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64화 (64/300)

64화 플렉스 좀 해볼까?

“어머니, 요즘 어떠세요?”

“뭐가 어떠냐는 거니?”

내가 불쑥 묻자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 어디 아프거나 그러지는 않으시죠?”

“걱정하지 말아라. 요즘은 등산도 할 정도로 몸이 건강해졌다.”

“그러세요?”

“왜 그러니?”

“어머니가 적적하실까 싶어서요.”

사업하던 분이니, 집에만 있는 게 좀이 쑤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적적할 게 뭐가 있겠니. 부녀회도 나가고, 그림도 그리는데. 그리고 네가 가끔 백화점도 데려다주니까, 적적할 틈이 없다.”

“그러세요?”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거 같은데, 말해보렴.”

“사실 제가 재단을 만들려고 합니다. 장학 재단을 말이죠.”

“재단을 말이니?”

“예. 돈도 많이 벌었으니, 사회에 조금이라도 공헌하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장학 재단을 만들고자 하는 솔직한 이유는, 인재를 선별하기 위함이었다.

몇 년만 지나도 기업들은 유례없는 인재난을 겪게 될 것이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인재의 수요가 폭증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교 졸업생이라면 학과를 불문하고 무조건 모셔 와야 할 정도였다.

그러니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미리미리 인재들을 선별하고 육성하는 게 대국적으로 봤을 때, 효율적이었다.

‘덤으로 사회 곳곳에 혜성 장학생을 침투시켜 혜성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말이야.’

혜성 장학생이 검사가 된다면?

웬만해서는 혜성에게 불리한 수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인이나, 공무원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는 이를 악용해서 일성처럼 노골적으로 ‘일성 봐주기’ 관행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단지 혜성에게 불합리하거나, 불공정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좋은 생각을 했구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어머니께서 재단의 이사장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재단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가 없었다.

가장 비리를 저지르기 쉬운 게 재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에게 재단 운영을 맡기고자 하였다.

어머니는 사업 경험도 있으신 분이었기에 능력은 충분하였다.

“내가 그런 일을 해도 되겠니?”

“물론이죠. 어차피 대부분의 일은 직원들이 해줄 겁니다. 어머니는 직원들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게 감시만 해주세요.”

“알겠다. 집에만 있기도 뭐 했는데 아들 덕에 재단 이사장 노릇도 해보는구나.”

“하하.”

“그런데 자본금은 얼마 정도 할 거니?”

“처음에는 10억으로 시작할 겁니다.”

“10억?”

어머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달에 한 번 이상씩은 백화점에 같이 가고 있으니, 내 재력이 상당하다는 사실은 어머니도 알고 계신다.

하지만 장학 재단에다 10억을 쓸 정도일 줄은 모르고 계셨을 것이다.

“매년 규모를 늘려갈 계획이니, 어머니가 잘 살펴주세요.”

“……알았다. 아들이 어렵게 번 돈인데, 내가 잘 챙겨야지.”

모처럼 어머니의 표정이 즐거워 보였다.

역시 장학 재단을 어머니에게 맡기길 잘한 거 같았다.

(인맥도 만들고, 장학 재단도 만들었으니 이제 남은 돈으로 플렉스를 할 시간이구나.)

어머니와의 대화를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려는데 노사가 그 같이 말했다.

“플렉스요?”

(네가 지금 가진 돈이 얼마야. 빚 다 갚고도 800억이지?)

“그렇죠? 주가가 조금 더 올라서 1,400억이 됐으니까.”

주가가 정상화되자 나는 조금씩 주식을 처분하고 있었다.

일성 전자나 혜성 건설처럼 계속 가지고 있을 주식을 제외한다면, 주식 정리가 끝날 경우 현금만 천억쯤 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6백억은 은행이나 황 노인에게 갚아야 할 돈이니, 남는 4백억의 현금이 진짜 내 돈이었다.

주식 4백억, 현금 4백억, 이렇게 총 8백억의 자산가가 된 것이다.

‘한성 주택의 자산까지 합치면 그보다 훨씬 많겠구나.’

이제는 진짜 자신 있게 천억 자산가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 돈을 그냥 통장에 모아두고만 있을 거야?)

“아니죠. 당연히 부동산이나 주식에 또 투자하지 않겠습니까? 내년에는 일본 부동산에 투자해야 하고요.”

(그것도 좋지만, 기업을 인수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

그야 물론 그랬다.

사업가로서, 기업을 인수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물론 순수한 수익률로 따졌을 때는 부동산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기업이라…… 추천할 만한 기업이 있으십니까?”

(가장 좋은 것은 자동차지. 경기가 좋아지면 원래 집도 많이 짓고, 자동차도 많이 타고, 뭐 그런 법이니까.)

나는 눈을 빛냈다.

자동차라.

확실히 탐이 나는 사업이긴 했다.

“그런데 자동차 회사들은 내실이 탄탄한 회사들이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미래 자동차나, 정우 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었다.

3대 회사 중에 말석인 기화 자동차 역시 자금력이 썩 나쁘지 않았다.

적자가 심하다는 고림 그룹의 고림 자동차도 일단은 모기업이 대기업이었고 말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동화 자동차와 거하 자동차 이렇게 두 곳은 네가 가진 자금으로도 충분히 인수할 수 있을 거다.)

둘 다 들어본 적이 있는 회사였다.

거하 자동차는 코란도로 유명했고, 동화 자동차는 버스나 지프 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동화 자동차야 그렇다 치고 거하 자동차는 의외군요. 거하 자동차도 자금난을 겪고 있습니까?”

동화의 하 회장이 자동차 사업에서 손을 떼려 한다는 소문은 이미 재계에 파다하게 퍼졌다.

규모의 영세성과 자금난으로 경영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달리 거하 자동차는 별다른 잡음이 들려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거하는 내년에 회장이 구속되면서 부도날 예정이야. 11월쯤이니 그때를 노리면 될 거다.)

“그렇습니까?”

나는 노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확답을 주지 않은 채, 고민에 잠겼다.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구나.)

“솔직히 말하면, 인수하고는 싶습니다. 자동차 회사를 가질 수만 있다면, 당연히 가지고 싶죠. 그런데 문제는 인수만 한다고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동차 회사에는 필연적으로 천문학적인 투자가 따라야 했다.

백억 단위, 아니, 천억 단위의 투자가 필요하였다.

미스터플랜에 따라 반도체 연구에 매년 수백억씩 투자해야 할 상황에서 자동차 회사까지 챙기기는 무리가 있었다.

혜성 그룹에는 그 정도의 자본력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나도 그런 이유로 적극 추천은 못 해주겠다.)

아쉬웠다.

돈이 조금만 더 많았으면 두 회사 모두 인수해버리는 건데.

‘천억이 부족하게 느껴질 날이 올 줄이야.’

물론 대출을 받는다면 가능할 법도 했다.

문어발식 확장하는 다른 대기업과 비교하면 혜성 그룹의 부채 비율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부가 언제든 ‘산업합리화 조치’라는 걸 꺼내 들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채는 가능한 한 줄이는 게 좋았다.

내 개인 대출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라. 쌍호 그룹이 인수하기 전까지는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나중을 노려도 된다.)

“예, 그런데 자동차 회사 말고 인수할 회사는 또 뭐가 있습니까?”

(많지. 경기가 좋아질 것을 생각하면, 주류업체도 괜찮다.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을 생각하면 관광호텔을 인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주류업체를 인수하는 것도 좋고 호텔을 인수하는 것도 좋았지만, 역시 자동차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혜성 그룹을 빨리 발전시켜야겠어. 자동차와 전자, 그리고 조선소와 해운 사업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게끔 말이야.’

하고 싶은 사업을 모두 하려면 그룹의 규모를 키우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 * *

“만찬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진봉현 비서실장의 물음에 이한철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주 망신만 당하고 왔네.”

“망신을요?”

“나와 세계 그룹 양 회장님을 말석에 앉혔네. 김종우, 김종민, 김두현, 이 세 놈은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앉았는데 말이야.”

좌석 배치는 보통 연령순으로 하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이번 청와대 만찬에서는 관례를 깨고 전혀 다른 순서로 좌석을 배치하였다.

5공의 총애를 받는다는 3김이 대통령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고, 뇌물을 적게 주는 순으로 멀리 배치되었다.

재벌 총수 중에 나이가 있는 편인 세계 그룹 회장도 말석에 배치될 정도였다.

“그리고 기부금 이야기를 꺼내면서 계속 압박을 주더군. 아예 노골적으로 내년에는 누가 더 많이 내는지 지켜보겠다는 말까지 했네.”

“도가 지나친 처사군요.”

“문제는 가면 갈수록 심해진다는 거야. 후우.”

정부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버마에서 테러가 일어난 이후 두 달 동안, 뇌물 요구만 벌써 세 차례였다.

총 30억에 달하는 돈을 뜯어 간 것이다.

“많이 지쳐 보이십니다. 오늘은 이만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진봉현의 말처럼 이한철 회장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역력하였다.

안 그래도 건강이 안 좋은데, 스트레스까지 받으니 몸이 축날 수밖에 없었다.

“내년에 많이 쉴 테니, 굳이 지금 안 쉬어도 되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한철 회장은 작게 미소를 짓고는 갑자기 한성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봉현이, 한성이가 장학 재단을 세운 이야기는 들어봤나?”

“아, 들어봤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위해 장학 재단을 세웠다고요.”

“놀랍지 않나?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예. 늘 느꼈던 거지만, 도련님께서는 먼 미래를 보고 계신 듯합니다.”

“반도체 산업에 투자한 시기도 놀랍기 그지없었어. 일성 전자가 때마침 성과를 내지 않았나? D램인지, 뭔지 일성이 개발한 것을 보고서 정우나 은성에서도 다급히 반도체에 투자한다고 하는데, 한성이가 그들보다 한발 빨랐던 거야.”

가장 빨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적절한 시기에 반도체 산업을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성이는 결혼만 해주면 딱 좋을 텐데, 그거 하나가 아쉬울 따름이네. 일성 그룹이든, 세계 그룹이든, 좋은 혼처가 많은데 말이야.”

얼마 전에는 일성 부회장이 그를 찾아오기까지 했다.

일성의 후계자조차 한성을 탐내고 있었던 것이다.

“회장님께서 강하게 설득하시면, 도련님도 못 이긴 척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글쎄. 녀석도 무언가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거 같아서 그건 안 될 거 같네.”

그는 한성이 천생 사업가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성이라면 자신의 짝을 알아서 잘 고를 거 같았다.

지금 결혼을 미루고 있는 것도 그만의 계획이 있어서 그런 것이리라.

“아무튼, 한성이에 대한 평가는 더할 필요가 없어. 한성이라면 지금 당장 회장이 되어도 잘 해낼 것이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봉현이 자네가 한성이를 잘 보필해 주게.”

“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내년 하반기쯤엔 한성이에게 회장직을 물려주는 게 좋을 거 같네.”

진봉현은 눈을 크게 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내년일 줄은 몰랐다.

적어도 몇 년은 더 지켜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압박도 심해지고 있는데, 회장님께서 조금만 더 자리를 지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만에 하나 도련님께서 정부를 상대로 실수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고…….”

“한성이라면 나보다 더 잘 대응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그리고 의사들도 권고하더군. 내게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이야. 그래서 미국으로 가 몸도 치료하고 휴식도 취할 생각이네.”

그 말에 진봉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한철 회장이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말려봐야 소용이 없었다.

“도련님에게 제가 필요할지는 의문이지만, 최대한 성심을 다해 도련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자네에겐 늘 감사할 따름이네.”

* * *

다사다난했던 1983년을 보내고 마침내 1984년이 되었다.

‘올해를 잘 버텨야 할 텐데.’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혜성 그룹은 1984년부터 크게 흔들리게 된다.

자금 조달 능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제2금융권이 돌리는 어음을 자력으로 막지 못하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은행권에서 여신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급하게 사채를 받았다가 적자는 커져만 갔고, 이 와중에 이한철 회장은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이다.

결국 2년 뒤, 산업합리화 조치로 그룹이 해체되는 수순을 밟았다.

‘이번에는 다르겠지.’

절대로 원 역사처럼 흘러가지는 않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금 조달 능력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연 매출 20억에 불과했던 혜성 모직은 무려 3백억으로 상승하였다.

혜성 유통도 본래 5백억이었다가, 백화점 사업부의 신설로 작년 한 해에만 천억의 매출을 기록했다.

목동으로 큰돈을 벌었던 혜성 개발 또한 작년에 2천억의 매출을 올렸다.

내가 기여한 매출을 모두 합산하면 천억이 넘었다.

심지어 혜성 건설도 이준성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이한철 회장이 집중적으로 관리해서 그런지 리스크가 많이 해소되었다.

원래라면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적자만 보고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

‘1983년, 한 해 동안 부채 비율을 줄이고 매출을 늘렸다. 혜성 그룹이 무너질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무너지기는커녕 높게 비상할 날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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