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61화 (61/300)

61화 1987년이 되기 전까지만 개발하면 된다

혜성 전자가 한국 전자 기술 연구소의 구미 공장을 인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에서는 ‘쇼크’라는 단어를 써가면서까지 자세하게 보도했다.

미래 전자가 반도체 산업에 5년에 걸쳐서 2천억을 투자한다고 하여 시장에 큰 충격을 준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혜성 전자는 한술 더 떠서, 첫 시작부터 무려 5백억에 가까운 돈을 사용하였다.

공장 하나를 인수하는 데 이만한 자금을 썼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자금을 쏟아부을지를 생각하면 쇼크가 아닐 수 없었다.

“뭐야. 건식이, 너도 이한성 부회장 취재하러 왔어?”

“대규구나? 동화에서도 왔냐?”

“이한성, 그 양반. 요즘 재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잖아.”

“젊은 나이에 참 대단하지.”

혜성 건설 사옥의 로비에서 두 명의 기자가 대화를 나누었다.

두 기자 모두 혜성 그룹의 부회장인 한성을 취재하기 위해 왔다.

“쁘띠엘르랑 원더우더도 그 양반이 한 거라며?”

“그럴걸? 혜성 모직이 원래 존재감이 없던 회사였는데, 쁘띠엘르로 빵 뜨고 나서 지금은 연 매출만 수백억대래.”

“또 새로운 브랜드 준비한다는 소문도 있더라.”

“진짜?”

“어디까지나 소문인데, 만약 그것도 성공하면, 내년에는 매출 천억대도 가능할 걸?”

“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혜성 모직이란 회사가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백화점도 천억이래. 이한성 그 양반은 어디 가는 곳마다 천억이야.”

고려일보 기자, 명건식은 대학 동기의 말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

천억.

정말 현실성이 없게 느껴지는 액수였다.

그런데 그가 취재하려고 하는 사람은 사업의 신이라도 되는지, 작은 회사조차 연 매출 천억대의 회사로 만들어냈다.

‘이쯤 되면 이한철 회장보다 더 능력이 뛰어나다고 봐야겠는 걸?’

아마 한성의 능력이라면 이한철 회장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큰 회사를 창업해내지 않았을까 싶었다.

“일성의 소식은 어때? 뭐 들은 거 있어?”

동기의 질문에 명건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성?”

“왜, 혜성이 반도체 공장을 인수했잖아. 반도체 시장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일성이라면 뭔가 반응을 보이지 않겠어?”

“글쎄? 일성은 별로 반응이 없는 거 같던데? 오히려 일성보다는 미래 쪽이 자극을 받았지. 지금 반도체 투자 금액을 연 2백억씩 더 늘린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어.”

“미래야 그럴 만도 하지. 정부 규제 때문에 공장 부지를 지난달에서야 겨우겨우 인수했잖아. 근데 일성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 의외네.”

“겨우 공장 하나 인수한 거로 일성이 유난 떨 필요가 있겠어? 혜성은 애초에 제조회사도 아니었잖아.”

“야, 야. 우리가 취재하는 사람이 누구야? 사업의 신이잖아. 작은 회사도 순식간에 연 매출 천억으로 만든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반도체 공장을 인수했는데 일성이 여유 부릴 때야?”

예전에 이 같은 말을 들었다면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며 웃고 넘겼을 것이다.

혜성이 제아무리 재계 10위의 대기업이라지만, 재계 10위의 기업과 빅 4 중 한 곳인 일성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하물며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이라면?

천년만년 노력해 봤자, 혜성이 일성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을 거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기술력 차이는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그런데 이상하게도 명건식은 동기의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

그 역시, ‘혹시’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한성 부회장이 괜히 반도체 시장에 뛰어든 것은 아닐 거야. 분명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뛰어든 게 아닐까?’

젊은 혈기에 460억이라는 거액을 썼을 거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기자로서 그가 여태껏 봐왔던 한성이란 사람은 절대로 혈기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냉철하면서 굉장히 신중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정말 궁금하군. 과연 사업의 천재가 이끄는 혜성은 일성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그는 혜성과도 인연이 없고 일성과도 인연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혜성을 응원하고 싶었다.

* * *

“부회장님! 명건식 기자의 표정 보셨어요? 마치 부회장님을 흠모하는 거 같았는데, 저만 그렇게 느꼈나요?”

이소희의 말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설마요. 오늘 처음 보는 기자인데요.”

“아니에요! 분명 그 기자는 부회장님을 존경하는 게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다면, 부회장님의 업적을 그렇게 상세히 기억하지는 못할 거예요.”

“확실히, 저도 잊고 있었던 일을 많이도 알고 있긴 하더군요.”

“정말 대단하세요. 고려일보의 기자까지 팬으로 만드시다니!”

호들갑 떠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다시금 미소를 지어주고는 물었다.

“혜성 전자의 임원들은 도착했나요?”

내 질문에 답해준 사람은 신은규였다.

“10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지금은 회의실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둘러 가야겠군요.”

신은규의 대답을 들은 나는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부회장님!”

이재현이 들뜬 얼굴로 나에게 인사하였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재현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악수에 응했다.

“구미에 계셔서 전화로밖에 치하를 못 해줬었는데, 이렇게 직접 치하를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앉으시죠. 해야 할 이야기들이 많으니.”

“예!”

이재현이 자기 자리에 앉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들 이미 아시는 일이겠지만, 전자 기술 연구소의 반도체 공장이 마침내 혜성 전자의 품으로 들어왔습니다.”

짝짝짝!

혜성 전자의 임원들과 경영지원실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선 상태로 박수갈채를 쳤다.

“와아아아!”

“축하드립니다!”

“미래보다 한참 먼저 반도체 공장을 가지게 되었군요!”

“혜성 전자도 이제 성공할 날만 남았습니다!”

460억.

비록 액수는 컸지만, 다른 기업들보다 먼저 반도체 공장을 차렸다는 점에서 임직원들은 큰 기쁨을 느꼈다.

일성 전자를 추월할 수는 없어도 다른 전자 회사는 추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원래 가격을 생각하면 460억도 비싼 것이 아니지.’

내년에 인수하려고 했으면 아무리 못해도 천억을 줘야 했을 터.

나는 무려 반값보다 더 싸게 인수한 셈이었다.

그러니 사실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은 나라고 할 수 있었다.

“구미 공장을 인수한 건, 이재현 부대표를 비롯한 실무를 책임졌던 경영지원실 직원들의 공입니다. 모두 함께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길 바랍니다.”

짝짝짝!

내 말에 다시금 박수갈채 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나는 몇 마디를 더 해서 공을 세운 이들을 치하해 주었다.

물론 나는 단순히 말로만 치하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금전적인 포상도 확실하게 약속해 주었다.

그렇게 구미 공장에 관한 이야기를 끝마친 나는 반도체와 관련해서 이후의 계획에 관해 거론하였다.

“반도체 공장을 가짐으로써, 이제 저희는 다른 기업과 동등한 선에서 경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동등해졌을 뿐입니다. 저는 국내의 기업들을 이기려고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봐야 할 곳은 세계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세계와 경쟁하려면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란 다름 아닌, 자본과 기술입니다. 여기서 자본은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충당해드리겠습니다.”

자금을 충분히 지원해 주겠다는 내 말에 혜성 전자 소속 임원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혜성 전자 임원들은 연구원 출신이 대다수였기에 연구 자금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 내 말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술만큼은 혜성 전자 여러분이 해내 줘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절대 부회장님을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우선 여러분이 가장 신경 쓰셔야 할 일은, 고급 인력을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는 겁니다. 특히, 전자공학과를 다니는 대학생들을 업계 최고의 연봉을 줘서라도 데려오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원래 인재만큼 중요한 게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혜성 전자를 처음 출범할 때부터 나는 고급 인력을 영입해서 임원 자리에 앉혔다.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혜성 전자 임원 전부가 나보다도 학력이 좋았다.

뭐,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으니 사실상 고졸이었지만 말이다.

‘내년에 자금이 더 여유로워지면, 미국 실리콘밸리에 현지 법인을 세워서 고급 인력들을 스카우트해야겠어.’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인재까지 영입한다면 일성을 따라잡는 것도 가능할 거 같았다.

“전자 기술 연구소에서 기술을 가르쳐줄 연구 인력은 모두 7명이었죠?”

“예. 지금도 직원들이 구미에 남아서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참고로 인수 자금 460억으로 단순히 장비와 공장만 받아온 게 아니었다.

계약에는 일종의 기술 지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자 기술 연구소에 반도체 공정 작업과 관련해서 기본적인 기술을 지도받기로 한 것이다.

“5μm 실리콘 게이트 nMOS 공정과 4μm CMOS 공정은 확실하게 확보하세요.”

“밤낮없이 공부해서라도 반드시 배워내겠습니다.”

“내년부터는 바로 64KB D램의 개발 작업을 시작해야 하니, 그것도 준비해 주세요. 미국의 벨연구소가 자금이 궁해졌다고 하니 그들과 접촉해서 기술도입 계약을 맺으면 될 겁니다.”

솔직히 64KB D램을 개발한다고 해도, 이걸로 이익을 얻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양산화 작업까지 끝낼 때쯤이면, 세계 반도체 업계는 256KB D램을 생산하기 시작할 테니까.

하지만 기술 확보 차원에서 반드시 64KB D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64KB D램을 언제쯤 개발할 수 있을까. 내년? 일성처럼 반년 안에 결실을 낼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래야지 256KB D램 개발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내게 중요한 것은 256KB D램이었다.

256KB D램을 어떻게든 1987년 안에 개발을 끝내야지만, 천문학적인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 *

“스티브, 그 친구랑 대화하는 게 참 즐겁더구나. 젊어서 그런지 혈기가 넘치는데, 그를 보고 있으면 나까지 유쾌해지는 기분이야.”

일성 그룹 회장, 이병건이 자신의 삼남이자 그룹 부회장인 이호승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호승이 작게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는 그자가 워낙 무례해서 아버지의 기분이 상하셨을까 걱정했습니다.”

“하하, 겨우 그 정도로 기분 나빠할 게 뭐 있겠어. 우리의 D램을 사줄 소중한 고객인데 말이야.”

“맞습니다. 고객이 왕이죠.”

“그런데 스티브가 특이한 이야기를 하더구나. 자기가 호텔에서 웬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 젊은이가 나보다 현금이 많다고 말했다더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스티브가 어디서 사기꾼이라도 만났답니까?”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 스티브가 명함을 꺼내니까, 그 명함에 요즘 명성이 자자한 젊은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어.”

“명성이 자자한 젊은이요?”

“요즘 혜성 전자에서 전자 기술 연구소의 구미 공장을 인수한 일로 떠들썩하잖아? 무려 460억이나 써서 공장을 인수했다고 말이야.”

“아! 이한성이라는 혜성 그룹 후계자를 말하는 겁니까?”

“대단한 젊은이지. 나도 최근 들어 알게 됐는데, 구미 공장 인수뿐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성과를 많이 냈었더군. 또래와 비교할 게 아니라, 그 윗줄과 비교해도 부족할 게 없어 보였어.”

이호승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다른 대기업의 후계자와 비교되는 상황이니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허명일 뿐입니다. 지금 혜성 전자로 유명세를 탔지만, 저희가 다음 주에 64KB 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발표하면 그 유명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 겁니다.”

일성 전자가 64KB D램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은 미국, 일본에 이어 64KB D램을 생산할 수 있는 세 번째 나라가 되었다.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언론에 알리게 되면 국내뿐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놀라게 될 터.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고작 공장 하나만 인수한 혜성 전자의 인지도야 거품처럼 꺼지고 말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젊은이의 사업 능력은 진짜인 거 같더구나. 스티브가 말한 현금 자산에 대한 이야기도 거짓이 아닌 것으로 보이고.”

“거짓이 아니라는 말씀은, 이한성 그자가 아버지보다 현금 동원력이 좋다는 말입니까?”

“확실한 건 아니야. 그런데 그 젊은이는 주식의 신이란 말이 들려올 정도로 주식을 잘해. 이미 주식 시장에서는 큰손 중의 큰손이라 불리고 있더군. 현금 자산이 아무리 못해도 수백억은 된다는 뜻이지.”

“……!”

이호승은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그룹 후계자라 해도 일개 재벌 2세가 수백억의 현금을 손에 쥐고 있다니.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호승아. 나는 이왕이면 그 젊은이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다. 비록 반도체 쪽에서 경쟁하게 될 사이라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이와 굳이 척지고 싶지는 않아.”

“저 역시 아버지 말을 들으니까, 그자와 척지고 싶은 생각이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척지기는커녕 무슨 수를 써서든 한성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침 그 젊은이는 혼인을 안 했다고 하더구나.”

혼인을 안 했다니!

그 말을 듣자, 더더욱 한성이 탐스럽게 느껴졌다.

사위로 들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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