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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59화 (59/300)

59화 누가 죽는다고?

“인수 자금만 5백억이라…….”

“운이 좋으면 4백억 대에서 인수할 수도 있습니다.”

“흐음.”

이한철 회장에게 찾아가 구미 공장을 인수하는 데 필요한 금액을 이야기하니,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혜성 전자를 출범시키자마자 5백억씩이나 필요하다고 할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이한철 회장은 이내 흔쾌히 말했다.

“알겠다. 네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이 있으니, 믿고 5백억을 지원해 주마.”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이한철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다.

원래라면 지금쯤 골골대고 있어야 할 혜성 건설이 5백억씩이나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부채 비율이 여전히 높기는 해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야.’

혜성 건설의 부채 비율이 아마 400% 정도는 될 것이다.

600%, 심하면 900% 이상 하는 다른 건설사에 비하면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비율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계열사의 부채 비율이 급속도로 낮아지고 있었고, 혜성 건설 또한 내가 회장으로 취임하면 부채 비율을 200%까지 낮출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룹의 사정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그런데 500억으로 충분하겠어? 인수한 이후에도 공장을 정상화하는 데 많은 자금이 필요할 텐데.”

“그때는 다른 계열사의 도움을 받으면 될 거 같습니다. 정 안 될 거 같으면, 제가 사재를 털어도 되고요.”

물론 내 사재까지 털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인수 자금으로 쓸 5백억을 일시불로 지불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일단 선수금으로 얼마 건넨 뒤에, 자금이 풍족한 혜성 모직이나, 내년쯤 흑자 전환될 혜성 유통에서 자금을 지원받으면 반도체 사업을 이어나가기에 충분할 거 같았다.

“사재를 턴다니. 네 사재가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어떤 회장님들보다 많을 겁니다. 설령 일성 그룹 회장님과 비교한다 해도 말입니다.”

“허.”

이한철 회장은 내 말을 듣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내가 허언을 하는 성격이 아닌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저는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라.”

“예? 말씀하십시오.”

“지난주쯤에 말했었지. 양 회장님이 너를 뵙고 싶어 한다고? 이번 주 토요일이 양 회장님의 생신이시다.”

“그런데요?”

“너를 초대해 주셨으니, 양 회장님의 생신 잔치에 가 보도록 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세계 그룹 회장의 생신 잔치에 가 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거 같았다.

“저는 세계 그룹 회장님과 일면식도 없는데…….”

“네가 마음에 안 든다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양 회장님이 직접 초대를 해 주셨는데, 불참한다면 그건 예의가 아니란 점은 알아둬라.”

내 성격을 알기 때문인지, 강압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장소를 말씀하시면 참가하겠습니다.”

이한철 회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진정으로 세계 그룹 회장의 관심을 기껍게 여기는 거 같았다.

‘세계 그룹의 수명이 겨우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도 과연 저리 좋아하실지 의문이군.’

* * *

19일이 되자, 모처럼 강북에 갔다.

세계 그룹 회장의 저택이 성북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어색하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나 싶다.

이한철 회장이야 인맥을 만들라는 의미로 적극적으로 추진했겠지만, 굳이 세계 그룹과의 인맥이 필요할까?

내가 그렇게 어색하게 서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이한성 부회장님, 반갑습니다. 저는 한제인이라고 합니다.”

“아, 세계상사 사장님이시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세계상사 사장, 한제인.

그는 평사원 출신으로 능력을 증명하여 사장 자리까지 꿰찬, 양 회장의 맏사위였다.

내가 알기로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신발 전문가이기도 했다.

“부회장님이야말로 명성이 자자하십니다. 쁘띠엘르를 성공시킬 때부터 눈여겨봤었는데, 혜성 개발에 이어 혜성 백화점까지. 1년 만에 이렇게 많은 업적을 쌓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닙니다.”

“꼭 다음에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이한성 부회장님과 사업에 대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는 30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무척이나 예의를 갖추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대접해 주는 거지?’

한제인뿐만이 아니었다.

양 회장에게는 여섯 명의 딸이 있었고, 그중 다섯 명이 결혼하였는데, 다섯 명의 사위가 전부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영에 참여하는 다섯 명의 사위 전부가 나에게 호감을 보였다.

‘설마 나를 막내딸의 사윗감으로 보고 있는 건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세계 그룹이라면 재계 순위가 무려 7위였다.

자산으로 보나, 매출로 보나 혜성 그룹을 압도하였다.

나에게 오만한 태도를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오히려 공손하게 나오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한성 부회장님, 누추한 우리 집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내 주인공이 등장하였다.

“저야말로, 양 회장님을 만나 뵙고 싶었는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 좀 편하게 해 주십시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허허, 알겠네.”

“그런데 옆에 계신 분들은?”

“소개하지. 이쪽은 내 장남, 양기현이라고 하네. 지금은 대학교에서 공부 중인데, 여러모로 부족한 아들놈이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나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은요. 반갑습니다. 이한성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내 막내딸, 양인정이네. 나이는 22살이지.”

양인정이란 여인은 누가 봐도 미인이었다.

다만 숫기가 없는지, 고개만 살짝 숙이고 말았다.

“아들놈이 한 명 더 있는데 그놈은 지금 군대에 가 있으니 나중에 따로 소개해 주겠네.”

굳이 그럴 거까진 없는데…….

‘무슨 상견례를 하는 기분이군.’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양 회장이 불쑥 말했다.

“이 회장님이 참 부럽네. 자네 같은 아들을 두었다는 게 말이야.”

“아닙니다.”

“기현이 이놈과 비교하면 더 부럽게 느껴지네. 그 나이에 혜성 그룹의 컨트롤 타워를 이끌다니.”

“한국대를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공부를 잘하니, 회사 일도 분명 잘할 겁니다.”

“헛똑똑이야. 헛똑똑. 자네처럼 새로운 사업 같은 건 절대 엄두도 못 낼 걸세. 그저 내가 이룬 것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할 놈이야.”

양 회장이 재벌 회장 중에 유난히 자식 교육이 엄하다는 소린 많이 들었다.

장남을 대하는 태도를 보니 확실히 그런 거 같기는 했다.

‘지분도 아예 안 줬다지?’

1980년에 양 회장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식들이 회사를 경영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될 경우, 자신의 재산은 누구에게도 상속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말이다.

실제로 양 회장은 그 같은 선언을 하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식들에게 주식을 단 한 주도 넘기지 않았다.

자수성가해서 그런지 여러모로 다른 재벌들과는 노선을 달리하였다.

“아무튼 이렇게 자네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쁘네. 백화점도 그렇고, 혜성 전자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말이 많으니 나중에 꼭 좀 시간을 내주게.”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하하, 그럼 나는 이만 물러날 테니 여유가 된다면 우리 기현에게 가르침 좀 내려 주길 바라네.”

“제가 뭐라고 가르침을 내리겠습니까? 한국대 교수들이 저보다 훨씬 능력이 좋을 겁니다.”

“겸손하게 굴 필요 없네. 정 그렇다면, 자네의 경험만 이야기해 주게. 기현이에겐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양 회장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기현이 나이가 자네보다 한 살 어리니, 동생처럼 편하게 대하게. 인정이 대할 때도 마찬가지일세.”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한성 형님!”

갑자기 없던 동생이 생겼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서 자리를 떠나는 양 회장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와, 그럼 24살에 처음 사업을 시작하신 겁니까?”

“사업이라고 거창하게 말하기는 뭐하지. 조그만 봉제 공장이었으니까.”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조그맣던 봉제 공장을 그렇게 키우시다니!”

“사실 운이 좋았어. 대성 어패럴이라고, 거기 대표님을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성공할 수 없었을 거야.”

“형님의 행보를 보면 결국 운도 실력인 거 같습니다. 혜성 모직도 엄청나게 키우시고, 혜성 백화점까지 만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는 형님을 해결사라고까지 표현하십니다. 계열사 어디를 가든, 가는 곳마다 흑자로 전환한다면서 말입니다.”

양기현은 진심으로 나를 존경하는 거 같았다.

눈빛만 봐도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도 하루빨리 회사에 들어가서 형님처럼 맹활약을 펼치고 싶습니다.”

“회사에는 언제 들어가는데?”

“일단 외국에서 공부를 마쳐야 할 거 같습니다.”

“공부를 더 한다고? 이제 졸업 때이지 않아?”

“아버지께서는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 외국에서 공부를 더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너도 참 고생이 많구나.”

“공부만 하는 제가 고생이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를 보니 괜히 안타까웠다.

그룹에 이바지할 생각으로 가득한데, 정작 그가 공부를 마치기 전에 그룹이 무너지게 생겼으니까.

‘미래가 바뀌길 바라야겠지.’

아까까지만 해도 세계 그룹에 별생각이 없었었다.

그런데 양기현도 그렇고, 양 회장님도 그렇고 다들 워낙 나에게 잘 대해 줘서 그런지, 세계 그룹이 해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리고 인정이도 형님을 많이 존경합니다.”

“나를 존경한다고?”

“예! 인정이가 은근히 사업 욕심이 있어서, 혜성 백화점의 마케팅 사례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나는 양기현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서 양인정을 바라봤다.

그러자 양인정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업을 구상하고 계십니까?”

“……호텔이요.”

호텔이라.

나도 내년이나 내후년쯤에 호텔 사업에 진출해 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참 기묘한 우연이었다.

(어땠냐?)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사가 불쑥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았습니다. 어색한 자리일 줄 알았는데 다들 저에게 잘 대해 주시더군요.”

(그거 말고, 양인정 말이다. 내 눈에도 예뻐 보였으니, 네 눈에도 예뻤을 텐데, 여자로 보이지 않더냐.)

노사가 짓궂게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글쎄요. 몇 마디 못 나눠 봐서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양인정이랑 혼인한다면, 유지은과 결혼했을 때보다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거다.)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미래에는 크게 달라지겠지만, 지금 당장만 봤을 때, 유지은은 일성 그룹의 직계는커녕 일개 임원의 딸에 불과했다.

“갑자기 무슨 결혼 이야기를 하고 그러십니까.”

(양 회장이 널 부른 이유가 뭔데? 딱 봐도 뻔하다. 결혼이야. 너를 막내딸의 사윗감으로 보는 거지.)

“저를요?”

(세계 그룹 입장에선 정부를 상대할 든든한 동맹이 필요했을 거다. 요즘 들어 정부의 압박이 심해지고 있을 테니 말이야.)

“동맹으로 저희를 선택했다는 말씀입니까.”

(정확히는 너를 선택한 거지. 네 능력을 그만큼 높게 평가한 거다.)

그렇게 보이기는 했다.

뭔가 가족을 대하는 것처럼 대해줬으니까.

“근데 세계 그룹은 내후년 초에 몰락하지 않습니까?”

(양기현이 죽지만 않는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양 회장이 전대환에게 찍힌 결정적인 이유는 장남의 사십구재에 갔다 오느라, 청와대 회의에 지각해서거든.)

“야, 양기현이 죽는다고요?”

(내년에 LA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 안 나지만, 아마 10월이나 11월쯤일 거야.)

나는 눈을 부릅떴다.

나한테 그토록 친하게 굴던 양기현이 1년 뒤에 죽는다고 하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노사는 나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양기현을 살릴 것이냐? 아니면 죽게 내버려 둘 것이냐?)

그건 단순히 양기현을 살리겠냐는 물음이 아니었다.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혹은 가질 것인가.

세계 그룹을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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