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적어도 아시아 대표 브랜드 정도는 되어야지
이병건 회장과의 대화가 끝나자 이호승은 아쉬운 얼굴로 혀를 찼다.
‘이한성의 나이가 조금만 더 어렸으면 좋았을 텐데.’
27살.
기업인으로서는 굉장히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였다.
하지만 그의 사위로 들이는 거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의 자녀들은 이제 겨우 10대 중반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큰형님의 처조카가 혜성 그룹의 자제와 혼인을 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설마 그게 이한성인가?’
이호승은 눈살을 찌푸렸다.
예전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정보였다.
그런데 한성의 존재감이 심상치 않게 빛을 발하자, 이호승으로서도 의식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부회장님의 말씀처럼, 일성 화재 대표의 자녀인 유지은과 혜성 그룹 부회장인 이한성 간에 긍정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고 합니다.”
실제로 확인해 보니, 그의 추측이 맞았다.
‘우리 가문의 사람이 되는 건 좋은데, 하필 큰 형님의 처조카일 게 뭐야.’
이호승은 후계 경쟁에서 이미 승리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삼남인데도 그룹의 부회장이 되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하지만 후계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지분이 누구에게 얼마씩 상속될지는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운이 나쁘면 이병건 회장이 일성의 주요 계열사들을 장남에게 떼어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한성이 큰형님의 처조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성의 자금력이라면 지분 조정을 할 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게 가능했으니까.
“둘이 혼인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야?”
“혜성 그룹 쪽에서 결정을 미루고 있다는데, 두 사람의 관계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이호승은 그 말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혜성이 결정을 미루고 있다면, 그 사이를 파고들 여지는 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이한철 회장을 만나봐야겠어.”
그의 딸은 나이 차이 때문에 안 된다지만, 이쪽도 처조카는 있었다.
혜성 그룹의 이한철 회장의 입장에서는 일성 그룹 후계자의 처조카가 훨씬 메리트 있게 느껴질 것이다.
* * *
한편, 그 시각 세계 그룹의 양 회장 가족들도 한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성이는 보면 볼수록 대단하구나. 전자 산업에 진출하기 무섭게, 460억을 쓸 줄이야. 배포가 범인들과는 차원이 달라!”
양익수 회장의 말에 양기현은 눈을 반짝이며 대꾸했다.
“저도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는데, 정말 대단한 형님이었습니다. 능력이 출중한 데다, 해박한 지식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겸손하기까지!”
“그래. 너랑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지.”
“……하하.”
“웃지 마라. 정든다.”
“옙!”
“한성이에게 많이 배워라. 계속하던 말이지만, 한성이는 사업가로서 배울 점이 아주 많다. 이번에 진출한 반도체 산업도,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 배포와 과감성은 배워두는 게 좋을 것이야.”
“그런데 정말 제가 한성이 형님의 밑에서 일하게 되는 겁니까?”
본래 양기현은 한국대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갈 예정이었다.
양익수 회장이 그를 못 미덥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여, 선진국인 미국으로 가서 석사 과정까지 마치려고 했었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에 그의 유학 계획이 파기되었다.
한성을 만난 양익수 회장이 유학을 보내는 것보다, 한성의 밑에서 일을 배우게 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성이가 먼저 그러더라. 네가 마음에 드는데 잠깐이라도 같이 일해도 되겠냐고 말이다.”
“혀, 형님이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까?”
양기현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재벌 2세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역량을 보여주는 한성이었다.
한성이 백화점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쭉 지켜봤던 양기현이었기에 한성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게 기쁘게만 느껴졌다.
“내가 그럼 쓸데없는 거짓말을 한단 말이야?”
“아닙니다. 그냥 기분이 좋아서 물어본 거였습니다.”
“쯧쯧. 너무 좋아하지는 마라. 내가 한성이한테 단호하게 말해 놨다. 내 아들이라고 대접하는 짓은 절대 하지 말라고.”
양익수 회장은 혀를 차며 그리 말했지만, 양기현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한성과 함께 일한다는 사실이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저야말로 대접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다행이구나. 네가 그룹을 망신시킬까 봐, 다른 사람에게는 내 자식이라고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도 상관없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룹에 폐를 끼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두고 봐야지.”
두 사람이 한성을 화제의 중심으로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양익수 회장의 막내딸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도 한성이 오빠의 밑에서 일하면 안 될까요?”
“뭐?”
양인정의 말에 양익수 회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그의 딸이 이렇게 당돌한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네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그런 말을 해? 학교나 열심히 다녀라.”
“어차피 아버지는 한성이 오빠를 사윗감으로 점찍으셨잖아요. 그런데 굳이 제가 학교에 계속 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사, 사윗감으로 점찍다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양익수 회장이 조금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막내딸이 그의 본심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혼처는 내가 알아서 정해줄 테니, 너는 잠자코 학교나 다녀라. 알겠냐?”
“……네.”
양인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성은 그녀가 난생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 * *
“모두 주목해 주세요. 이쪽은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양기현 신입 비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양기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양기현이 비서들 앞에서 살짝 긴장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였다.
짝짝짝!
비서들은 양기현을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낙하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양기현은 한국대를 다니는 인재였다.
학력만 놓고 봐도 비서가 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비서들은 양기현이 세계 그룹의 장남이란 사실을 모르기도 했고 말이다.
“신은규 비서님이 동문 선배이시니, 양기현 비서를 잘 가르쳐 주길 바랍니다.”
“예. 한 달 안에 사람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잘 대해 주세요. 어렵게 모셔온 인재입니다.”
내 말에 양기현은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렵게 모셔왔다는 표현이 그리도 좋은 모양이었다.
“이소희 과장님, 오늘의 스케줄 좀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양기현을 비서들에게 소개한 나는 곧바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오후 한 시에, 인천 백화점의 안창현 점장과 면담이 있고, 오후 세 시에는 혜성 모직의 김종태 상무와 면담이 있으십니다.”
“두 건이라…… 지난주보다는 훨씬 여유 있군요.”
“아무래도 일성 전자가 신제품을 발표한 뒤로, 부회장님을 찾는 손님이 줄어든 거 같아요.”
나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12월 1일.
일성 전자에서 마침내 64KB D램 개발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일성 전자의 발표가 끝나기 무섭게, 나를 향한 여론의 관심이 빠르게 꺼져갔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인기 탤런트처럼 기자들의 취재가 끊이지 않았었는데…….’
역시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은 쉽게 꺾을 수가 없는 거 같았다.
순식간에 모든 화제를 집어삼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부러워도 어쩔 수 없지. 이미 늦었으니까. 대신, 실리는 혜성 전자가 챙기고 마리라.’
1시가 되자 인천 백화점의 안창현 점장이 찾아왔다.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시죠.”
“예, 감사합니다.”
“기대했던 대로 성과가 나오고 있는 거 같습니다. 인천 지점의 매출이 한 달 만에 두 배 가까이 늘었다면서요?”
참고로 안창현은 본래 점장이 아니었었다.
강남 본점의 일개 매니저였었는데, 기존의 인천 점장이 납품 비리를 일으키자 안창현을 그 자리에 앉혔다.
워낙에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안창현은 인천 지점의 점장이 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큰 성과를 보여주었다.
“혜성 유통에서 품질 좋은 식품들을 제공해 준 덕입니다.”
“그러고 보니, 푸드 코트 덕에 주부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죠?”
“예. 푸드 코트에다 시장에선 흔히 볼 수 없으면서 신선하기까지 한 음식들을 배치하니까, 주부들이 자주 찾아오는 거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창현은 강남 본점에서 매니저로 일할 때도 푸드 코트를 담당하였었다.
그래서인지 인천 지점에서도 푸드 코트를 꾸미는 것에 중점을 두었는데, 그게 빛을 발하였다.
중산층 이상의 주부들을 백화점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재래시장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물품의 가격을 내리거나, 거리에서 호객을 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렇게까지 위기감을 느끼지 않고 있나 보군요. 그 정도밖에 대응을 안 하는 걸 보면.”
“일 매출을 5천까지 상승한다면 그때쯤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천 지점의 경쟁자는 같은 백화점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래시장이 가장 큰 경쟁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재래시장은 우리 백화점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거 같았다.
‘그렇게 방심해주면 우리야 고맙지. 괜히 피켓을 들고 시위하면 우리만 곤란하니까.’
어떤 지역에서는 백화점이 세일할 때마다 재래시장 상인들이 총집결하여 반대 시위를 벌이곤 했다.
인천도 재래시장의 힘이 커서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그런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마 안창현의 말처럼 백화점 매출이 어느 정도 선까지 올라가면 그때쯤 대응에 나서지 않을까 싶었다.
“푸드 코트에 계속 신경을 써주시고, 청결이나 품질 같은 기본을 확실하게 지켜주십시오. 절대 이전의 점장과 같은 일이 생기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시 인천에 가셔야 하니 대화는 여기까지 하는 거로 하죠. 오늘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는 안창현을 다시 돌려보냈다.
그렇게 본래 업무를 한 시간 정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이번에는 종태 형이 찾아왔다.
종태 형은 두 가지 내용에 대해 보고하였다.
하나는 새로운 브랜드에 관한 보고였고, 다른 하나는 일본 진출에 관한 보고였다.
“너무 고가의 제품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백화점이랑 일본에 위주로 판매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우리도 이제 세계 그룹의 스텍스 신발처럼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진짜 명품 브랜드를 만들 때가 됐잖아?”
명품 브랜드라.
확실히 탐나는 이야기긴 했다.
혜성 모직이 그동안 쁘띠엘르와 원더우더로 큰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중저가 제품이니 이윤도 크지 않고, 무엇보다 해외를 노릴 수가 없었다.
실제로도 종태 형이 보고한 일본 진출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두 개의 브랜드로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처음엔 어느 정도 팔리는가 싶더니, 금세 주춤하였던 것이다.
“형 말이 맞아. 우리도 명품 브랜드를 만들어볼 때가 되긴 했지.”
샤넬,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등.
만약에 우리 회사에서 이런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천억 단위를 버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돈도 돈이지만, 뿌듯함과 성취감이 남다를 거 같았다.
그야말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것이니 말이다.
‘뭐 그렇게 될 가능성은 작겠지만.’
현실적으로 유럽의 아성을 꺾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일단 ‘한국 브랜드’라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를 당할 게 분명하였다.
서구 사람들이 보기에 한국이란 나라는 아시아의 개발도상국 국가 A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혜성 모직 디자이너들의 실력이 상당한 만큼, 한 번쯤 도전해보는 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노리다 보면, 적어도 아시아의 대표 브랜드는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