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55화 (55/300)

55화 너의 수족으로 만들어

버스에 붙여진 플래카드를 발견한 부녀회 회원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비록 종로의 백화점들보다는 훨씬 가깝다지만, 혜성 백화점도 거리가 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플래카드에는 혜성 백화점까지 무료로 태워드린다고 적혀 있으니 그녀들로선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내가 한번 가 볼게!”

“혼자만 가지 말고 우리도 같이 데려가야 해!”

“당연하지!”

정이 엄마는 버스로 다가갔다.

그러자 버스 기사로 보이는 20대 사내가 정중하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혜성 백화점에 가고 싶은데, 갈 수 있나요?”

“회원이시면 태워드려요.”

“저는 회원이 맞는데, 저 친구들은 아니거든요. 친구들도 태워주실 수 있나요?”

버스 기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원래는 저희 회원만 태워드리는데, 회원분이 계시기도 하니까 오늘만 일행들 모두 태워드릴게요.”

“고마워요!”

정이 엄마는 환하게 웃었다.

공짜로 버스를 탄다는 것보다, 부녀회 회원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하나 생겼다는 사실이 더 기쁘게 느껴졌다.

“그런데 혹시 부녀회이신가요?”

“네! 한마음 부녀회예요.”

“그렇군요. 한마음 부녀회 다섯 분 적었습니다. 매일 이 시간에 버스를 정차할 테니, 언제든 내키는 대로 타 주세요.”

“오늘만 태워주는 거 아니에요?”

“혜성 백화점의 회원이시라면 평생 무료입니다.”

그 말에 정이 엄마는 크게 감탄했다.

매일 무료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니!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파격적인 서비스가 아닐 수 없었다.

“와, 서비스 정말 좋다.”

“내가 말했지? 혜성은 다르다니까.”

“기사도 얼굴이 참 곱게 생겼어! 나는 무슨 탤런트인 줄 알았잖아.”

“그치?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 기사를 보기 위해서라도 매일 혜성 백화점에 가야겠어!”

“그거 괜찮은데? 버스로 데려다주니 왕복도 편하고 얼마나 좋아!”

회원들의 반응도 무척이나 긍정적이었다.

혜성 백화점은 그렇게 셔틀버스 한 대로 한마음 부녀회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았다.

* * *

1983년 9월 12일.

혜성 백화점의 강남 본점은 성황리에 개점하였다.

개점일 하루에만 2만 7천 명이 몰렸고, 매출은 무려 1억이었다.

다음 날에도 꾸준히 2만 명의 인파가 몰렸는데,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였다.

매출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특히 셔틀버스 전략으로 압구정동의 구매력이 몰리자 매출 상승세는 더욱더 가파르게 올라갔다.

하루에 1억을 넘어 2억까지 사정권에 잡고 있을 정도였다.

“설마 혜성 백화점이 이렇게 잘 나갈 줄이야. 건설만 잘하는 기업이 아니었나?”

“마케팅이 아주 혁명적이더군! 서비스나 디자인도 굉장히 세련되고 말이야!”

“그 마케팅을 기획한 게 혜성 그룹의 후계자라던데?”

“후계자의 능력이 대단하긴 한가 봐!”

혜성 백화점의 성공은 한성의 명성을 크게 올려 주었다.

이전까지 한성은 은둔자에 가까웠다.

재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도 고작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상황.

한성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후계자가 되면서 그나마 아는 사람이 늘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혜성 그룹의 백화점 진출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백화점 사업을 진두지휘한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올랐다.

이제 재계의 인사들이라면 한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샤롯 그룹도 강남에 진출하지 않았어?”

“샤롯? 글쎄, 들어본 적도 없는걸? 아! 압구정에 조금 큰 슈퍼마켓이 지어졌다는 이야긴 들어봤다. 거기서 껌도 무료로 준다던데?”

반면에 평가가 낮아진 사람도 있었다.

다름 아닌, 샤롯 그룹의 신진호 회장이었다.

“신진호 회장도 많이 죽었네. 압구정에 백화점을 세웠으면서 어떻게 압구정 고객을 혜성에 다 빼앗기냐?”

“부동산만 잘하는 사람이잖아. 그래도 압구정동의 땅값이 오르면 본전은 뽑겠지.”

“그 부동산도 혜성 후계자한텐 안 된다던데? 잠실의 땅도 다 빼앗겼다는 소문이 있어.”

“하하하!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정말 신진호 회장의 꼴도 우습게 되었군. 부동산 하나로 먹고사는 그룹인데, 그것도 혜성 후계자에게 밀리다니.”

“샤롯이 곧 혜성을 꺾고 재계 10위가 될 거라던데, 그것도 다 헛소문이었어.”

“그러게 말이야!”

압구정 고객이 혜성 백화점으로 빠진 것은 샤롯 입장에서 엄청난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똥개도 자기 앞마당에선 50%는 먹고 들어간다는 데 샤롯은 예외였던 것이다.

* * *

신문을 읽던 신진호 회장은 분을 참지 못하고 신문을 바닥에 팽개쳤다.

“뭐? 샤롯의 굴욕? 우리가 혜성에게 패했다고?!”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신문에서까지 그의 염장에 불을 지피려 들었다.

울화가 치밀어 오른 신진호는 한참을 씩씩거렸다.

‘빌어먹을! 이한성, 그놈이 또 나를 방해해?!’

창업주도 아니었다.

재벌 2세, 그것도 서자에 불과한 놈이다.

하지만 그 서자에 불과한 놈이 계속해서 그를 방해하고 있었다.

빅 4 대기업 창업주들과 능력만큼은 동급이라 생각하는 그로선 실로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이놈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정말로 사람들이 신진호를 20대 애송이에 불과한 한성보다 못한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다.

샤롯은 영영 혜성을 꺾을 수 없을 것이고.

‘문제는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야.’

셔틀버스를 운영한 건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것도 압구정동을 가장 먼저 노린 게 신의 한 수였다.

마케팅 측면에서 선점 효과라는 것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샤롯에서 똑같이 따라 한다 해도 미래 아파트의 부녀회들은 혜성 백화점을 선택할 게 분명했다.

답답한 한숨을 토한 신진호는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임원들을 불러와. 지금 당장!”

“예!”

혹시 하는 기대를 하고서 임원들을 소집하였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임원 중 어떤 이도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지 못했다.

“혜성이 했던 것과 똑같이 삼성역에 버스를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빼앗긴 고객 수만큼 그들의 것을 빼앗아 오는 겁니다.”

“할인율을 더 높여야 할 거 같습니다. 혜성 백화점에서 최대 60%까지 할인했다고 하니, 저희는 65%까지 할인해야 합니다.”

“샤롯 껌과 샤롯 소시지 말고 다른 사은품도 더 증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직원들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비스 면에서 밀리지만 않는다면, 혜성과 자웅을 겨뤄 볼 만합니다!”

임원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는 결국 뻔한 것들이었다.

이미 혜성에서 하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는 것들.

‘인재가 없구나. 인재가 없어!’

신진호는 한탄했지만 지금 당장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일단 임원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라도 써먹을 수밖에.

* * *

“결국 저희를 따라 하는 전략으로 간답니까?”

“예. 삼성역에 셔틀버스를 보내는 것도 그렇고, 특정 고객층에게 직접 우편을 보내는 거까지 따라 했습니다.”

신은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모방하는 속도 하난 기가 막히게 빨랐다.

“소용없는 짓을 하는군요.”

내가 하는 마케팅 전략을 아무리 따라 해도 샤롯이 혜성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삼성동의 고객들이 다른 백화점도 아니고 굳이 질 낮은 샤롯 쇼핑센터까지 갈 일은 없을 테니까.

압구정 고객들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뭐 그래도 방심은 하면 안 되겠지.’

원래 역사대로라면 몇 년 안에 재계 10위의 기업이 되는 게 샤롯 그룹이었다.

나중에는 재계 5위까지 오른다고 하니, 결코 방심해선 안 되는 상대였다.

“부회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디서 오신 손님입니까?”

“대흥 상사에서 찾아오셨습니다. 이름은 김철수 부장이라고 합니다.”

혜성 그룹의 이인자가 되고 나서 나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서 찾는 것인데, 김철수 부장이란 사람도 그런 목적인 거 같았다.

“처음 들어보는 사람입니다. 업무 중이니 나중에 찾아와 달라고 전해 주세요.”

“그런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잠실에서 직원들이 한 실수를 사과하고 싶다고요.”

이소희의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잠실? 설마 안기부 요원들을 말하는 건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김철수 부장이란 사람을 한번 만나는 봐야 할 거 같았다.

“불러오세요.”

“네.”

신은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닙니다.”

그렇게 신은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이소희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와 함께 들어왔다.

“오호, 넓고 화려한데요? 저는 무슨 회장님 집무실인 줄 알았습니다.”

사내는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 뒷짐 지고서 내 집무실을 훑어봤다.

“부회장님께 예의를 갖추시지요?”

“아, 예의요? 그렇지. 생각해 보니 제가 사과를 하러 왔었군요. 하하하!”

“…….”

무례하기 그지없는 사내의 태도에 신은규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나 역시 미간을 좁혔는데, 애써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김철수 부장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뭐. 일단 그런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까 말했듯, 사과드리려고 왔습니다. 하하하, 저의 부하들이 부회장님을 미행하다 딱 걸리지 않았습니까? 걸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걸렸으니 사과를 드리는 게 예의겠죠.”

신은규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부회장님을 미행했다니?”

“비서님들은 잠시 비서 준비실에서 대기하고 계십시오.”

“네?”

“이분과 중히 할 말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사내가 또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비서들을 내보냈다.

“사과하러 오신 게 맞습니까?”

“흐흐, 그냥 편한 대로 생각하시지요. 어차피 제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부회장님도 아시잖습니까.”

“남산에서 저 같은 평범한 기업인을 뒷조사하는 이유가 뭡니까.”

“뒷조사라니. 섭섭한 말씀을 하시네. 우린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요. 궁금해서. 워낙 소문만 무성한 분이라서 말이죠.”

“그래서 정확히 뭘 조사한 겁니까?”

“부회장님의 자산이요. 크으! 대단하시던데요? 어떻게 그 나이에 그만한 자산가가 되셨는지……. 윗분들이 왜 부회장님께 관심을 가지는 건지 알 거 같았습니다. 흐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윗분’ 운운하는 그의 모습이 역겹게만 느껴졌다.

“조사하셨으면 아실 텐데요. 제가 떳떳하다는 사실을.”

“글쎄요. 주식으로 그만한 돈을 벌었다는 게 제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가서요. 어디서 정보를 빼돌리는 게 아닌 이상에 말이죠. 흐흐! 아마 국민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 협박이었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언론에 허위 사실을 유포하겠다는 저질스러운 협박.

“뭘 원하십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협박이라도 한 거 같잖아요. 으하하하!”

“아니었습니까?”

“흐흐! 그렇게 말씀하시니 솔직히 말씀드리죠. 제가 부회장님께 바라는 거야, 하나뿐입니다. 바로 애국!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이들에게 약간의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시죠!”

“얼마나 필요합니까.”

어차피 뇌물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안기부를 상대할 힘은 아직 없었으니까.

“5억. 딱 5억만 주시면 될 거 같군요.”

하지만 5억이란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갔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설마 싫은 건 아니죠?”

“…….”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하하, 돈도 많으신 애국자이신데 5억을 못 주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만 앞세워서는 잃을 게 너무 많았다.

하여 나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시간을 주시죠. 현금도 꺼내야 하고, 당신이 진짜 남산 쪽에서 일하는 사람인지 확인도 해야 하니까.”

“하하하, 좋습니다. 며칠 정도야 시간을 드려야죠. 그런데 부회장님이 과연 제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못 알아낸다면 그거야말로 확실한 증명이겠지요.”

“크크, 그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다음엔 볼 때는 웃으며 볼 수 있길 기원하겠습니다. 하하하!”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물러나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 동안 노려봤다.

* * *

(뭘 그렇게 화내?)

“5억이나 달라는데, 화를 안 내는 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안기부 놈들이 너를 미행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잖아.)

그건 그랬다.

하지만 예상했던 일이라고 해서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어떻게요? 김철수 그놈이 다음에도 또 뇌물을 요구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다른 재벌들처럼 뭐라도 얻고서 뇌물을 바쳤으면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철수인지 뭔지 하는 이놈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은 채 뇌물을 달라고만 했다.

이번 한 번이 끝이라는 보장도 없었으니 더욱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놈을 24시간 내내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마. 딱 봐도 더러운 놈이니, 금방 약점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

“비리 몇 개 발견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확실한 약점을 손에 쥔다면 또 모르지. 운이 좋으면 너는 안기부의 간부를 수족처럼 다룰 수 있게 될 거다.)

“김철수 그놈을, 수족처럼 다룬다고요?”

(그래. 안기부의 권력은 앞으로 더 강해질 거야. 내후년부터가 안기부의 진정한 전성기지. 그러니 김철수 그놈을 수족처럼 다룰 수만 있다면, 앞으로 도움받을 일이 많을 거다.)

노사의 말처럼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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