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안기부라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사장님, 퇴근하셔야겠습니다.”
“예. 슬슬 일어나보도록 하죠.”
인정민과의 대화가 끝이 날 무렵, 노사가 불쑥 말했다.
(창밖을 봐라. 방배동에서부터 너를 따라온 자들이 있다. 지금도 너를 감시하고 있어.)
갑작스러운 노사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크게 내색하지 않은 채 창가로 다가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전봇대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내들이 보였다. 나랑 눈이 마주치니 급히 고개를 숙이는 게, 수상하게만 느껴졌다.
“누굽니까?”
(아까 잠깐 대화하는 걸 엿들었는데, 안기부에서 보낸 놈들 같더군.)
“안기부라고요?”
기껏해야 방 회장이 보낸 깡패들일까 했는데, 안기부라니.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퇴근 안 하십니까?”
인정민이 창가로 다가와 묻자, 나는 아무 말 없이 전봇대를 가리켰다.
“언놈들입니까?”
“안기부 요원들 같습니다.”
“안기부요? 남산 놈들이 왜 사장님 주변을 기웃거립니까?”
“글쎄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니, 인정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제가 한번 알아 오겠습니다.”
“저 사람들을 만나러 가시겠다고요?”
“안기부라고 뭐 별거 있겠습니까, 하하하! 저만 믿고 기다리십시오.”
그는 자신감 있게 말하고는 부하 직원도 대동하지 않은 채 혼자서 안기부 요원들에게 다가갔다.
우려스럽게 보고 있는데, 인정민이 대뜸 큰 소리로 말했다.
“여고생 훔쳐보는 남고생들도 아니고 지금 뭐 하는 거야? 사장님이 뭐 하는 분인지 궁금하면 직접 찾아올 것이지!”
“넌 뭐야!”
“어린놈의 자식이 반말하고 지랄이야? 네 사수 누구야! 내가 누군지 알아? 중정 차장보였던 최진우가 내 친구야!”
인정민이 큰소리치니 안기부 요원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서글서글하지만, 분위기로만 봤을 땐 절대 범상치 않은 인정민이었다.
그런 인정민이 한때 중정의 실세 역할을 했던 차장보를 거론하니 안기부 요원들로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겪는군요. 안기부 요원들이 민간인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다니. 재벌 회장도 두려워하지 않는 작자들인데 말입니다.”
(인정민이 저래 봬도 경찰 고위 간부 출신 아니냐. 안기부의 말단 요원들쯤이야 어린애처럼 다루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러모로 인정민을 영입한 건 잘한 선택인 거 같았다.
뭐, 나는 노사가 하라는 대로 한 거뿐이었지만 말이다.
“역시 별거 아닌 놈들이었습니다. 하하하!”
인정민은 무슨 마실이라도 갔다 온 거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치하했다.
“대단하십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기부인데.”
“제가 중정 차장보랑 아는 사이입니다. 뭐 그래봤자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로 좌천돼서 지금은 대구 쪽만 담당하고 있는 상태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안기부 요원들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왜 감시하냐고 따졌더니, 상관의 명령이랍니다. 자기들도 정확히 무슨 목적으로 사장님을 감시하는지 모르는 거 같았습니다. 확실한 건 아닌데, 저놈들 상관이 사장님의 돈을 탐내는 거 같습니다.”
“즉, 안기부의 누군가가 뇌물을 원하고 있다는 뜻이군요.”
“어디까지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일리가 있는 추측이다. 안기부 간부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러운 놈들이니 너의 돈을 탐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야.)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새삼스레 이 나라가 정상이 아니란 걸 느꼈다.
아까 봤던 양아치들도 그렇고, 심지어 공권력까지 내 돈을 탐내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 * *
“이 멍청한 새끼들! 얼마나 티가 나게 행동했으면 하루 만에 걸려?”
“시정하겠습니다!”
“걸리고 쫄아서 되돌아오는 건 또 뭐야! 네놈들이 그러고도 안기부 요원들이야?”
“시정하겠습니다!”
김기훈 처장은 분을 참지 못하고 직원들의 정강이를 찼다.
퍽! 퍽!
안기부 직원들은 열중쉬어 자세를 유지한 채로 고통을 인내하였다.
분이 어느 정도 풀리자 김기훈 처장이 물었다.
“그래서 그놈이 누구라고? 인정민?”
“예. 강남 경찰서의 서장이었던 자입니다.”
“그래봤자 경무관도 못 달았던 놈 아니야? 겨우 그런 놈이 무서워서 도망쳤어?”
“……차장보랑 친하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차장보는 무슨. 최진우 그 작자, 끈 떨어진 지가 언젠데.”
“…….”
“아무튼, 이한성 그놈은 돈이 많아 보이나? 아니지. 경찰 간부까지 영입할 정도면 돈이 많긴 하겠어.”
중요한 건 그거였다.
소문이 사실인가 아닌가.
즉, 한성이 수백 억대의 자산가가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예, 주식 시장의 큰손으로서 잠실에만 백억 이상의 부동산 자산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직원의 말에 김기훈 처장은 휘파람을 불었다.
“어린놈이 돈도 많군. 그렇게 돈이 많으면, 몇억 정도는 기부해도 크게 불만이 없겠어. 안 그래?”
“빨갱이가 아닌 이상, 조국에 기부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겁니다!”
김기훈은 낄낄 웃었다.
‘백억이라. 잘하면 나도 얻어먹을 게 있겠는 걸?’
어쩌면 강남 아파트 한 채 값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 *
부산 서면점은 성공적으로 개업했다.
“엄청난 숫자군요.”
보고만 듣는 것으론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따로 시간을 내 서면점을 방문하였는데, 경악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부회장님의 마케팅 전략이 성공한 듯싶습니다.”
“맞습니다. 특히, 특정 고객층에게 직접 우편을 보내는 마케팅 전략이 큰 효과를 발휘하였습니다.”
임원들이 옆에서 열심히 아부를 떨었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돈을 때려 부었는데 효과가 없는 게 이상한 일이지.’
신문지 광고에다 전단지, 그리고 임원들이 말하는 직접 우편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사용했다.
물론 다른 백화점이 다 하는 세일 전략까지 파격적으로 진행했는데, 일부 상품의 경우 할인율이 60%가 넘었다.
‘이대로 고객들의 방문이 이어진다면, 올해는 매출 점유율을 20% 이상까지 올릴 수 있겠어.’
부산 전체의 백화점 시장 부문 매출액이 아무리 못해도 천억은 될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에 경제가 급격히 성장할 때는 2천억, 90년대에는 4천억도 무리가 없을 것이고.
매출 점유율 20%만 유지해도 부산에서만 한 해에 수백억에서 천억에 가까운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이게 개점 효과일 뿐이고,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수도 있다는 게 문제인데…….’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백화점을 방문하는 고객들의 표정을 자세히 바라봤다.
다행히, 고객들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쇼핑백도 두툼해 보이는 것이, 쇼핑도 많이 한 거 같았다.
“어머, 어머. 분위기 되게 세련됐다.”
“호호호, 오길 잘했지? 내가 말했잖아. 혜성이니 뭐가 달라도 다를 거라고.”
“정말 다른 백화점과는 차원이 다르네! 여기 오니까, 서울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와!”
“직원들의 태도도 봐봐. 정말 대접받는 느낌이라니까?”
“그러게, 마치 내가 여왕이 된 기분이야!”
고객들의 대화를 얼핏 들어봐도 호평뿐이었다.
‘단순히 세일 때문에 온 것은 아닌 모양이군.’
세일도 세일이지만, 혜성이 서울 소재의 대기업이라서 많이 찾는 거 같았다.
제아무리 부산이 발전된 도시라고 하지만, 서울을 향한 동경이 없을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 외에도 디자인이나, 서비스 부분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
리뉴얼 공사에 노사가 깊게 관여해서 그런지, 혜성 백화점은 부산의 백화점과는 비교도 안 되게 세련됐다.
물론 서울의 백화점들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서비스 부분도 워낙 신경을 써서 그런지 큰 호평을 받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남포동의 백화점들은 많이 불친절한 편이었다.
환불이나 반품 요구도 거의 들어주지 않았고.
그러니 더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고객들이 불만스럽게 여기는 부분은 없습니까?”
“직원 교육을 잘해서, 일단 서비스 부분에서는 대체로 만족하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요?”
“그, 1층에 화장실이 없다는 이유로 따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박필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1층에 화장실을 없애라고 지시한 게 나인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 물론 1층에 화장실이 없어서 고객들이 한 번이라도 더 1층을 둘러보는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그걸 기대하고 제안한 아이디어입니다.”
미래의 백화점을 참고해서 1층에 화장실을 없앴다.
일단 1층이 가장 비싼 층이기도 했고, 박필순이 설명한 것처럼 화장실을 가기 위해 한 번이라도 1층을 더 둘러보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고객들이 전부 똑같이 생긴 쇼핑백을 들고 있군요?”
열심히 쇼핑하는 고객들의 손목에는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우리 백화점의 쇼핑백인 듯싶었다.
“예. 저희 직원 중의 한 명이, 원더우드 디자인을 참고해서 우리 백화점만의 쇼핑백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고객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백화점에 올 때뿐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쇼핑백을 들고 다닌다고 합니다.”
“쇼핑백 하나로 충성 고객을 만든 셈이군요.”
“그런 셈입니다.”
“그 직원에게 충분한 상여금을 지급해 주세요. 10만 원, 아니, 20만 원 정도는 줘야 할 거 같습니다.”
디자인이 썩 마음에 드는 게, 강남 본점이나 인천 지점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 듯싶었다.
물론 강남 본점에서는 크게 효과가 없을 거 같기도 했지만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그 뒤로도 백화점 전체를 두루두루 시찰하였다.
‘흠잡을 곳이 별로 없군.’
시찰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명품관에 디자인도 별로고 인지도도 크게 없는 제품들이 들어와 있어서 그것들을 지적한 것만 빼면 따로 지적할 것도 없을 정도였다.
‘강남 본점이 여기보다 훨씬 잘되어 있으니 결과도 더 좋겠지?’
사실 서면점의 성과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강남 본점이었다.
강남에서 얼마나 잘 되느냐에 따라, 매출도 매출이지만 백화점 브랜드 형성에 큰 영향을 줄 터.
혜성 그룹의 후계자로서 존재감을 확실하게 어필하기 위해서도 강남 본점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 * *
압구정동 미래 아파트 단지.
아파트 부녀회 회원들이 단지 인근에 조성된 공원을 산책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 들었어? 혜성에서 백화점을 열었데!”
“듣긴 했는데, 백화점을 하던 곳도 아닌데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
“맞아. 백화점은 뉴월드가 낫지.”
“그래도 이야기 들어보니 그런대로 괜찮다는데?”
백화점은 요즘 들어 강남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혜성 그룹과 샤롯 그룹이 거의 동시에 강남에서 백화점을 개업했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나는 이미 가봤는데.”
“정이 엄마, 정말 가봤어?”
“거기 어때? 소문대로 괜찮아?”
“세일도 많이 하고, 사은품도 이것저것 챙겨주더라고!”
“정말?”
“서비스도 어찌나 좋은지! 정말 귀족이 된 기분이었다니까.”
“우와 정말 좋았겠다.”
“개업했다고 세일도 얼마나 하는지! 충동구매로 30만 원을 썼다니까?”
정이 엄마의 말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우리도 오늘 갈까?”
“어딜?”
“백화점! 정이 엄마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만있을 수가 있어?”
“가자, 가자! 백화점 안 간지도 오래됐잖아. 맨날 멀다는 핑계로 못 가고!”
“그런데 혜성은 너무 멀지 않아? 샤롯에서도 백화점을 열었던데, 거기는 어때? 지나가면서 봤는데, 개점했다고 할인도 많이 하더라.”
지영이 엄마가 샤롯 백화점을 거론하자 정이 엄마가 콧방귀를 뀌었다.
“지영이 엄마! 격 떨어지게 샤롯을 어떻게 가? 거긴 백화점도 아니고 쇼핑센터잖아. 쇼핑센터!”
“응? 백화점 아니었어?”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샤롯이 사은품으로 뭘 주는지 알아? 껌을 준데, 껌을! 우리가 껌 받으려고 거기까지 가야겠어?”
“그, 그래?”
“갈 거면 혜성 백화점 가자. 거기가 분위기도 좋고, 명품도 많아.”
정이 엄마가 그렇게 말하니, 부녀회 회원들도 열성적으로 찬성했다.
그렇게 정이 엄마가 회원들을 이끌고 단지 입구로 향하는데, 웬 버스 한 대가 정차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이 엄마, 저 버스 봐봐! 혜성 백화점 회원은 무료로 백화점까지 태워준데!”
“어머, 어머! 정말이네!?”
“정이 엄마도 혜성 백화점 회원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