나 보군요.”
“예. 그리고 민건우 부회장이 요즘 전직 재무 관료들과 만나고 다닌다고 합니다.”
“전직 재무 관료들이라. 모피아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재무부의 영문 약칭인 MOF와 마피아를 합성한 조어, 모피아.
이들은 국가 금융 즉, 돈줄을 좌지우지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각 은행의 인사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피아를 만나고 다니는 이유가 뭐랍니까?”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지만, 조흔 은행의 차기 은행장 선임과 관련해서 무언가 요구하려는 거 같습니다.”
나는 조소를 흘렸다.
고림 그룹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거 같았다.
‘조흔 은행을 움직여서 혜성 그룹의 여신을 회수하게 하려는 건가?’
아무래도 원 역사에서 조흔 은행을 움직인 게 고림 그룹이 아닐까 싶었다.
주거래 은행이 갑자기 빚 독촉을 할 이유는 그것 말고 없었으니까.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고림 그룹이 접촉한 모피아 명단도 알아봐 주시길 바랍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인정민에게 그 같은 지시를 내리고는 안기부의 김기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도 비슷한 지시를 내렸는데, 며칠이 지나자 고림 그룹의 의도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도 우리 그룹을 탐내고 있는 건가? 정말 주제도 모르는군. 이제 급의 차이를 알 때도 됐는데 말이야.’
작년 한 해, 모든 계열사를 통틀어 매출이 천억 이상 증가한 혜성 그룹이었다.
더군다나, 혜성 백화점과 혜성 전자 등의 신사업까지 벌이며 자산 규모를 크게 늘렸다.
재계 순위도 10위에서 9위로 오를 날도 멀지 않았을 터.
고림 그룹과의 간극이 한층 더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군부의 인맥을 믿고 그러나 본데, 과연 인맥의 힘이 셀지 금력의 힘이 셀지 두고 보자고.’
5공의 총애를 받는 3김이 상대라면 조금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고림 그룹이라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고림 그룹도 군부 인맥이 제법 된다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챙겨줄 기업은 아니었던 것이다.
* * *
고림 그룹의 부회장, 민건우는 일본식 요정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조소를 흘렸다.
‘혜성은 여전히 미련하군. 정작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고 그저 그룹의 덩치만 키우고 있어.’
이 나라에서는 사업만 잘한다고 일류 기업이 될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나라 지존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실제로 3김이라 불리는 김종우, 김종민, 김두현, 이 세 사람은 5공의 총애를 받고 쑥쑥 자라는 중이었다.
이 중에 김종우가 이끄는 쌍호 그룹은 재계 10위권을 노리고 있을 정도였다.
고림 그룹 역시 이들 3김을 본받아 대통령의 형을 영입하고 기부금도 가장 많이 내는 등, 대관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반면에 혜성은 대관에 소홀히 하였다.
청와대에서는 슬슬 혜성과 세계 그룹에 대해 불편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
아마 최소한의 명분만 만들어진다면, 작년부터 이야기가 무성했던 산업합리화 조치를 꺼내 들 가능성이 컸다.
‘혜성 그룹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각하께서는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나서실 거다.’
그렇기에 오늘 만남이 중요했다.
지금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이원재.
재무부 이재국장, 세정차관보, 재무부 차관 등을 역임했던 재무부의 초엘리트 전직 관료였다.
비록 재작년에 벌어졌던 장희자 어음 사기 사건으로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정우 그룹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금융권에 여전히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이 중요한 이유는 모피아의 대부로 불리는 김용한 전 재무부 장관의 측근이란 점이었다.
이원재의 마음만 얻는다면, 조흔 은행의 차기 은행장은 고림 그룹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차관님, 오랜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미닫이문이 열리며 이원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건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하였다.
“그래. 오랜만이군. 춘부장께서는 강녕하신가?”
“예! 차관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에, 가친께선 평안하십니다!”
공손한 그의 태도에 이원재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뜬금없이 말했다.
“내가 미처 자네에게 해주지 못한 말이 있네.”
“어떤 겁니까?”
“이 자리에 한 사람이 더 올 걸세.”
“예? 어떤 분이 오시는 겁니까?”
“마침 들어오는구먼.”
민건우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다시 문이 열리며 젊은 사내가 다다미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 당신은!”
“반갑습니다. 혜성 그룹 부회장,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
예기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민건우는 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흠칫하였다.
하필, 혜성 그룹의 후계자를 이런 자리에서 만났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