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5백억도 괜찮아
하지만 내가 손에 쥔 정보는 달랐다.
안기부가 김기훈을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안기부가 직접 김기훈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 정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김철수 부장님. 아니, 김기훈 처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내 말에 김기훈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 제 생각보다 혜성 그룹의 정보력이 대단하나 봅니다. 제 이름과 직급을 알아채시다니, 하하하!”
“안기부의 중간 간부가 무시할 기업이 아닌 건 분명하죠.”
“흐흐! 제 정체를 알아낸 거 가지고 너무 유세 떠시는 거 같은데, 그렇게 건방 떨면 좋을 게 없을 겁니다.”
웃으면서 말하고는 있지만, 그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나는 그런 김기훈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조흔 은행에서 거액의 돈을 빌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액수가 5백억이었나?”
“한 달이나 된 이야기를 하시는 군요.”
“흐흐! 테러 사건 때문에 정신이 없었거든요. 아시죠? 아웅산 테러 사건 때문에 우리 조직이 얼마나 바빴는지?”
“안기부가 바빴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말하자, 김기훈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말투가 되게 거슬리네요? 대기업 부회장이라고 제가 예의를 갖춰 주고 있는데, 부회장님도 적당히 예의를 갖춰 주셔야죠.”
대놓고 비아냥거렸던 주제에 제 딴에는 예의를 갖춘 것이었나 보다.
“당신이 말한 대로, 저는 대기업 부회장입니다. 그런 제가 일개 처장에 불과한 당신 따위에게 예의를 갖출 이유가 있습니까?”
“하하! 부회장님. 정신 나가셨어요? 일개 처장이라니. 안기부가 우스워 보여요? 5억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건 알겠지만, 그걸 내색하면 어떡합니까? 이래서야 5억을 준 게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마치 무언가를 줄 생각이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거래 관계입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부회장님의 돈을 뜯기만 하는 관계가 아니라고요. 5억을 주셨으니 당연히 그에 대해 보답을 해드릴 생각이었죠. 물론 부회장님이 건방을 떨기 전까지의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흐흐!”
거래 관계라고?
일방적으로 돈을 뜯어 간 주제에 어디서 같잖은 소리를.
“한진영 차장은 아십니까? 저에게 뜯어간 돈이 5억이란 사실을?”
“……갑자기 한진영 차장님 이야기는 왜 꺼내시지? 기분이 정말 나빠지려고 그러네.”
“1억이나 빼돌리셨던데, 한진영 차장이 알면 꽤 혼이 나겠습니다.”
“하! 꼬박꼬박 부회장이라고 해주니까 이게 막 나가네? 너 진짜 미쳤어?!”
김기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벌컥 역정을 냈다.
“차장님한테 꼬지른다고? 한번 해 봐. 누가 죽는지 두고 보자고.”
“그런 반응 보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안기부 간부가 겨우 1억 정도 빼돌린 일로 겁먹을 이유가 없긴 하죠.”
어차피 다른 간부들도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내가 그의 비리를 폭로한다 해서 안기부가 김기훈에게 제재를 가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알면서도 이딴 짓을 해? 네가 진짜 미쳤구나?”
척 가라앉은 어조로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조소를 흘렸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치정극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
“……그게 뭔 개소리야!”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시는 군요. 왜, 아무도 모를 줄 알았습니까? 당신이 상사의 아내인 지소현 씨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
김기훈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내가 그런 정보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계속 반말하시네? 왜, 아직도 안기부가 당신을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상사의 부인을 탐했으니, 오히려 안기부가 직접 나서서 그를 배제시킬 게 분명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쿵!
현실을 파악한 건지, 김기훈이 대뜸 무릎을 꿇은 채 그 같이 애원하였다.
태세 전환 속도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거 같았다.
“누가 당신을 죽인답니까?”
“그 정보를 폭로하시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게 누가 상사의 아내를 탐하랍니까?”
“제가 탐한 게 아니라 그쪽에서 먼저 유혹을…….”
“그딴 건 제 알 바 아닙니다.”
“뭘 원하십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드디어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나는 숨을 고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제 개가 되라고 한다면, 되실 겁니까?”
김기훈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아마 속으로 분노와 굴욕, 무력감 등의 오만 가지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그의 확실한 약점을 잡고 있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뿐이었다.
“부회장님의 개가 되겠습니다. 짖으라면 짖겠습니다! 멍멍! 그러니 부디, 지소현과 관련된 일은 비밀로 남겨 주십시오.”
“좋습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노사를 보니 그도 히죽 웃고 있었다.
* * *
무릎을 꿇은 채로 개 짖는 흉내를 내니 속에서 열불이 치솟아 올랐다.
자랑스러운 안기부 간부가 이 같은 수모를 겪다니!
총을 가지고 있었다면 한성의 미간을 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참자! 무조건 참아야 해! 지금 저놈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간, 그날로 내 인생도 끝장이다!’
한성이 무슨 능력으로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건지 의문이 들었다.
안기부에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 비밀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조심해야 했다.
한성의 정보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였으니까.
“김기훈 처장이 처음으로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때 한성이 입을 열었다.
김기훈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어떤 일입니까?”
“아실지 모르겠는데, 저의 첫째 형이 저를 적대하고 있습니다.”
“아, 이준성 말씀입니까?”
“예. 아시는 거 같으니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회장이 되기 전에 그자를 미리 정리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경쟁자를 제거하겠다는 뜻인가?
‘완전 냉혈한 그 자체로군.’
원래 재벌 그룹의 후계 경쟁이 치열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20대 중후반에 불과한 애송이까지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준성 그자는 지금 아무 직책도 없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 히로뽕 사건에 연루된 뒤로 전무이사직에서 사임한 거로 아는데…….”
“직책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이준성의 손에 혜성 건설의 지분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김기훈은 혀를 내둘렀다.
이미 후계자로 확정 난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저런 조처를 한다는 게 그로서는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후환을 남겨두지 않는다는 의미였으니까.
“물론 이준성을 정리하라는 게, 목숨을 끊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지분만 토해내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지분을 토해내게 하라니.
처음부터 지나칠 정도로 어려운 일을 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 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해보겠습니다.”
“예, 올해 안에 반드시 성공시켜야 합니다.”
올해 안이라니.
시간이 빠듯해도 너무 빠듯했다.
‘납치라도 해야 하나?’
정 방법이 없으면 이준성을 납치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납치한 뒤에 고문한다면 누구라도 지분을 토해낼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한진영 차장이 내후년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려고 준비 중인 건 아시죠?”
김기훈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마치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안기부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안기부에 누구를 심어 놓은 건지는 몰라도, 그 사람의 직급이 아무리 못해도 처장 이상은 되는 거 같았다.
“혹시 하는 말이지만, 배신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배신하려 든다면 제가 한진영 차장에게 백억을 줘서라도 당신만큼은 반드시 처리할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한진영 차장은 누구보다 돈이 급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백억만 있으면, 무슨 짓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백억이면 어느 지역구에서든 반드시 이길 것이니까.
‘제기랄. 아무리 그래도 백억이라니. 이놈은 도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야?’
절대 허세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한성이 은행에서 빌린 현금만 5백억이었으니 말이다.
* * *
(잘 됐구나. 안기부 간부를 사냥개로 만들다니.)
“아직 못 믿겠습니다. 지금은 저리 행동해도, 안기부로 돌아가서 제 뒤통수를 칠지 누가 압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저놈은 전형적으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놈이다. 네가 강한 놈인 걸 알았으니, 당분간은 헛된 생각을 하지 않을 거야.)
“당분간입니까?”
(뭐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지.)
“어쨌든 경계는 계속해야겠군요.”
(나도 시간이 날 때마다 감시하마.)
“감사합니다.”
(그보다, 김기훈 저놈이 이준성의 지분을 받아낸다면 네가 가진 혜성 건설 지분도 벌써 11%구나.)
아웅산 테러로 인해 주가가 내려가자, 혜성 건설의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이재성에게 받은 지분과 시장에서 매수한 지분을 합치면 8%.
여기서 이준성의 지분까지 합치면 11%나 됐다.
“이한철 회장에게 지분을 물려받는다면, 훗날 어떤 일이 생겨도 경영권이 위협받을 일은 없을 거 같습니다.”
(당연하지. 아마 대기업 중에 혜성만큼 경영권이 안정적인 곳은 없을 거다.)
“그거 하나는 참 마음에 드는군요.”
혜성 그룹의 회장이 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갖은 노력 끝에 가까스로 이만큼 왔다.
그런데 회장이 되고서 경영권을 빼앗긴다면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지분 현황을 보면 경영권을 빼앗길 가능성은 단 1%도 없었다.
이한철 회장이 갑자기 지분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지 않는 이상에 말이다.
* * *
1983년 11월 17일.
마침내 혜성 전자 산업 주식회사 설립 등기를 마쳤다.
혜성 전자는 직원 57명, 자본금 50억 원으로 출발하였는데, 부대표를 비롯한 임직원 전부가 이재 전기 출신이었다.
“제가 대표를 하니 이거 뭔가 부끄럽게 느껴지는군요. 전문가도 아닌데 말입니다.”
“부회장님이 대표를 맡아 주셔야죠. 그래야 혜성 전자도 더 커질 거 아닙니까. 하하하.”
원래는 이재현에게 혜성 전자의 대표직을 맡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극구 사양하여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대표가 되기로 하였다.
“그나저나 아쉽습니다.”
“어떤 게 말입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언론에서 관심이 덜한 거 같습니다. 이한성 부회장님이 직접 대표를 맡아서 언론의 관심을 독차지할 줄 알았는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직은 어떤 것도 보여 준 게 없었으니까.
“이제부터 보여주면 되는 일 아닙니까?”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컴퓨터 공장은 어떻게 됐습니까?”
“인천 쪽으로 대지 4만 평의 부지를 찾았습니다. 입지도 적당해서 계속 투자 규모를 확대하면, 대규모 전자 종합부품공장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컴퓨터 쪽은 순조로웠다.
사이보 쓰리는 이미 출시되어 세운상가와 혜성 백화점에 납품하고 있는 상황.
인천에서 지금 생산하고 있는 모니터 외에 다른 부품까지 생산하기 시작한다면, 차기 버전부터는 완제품으로 제작 판매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반도체 쪽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하지만 컴퓨터보다 중요한 것은 반도체였다.
반도체는 지금보다 시기가 늦어진다면 영영 기회를 잃고 말 것이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한국 전자 기술 연구소(KIET)와 접촉해서 구미 공장 인수를 타진했는데, 그쪽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다만 그쪽에서 생각하는 금액이 조금 클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4백억 이상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한국 전자 기술 연구소의 구미 공장은 생산 시설까지 겸비한 반도체 연구소였다.
본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을 선도하기 위해 설립한 연구소였는데, 유지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가고, 시설과 장비가 노후화되어 이사회에서 매각을 고려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내년에 경쟁 입찰로 매각하여, 정우 전자가 천억에 인수한다지?’
내년에 인수하면 천억이었다.
아니, 혜성까지 경쟁이 붙으면 당연히 인수 금액도 더 커지게 될 거니 천억으로도 부족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수 금액으로 4백억이면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올해 안에만 인수를 확정 지을 수 있다면 4백억 아니, 5백억을 써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경영지원실과 협력해서 반드시 인수를 확정 지으십시오.”
이재현은 내 말을 듣고 입을 떡 벌렸다.
4백억도 비싸게 느껴지는데 5백억도 괜찮다고 하니, 그로선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