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스티브 잡스를 만나라
“양기현을 구해도 되는 겁니까?”
나야 당연히 양기현을 구하고 싶었다.
머리도 똑똑하고 성실한 성격을 가진 데다, 나에게 우호적이기까지 한 양기현이 죽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사는 ‘쓸데없는 일’을 해서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것에 극구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니 양기현을 살리는 일에도 반대할 가능성이 높았다.
(구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국내의 역사는 바뀔 만큼 바뀌었어. 아웅산 테러처럼 세계사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문제 될 건 없다.)
“그렇습니까.”
(구하고 싶으면 구해. 단, 구할 거면 양인정도 결혼 상대로 고려해 봐.)
“의외군요. 노사께서 결혼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결혼이잖아? 양인정이랑 결혼해서 운 좋게 세계 상선이라도 받는다면 해운 업계로 진출하기도 용이할 거다.)
무슨 이유로 양인정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천하나 했더니, 세계 그룹의 계열사를 노리고 한 말이었다.
‘역시나 천생 사업가시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양인정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양인정은 전형적인 동양의 미인상이었다.
단아하면서 작은 달걀형의 미녀.
‘얼굴만 보면 정말 예쁘긴 예쁜데…….’
아직은 유지은에게 더 호감이 갔다.
애초에 양인정은 한 번밖에 안 만나 봐서 성격이 어떤지도 잘 알지 못했다.
“이왕이면 양기현의 목숨을 구해 주고 싶습니다.”
(그럼 세계 그룹은? 양인정과는 어떻게 할 거야?)
“그건 조금만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뭐, 좋아. 급한 건 아니니 계속 고민해 봐. 그런데 세계 그룹도 세계 그룹이지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본인이 실컷 결혼 이야기를 꺼냈으면서, 뜬금없이 화제를 돌리는 노사였다.
“뭡니까?”
(스티브 잡스가 지금 한국에 와 있어. 일성 전자와의 계약을 위해 방한한 거지.)
“애플의 스티브 잡스 말입니까?”
(그래. 모처럼 기회가 왔으니, 너도 한번 그를 만나봐라.)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가 한국에 와있다니.
노사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게 많았기에 더 놀랍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티브 잡스가 대단한 사람인 건 맞지만, 구태여 그를 만날 이유는 없어 보였다.
“만나서 뭐합니까? 아직 반도체도 만들지 못한 상태라 만나봤자 의미가 없을 거 같은데.”
실제로 스티브 잡스가 한국을 방문한 것도 일성 전자의 메모리칩을 공급받기 위함일 것이다.
반도체를 생산하기는커녕 아직 공장조차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를 만나봤자, 푸대접만 받을 게 분명했다.
(인연을 맺는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그와 거래를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야. 내후년이면 회사에서 쫓겨날 잡스니까. 그러니 안면을 트는 걸 목적으로 해.)
“하긴, 인연을 맺어서 손해 볼 게 없긴 하겠군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래를 생각하면, 스티브 잡스와 인연을 맺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애플은 21세기 최고의 기업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를 만나죠?”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가 묶고 있는 호텔로 가 잡스의 팬이라고 말해. 애플의 매출이 올해 두 배 가까이 성장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한창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 거야.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자신의 팬을 보면 반갑게 맞아 주겠지.)
그렇게 간단히 만날 수 있다고?
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노사의 말대로 해보기로 하였다.
어차피 시간 말고는 손해 볼 것이 없었으니까.
* * *
스티브 잡스는 호텔의 라운지 바에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국인이라 걱정했는데, 꽤 말이 잘 통했단 말이지.”
처음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서울은 그에게 있어 최선책이 아니었다.
소니와의 대화가 잘 풀렸으면, 그가 서울에 올 일도 없었을 터.
그래서일까?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서울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그는 불쾌감을 느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장에라도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을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일성 사옥에 간 이후로는 기분이 달라졌다.
고작 28살에 불과한 그에게 일성 그룹의 직원들은 엄숙하게 맞아주었다.
70대의 일성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어떤 무례한 태도를 취하든, 일성 회장은 웃으며 대해 주었다.
협상도 무척이나 순조로웠는데, 일성 회장은 그의 무리한 요구를 거의 다 받아 주었다.
사실 부탁하러 온 것은 스티브 잡스 쪽인데도 오히려 반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일 있을 수원 공장 방문이 기대되는군.’
그렇게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앉아 있는데 웬, 잘생긴 20대 한국인 사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스티브 잡스 맞으십니까?”
스티브 잡스는 두 번 놀랐다.
한국인치고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췄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자신의 얼굴을 알아봤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오, 저를 아십니까?”
“그럼요! 저는 애플 Ⅱ도 집에 있는걸요! 올해 출시된 리사도 어렵게 구해서 집에 모셔놨습니다!”
놀라웠다.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는 리사를 알고 있다니.
심지어 구입까지 했다는 게 경악스러웠다.
무려 1만 달러나 하는 컴퓨터인데 말이다.
“제 팬이시군요!”
스티브 잡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미국도 아니고 한국에서 자신의 팬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한성 리? 하하, 반가워요. 그런데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역시 컴퓨터 쪽인가요?”
“사실 잡스와 같은 업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자 기업의 대표로 현재는 컴퓨터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오, 대표시라고요? 회사 이름이 뭔데요?”
“혜성 전자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감탄하듯 대답했지만 사실 혜성이고 뭐고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국 회사는 오직 일성 전자뿐.
다른 회사야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 그는 한국인이 자신의 팬이라는 사실에 기뻐할 뿐이었다.
“이 회장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IBM을 꺾을 유일한 인물이라고. 하하하, 솔직히 작은 나라의 기업인이라고 해서 조금 무시하기도 했었는데,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좋아 보였습니다.”
“그렇습니까?”
“곧 신제품을 출시할 거예요. 이름은 매킨토시. 저는 이 매킨토시로 IBM을 꺾을 생각입니다. 두고 보세요. 이번에는 반드시 제가 이길 겁니다.”
“스티브라면 꼭 이길 겁니다.”
“사실 매킨토시는 아무에게도 공개하고 싶지 않았죠. 내 손을 떠난 순간 더는 내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주주 회의 때 매킨토시를 보여줬었죠. 그랬더니, 주주들 전체가 자리에서 일어나 5분 동안 박수갈채를 해줬어요.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죠. 그때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저조차도 감동한 거죠.”
“그, 그렇군요.”
“지금까지 시장의 표준은 두 개뿐이었습니다. 애플 Ⅱ와 IBM PC죠. 하지만 매킨토시로 세 번째 강, 세 번째 표준이 만들어질 거예요. 그것도 내년 안에 말이죠! 근데, 한편으론 아쉽긴 해요. 표준을 만들 회사가 저희 애플과 IBM밖에 없다는 게 말이에요.”
스티브 잡스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대의 호응도 약해져만 갔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눈앞의 한국인에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절대 IBM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저도 사실 어렵다는 건 알아요. 특히 기업 시장에서 IBM을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죠. 하지만 저에겐 비전이 있습니다. IBM이 집중하는 건 포천 500대 기업이에요. 그런데 미국의 소규모 사업체는 1,400만 곳이 있어요. 매킨토시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들, 1,400만 기업입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토크쇼에 나는 점점 질려가는 것을 느꼈다.
노사가 해준 설명처럼, 스티브 잡스는 지독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범상한 인물은 아니야.’
괜히 미래에 세상을 바꾼 천재, 혁신의 아이콘 같은 별명을 갖게 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특히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남달랐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치 노사와 대화하는 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한성 리,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내일 일성 전자의 공장에 가 봐야 하거든요!”
“스티브와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름이 한성 리라고 하셨나요? 자! 이거 받으세요. 제 사인입니다!”
언제 사인을 했는지,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종이를 받았다가 감사 인사를 하였다.
“……감사합니다.”
“당신과는 다음에도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스티브 잡스가 작별 인사를 하자, 나는 다급히 지갑을 꺼냈다.
“스티브! 제 명함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명함이요? 좋죠! 한번 줘 보세요.”
“여기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내 명함을 받더니 뒷주머니에 꾸깃꾸깃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니 뭔가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스티브 잡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내 명함을 어디다 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제 명함, 잘 챙겨주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제가 현금 하나는 많습니다.”
“현금이 많다고요?”
“물론 23살에 백만장자가 되시고, 현재는 2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당신에겐 우습게 들릴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건 현금이고, 제 현금은 일성 그룹 회장보다도 많을 겁니다.”
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오늘의 만남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거다.
스티브 잡스는 나를 그냥 동양인 팬 아무개로 기억하겠지.
하지만 지금 내 한마디로 나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강렬하게 남겨질 것이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말이다.
“어련히 잘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 말에 조금 흥미를 보일 법한데도, 스티브 잡스는 무신경하게 반응했다.
아직은 돈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다.
‘과연 애플에서 쫓겨난 이후로도 지금처럼 돈에 무관심할까?’
그러진 않겠지.
아마 2년 정도가 지나면 내 이름 석 자가 생각나지 않을까 싶었다.
* * *
“아무래도, 4백억으로는 안 될 거 같습니다.”
전자 기술 연구소의 연구개발 조정실장, 박연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지부진하던 협상을 결렬하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그러자 혜성 전자의 부대표 이재현이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구미 연구소 설립에 IBRD가 크게 도움을 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반대하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IBRD에서 왜 반대하는 겁니까?”
“그들은 우리의 반도체 개발 연구가 크게 성공한 케이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연구소의 시설을 민간에게 매각하는 것을 차관사업의 실패로 판단하는 거 같습니다.”
이재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고민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같이 말했다.
“420억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금액이 아무리 커도 IBRD가 받아 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440억이라면 어떻습니까?”
“예? 440억이요?”
순식간에 20억이 더 늘어났다.
이쯤 되니 박연우로선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440억이면 그동안 계속 미루었던 장비 교체를 즉시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460억!”
“헉!”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조, 좋습니다. 460억이라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IBRD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이건 경쟁 입찰을 해도 받기 힘들 거 같은 액수였다.
“그럼 인수는 확정 난 거로 알겠습니다.”
“예! 실무진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박연우는 그리 대답하면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요즘 혜성 그룹이 잘 나간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460억이라니!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그 결단력이 존경스러울 정도군.’
자금력 넘치는 빅 4의 대기업들도 이렇게 흔쾌히 거액의 인수금을 제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혜성 그룹이 손해 보는 거래인 것은 아니었다.
반도체 공장이란, 최첨단 전자 공장으로서 먼지, 습도, 진동, 온도 등에 대한 규격을 철저하게 지켜야 했다.
혜성 건설이 만약 반도체 공장을 지으려 했다면 아무리 빨라도 1년은 족히 걸렸을 거다.
오죽하면 미래 건설조차 기술 습득을 위해 미국 현지에다 먼저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정도였으니까.
‘어쨌거나 460억을 받는다면 대덕단지의 부지 값은 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부지 값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제는 어떤 연구를 시작할까, 행복한 고민을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