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바로 셔틀버스 전략이다
(근데 그놈도 집착이 강하긴 한 건지, 강남 진출을 도무지 포기하지를 않는구나.)
노사의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규제 때문에 백화점을 신설할 수는 없을 텐데, 어떻게 진출한답니까?”
설마 다른 백화점을 인수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강남에 백화점을 보유한 기업들은 전부 다 자금이 풍부하였다.
한율 백화점처럼 운 좋게 강남 백화점을 인수할 기회는 당분간 없을 것이다.
(백화점이란 간판을 달지 않고 영업할 생각이더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다. 백화점은 백화점인데, 이름만 쇼핑센터로 짓고서 운영하려는 거야. 아마 몇 년 동안은 쇼핑센터로 운영하다가 나중에 규제가 풀리면 그때 백화점으로 명칭을 바꿀 거다.)
잔머리 굴리면서까지 강남 상권에 진출하려 하다니.
집착 하나는 확실히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느 지역에 쇼핑센터를 짓는지도 아십니까?”
(신진호는 압구정에 지을 생각이더군.)
“압구정이면 강남 외곽인데, 왜 하필 그곳에다 짓는 걸까요?”
(외곽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성수대교도 있고 내후년에는 동호대교까지 개통된다. 3호선도 생길 예정이니 나름대로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어.)
“그렇군요.”
(압구정에 미래 아파트 단지가 있는 것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미래 아파트 단지의 구매력은 어마어마할 거야.)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사의 말을 들어보니 신진호가 괜히 압구정을 선택한 게 아닌 거 같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미래 아파트 단지에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게 좋을 거 같다.)
“셔틀버스라니요?”
(미래 아파트 단지의 사람들을 무료로 우리 백화점에 데려다주는 거다.)
“아무것도 받지 않고 공짜로 태워준다는 겁니까?”
(돈 아까워할 필요 없어. 20명을 태워서 그중에 세 명만 명품을 사게 만들어도 결코 손해는 아니야.)
“그렇습니까?”
듣다 보니,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다른 지역이라면 모를까, 압구정의 미래 아파트 단지는 부자들이 사는 동네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샤롯의 강남 진출을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안 그래도 계속 거슬렸었는데 말이다.
* * *
“잘 왔어요. 박 점장.”
“부회장님께, 인사드립니다. 박필순입니다.”
혜성 백화점의 서면점을 담당할 박필순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참고로 그는 전신인 유화 백화점의 점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김 상무, 귀한 발걸음을 해주셨습니다.”
“귀하다니요. 저는 부회장님이 불러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박필순 말고도 혜성 유통의 임원 여럿이 혜성 건설의 사옥에 왔다.
서면점의 리뉴얼 공사가 끝나기 직전이라, 앞으로의 전략과 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그들을 부른 것이다.
“매장 면적은 약 8,926㎡입니다. 지하 1층에 지상 6층까지 있고 지하 1층은 주차장, 지상 1층은 잡화, 지상 4층까지는 의류, 지상 5층은 가정용품, 지상 6층은 식당가입니다.”
가장 먼저 박필순이 서면점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식당가가 가장 고층에 있는 거만 봐도, 확실히 노사가 이야기한 21세기의 백화점과는 다른 점이 많군.’
언젠가는 대대적으로 리뉴얼해서 미래의 방식처럼 매장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작년의 매출은 얼마였습니까?”
“작년 매출은 총 51억, 순이익은 1억 1천이었습니다.”
“20억짜리 백화점 치고는 매출이 그리 많지 않군요. 순이익도 아주 낮고요.”
“죄송합니다.”
“순이익이 낮은 건, 세일 때문입니까?”
“예, 남포동의 백화점들이 워낙 치열하게 세일 경쟁을 벌이고 있어서 저희도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산의 백화점은 남포동에 밀집해 있었다.
미나당이나, 화나 같은 백화점이 지역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었는데, 유화 백화점은 이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였다.
혜성에게 인수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마케팅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매출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없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사실 가만히만 있어도 매출은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당장이야 남포동이 부산 최대 상권이라지만, 서면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실제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서면이 부산 최대의 상권이 될 것이니, 서면점은 가만히만 있어도 승리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산 지역 백화점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유화 백화점을 인수한 것이 아니었다.
혜성 백화점을 한국 최고로 만드는 것이 목표인 만큼, 몇 년이란 시간을 잠자코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마케팅 부서는 어떤 마케팅 전략을 사용할 겁니까?”
내 물음에 혜성 유통의 마케팅 담당 이사가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선 언론에 광고를 내서 혜성 그룹이 서면에 백화점을 개설하였다는 사실을 널리 알릴 생각입니다. 부산 지역민들은 서울의 기업이 부산에 백화점을 개설했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느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요?”
“하반기 동안 남포동의 다른 백화점들보다 할인율을 높여서 상품을 판매할 계획입니다.”
“어느 정도로요?”
“지역민들에게 저희의 이름을 확실하게 알리려면 최대 40% 정도까지 할인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할인율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서면점은 직매입 비중이 다른 지점들보다 높아서 아마 적자 폭이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래 백화점의 고전적인 마케팅 전략이 바로 세일 전략이었다.
첫 개점에 40% 정도면 그리 대수로울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럴 걸 예상하고 삼백억이나 준비한 것이기도 했고.
“뭐, 처음으로 개점했으니 그 정도는 해야겠죠.”
“그리고 상품 정보와 세일 정보가 적혀있는 전단지를 남포동 위주로 뿌릴 계획입니다.”
“전단지라.”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전단지를 뿌리는 것 또한, 고전적인 마케팅 전략이었다.
60년대부터 사용하던 마케팅 전략이었으니까.
‘다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군.’
전단지를 읽고 백화점을 찾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종잇값을 생각하면 그리 효율적인 마케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건 어떻습니까? 특정 고객층을 겨냥한 맞춤형 마케팅을 하는 건?”
“맞춤형 마케팅 말씀입니까?”
“예. 백화점을 이용하는 건 결국 중산층 이상입니다. 그러니 중산층 이상의 고객들에게 직접 우편을 보내는 식으로 마케팅을 하는 겁니다.”
내 말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VIP 고객이나 잠재적 고객에게 우편을 보내 백화점의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마케팅 전략.
아마 이런 마케팅은 지금까지 쓰인 적이 없었을 거다.
그래서일까?
임원들이 크게 감탄했다.
“굉장합니다! 정말 혁신적인 마케팅입니다!”
“좋은데요? 광고비도 크게 안 들면서 마케팅 효과는 상당할 거 같습니다.”
“고객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요. 무려 백화점에서 직접 우편을 보내다니, 마치 VIP가 된 기분을 느낄 겁니다.”
“고객층을 특정 짓는 것도, 땅값 높은 곳을 위주로 찾으면 되니 그리 어렵지 않겠네요.”
임원들의 반응은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우연히 생각해낸 마케팅 전략인데, 유통의 임원들이 생각하기에도 나쁘지 않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특정 고객층에게 버스를 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겁니다.”
노사가 이야기해 주었던 마케팅 전략도 거론하였다.
바로 셔틀버스 전략이었다.
“버스를 보낸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를테면 강남점의 경우, 압구정동 미래 아파트 단지에 버스를 보내 고객들을 태워서 백화점으로 데려오는 겁니다. 무료로 말입니다.”
거리가 멀다고 압구정동의 고객층을 버리기는 너무 아깝다.
그러니 버스를 보내 압구정동의 구매력을 강남점으로 끌어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덤으로 샤롯 쇼핑센터도 견제하고 말이야.’
곧 개장될 샤롯 그룹의 백화점.
나는 샤롯이 압구정동의 구매력을 흡수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셔틀버스를 가장 먼저 보낼 곳을 압구정동으로 선택하였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 같습니다.”
“역시, 부회장님이십니다!”
연신 감탄하는 임원들.
진심인지, 연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만큼 내가 제안한 마케팅 전략은 혁신적이었다.
‘하기야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건, 수십 년 뒤의 전략도 아니고 고작 몇 년 뒤부터 모든 백화점에서 하게 될 전략이니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겠어.’
이보도, 일보도 아닌 딱 반보 앞서가는 것.
그것이 앞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길이었다.
* * *
회의를 마친 뒤에 퇴근했다.
물론 퇴근했다고 바로 귀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귀가하기 전에, 잠실의 한성 주택 사무실로 향했다.
새로운 투자처를 알아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놈들아! 애먼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 착하게! 알았어!?”
“예!”
“덩치는 큰 놈들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작아? 더 맞고 싶어서 그래?”
“아닙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등에 문신을 한 거구들이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맡고 있는 인정민 실장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날파립니다. 날파리. 사장님이 부자라는 소문이 어디서 퍼지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하하.”
“날파리라니요?”
“조폭 흉내 내는 놈들인데, 뭐 좀 얻어먹을 게 있나 싶어서 쳐들어왔답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내가 혜성 그룹의 후계자란 사실을 모르는 건가?
“방 회장이 보낸 사람들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명동 큰손 중의 한 명인 방 회장.
그는 아마 나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율 그룹의 경영권 분쟁에 끼어들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엎드려뻗쳐를 하는 사내들이, 방 회장이 보낸 자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절대 아닙니다. 방 회장이 사장님을 공격할 계획이었다면 선수들을 보내지, 이런 피라미들을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인정민이 피식 웃으며 그리 말하자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던 사내들이 몸을 움찔하였다.
피라미 취급하니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하지만 상대가 인정민이어서 그런지, 더 발끈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일단 이 사람들 보내고 이야기합시다.”
“이놈들아! 사장님 이야기 들었지? 꾸물대지 말고 빨리 일어나!”
“예!”
엎드려 있던 사내들이 인정민의 말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전부 얼굴이 어려 보이긴 하군.’
끽 해봐야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아마 10대 후반도 섞여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여기 계신 분이 우리 사장님이다. 네놈들이 노릴 수 없는, 저기 하늘 위에 계신 분이야! 다음에 또 쓸데없는 짓 했다간 그때는 진짜 피를 볼 거니, 명심해! 알았어!?”
“예!!”
인정민의 훈계가 끝나자 사내들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확실히 선수들 같지는 않군요.”
“정확히는 이 근방에서 기생하는 양아치들입니다. 뭘 좀 아는 놈들은 사장님이 누군지 알고 덤비지도 않는데, 아예 모르는 놈들이라서 저리 행동한 겁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경각심을 가졌다.
‘경호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어.’
앞으로는 잠실 말고 다른 지역의 땅들도 더 사들일 예정이다.
그때는 아까 봤던 양아치들이 아니라, 진짜 조폭들이 덤벼들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기로 하였다.
‘이러다 나중엔 경호원을 한 트럭씩 데리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야?’
재벌 회장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주식 시장의 큰손 노릇도 하고 있었으니 재벌 회장들보다 더 경호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나저나 조사팀 인력은 부족하지 않습니까?”
“사장님께서 워낙에 자금을 많이 지원해 주셔서 아직 인력이 크게 부족하다고 느끼진 않고 있습니다. 흐흐, 물론 인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스무 명 정도를 더 뽑기로 하죠. 그래야 실장님께서 더 중요한 정보를 물어와 주실 거 아닙니까?”
“하하, 물론입니다. 신 회장이 그날 일어를 더 많이 구사했는지, 한국어를 더 많이 구사했는지까지 알아 오겠습니다. 그 대신 실력 있는 놈들로 부탁드립니다.”
그런 건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
나는 속으로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신진호 회장이나 샤롯 그룹보다는 고림 그룹에 중점을 두세요. 특히 민건우, 그자가 무엇을 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면 합니다.”
샤롯 그룹이 경쟁 기업이기는 해도, 아직 원수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림은?
노사의 원수이면서 나의 원수였다.
그렇기에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고림의 약점들을 수집하기로 했다.
지금 모으고 있는 약점들로 언젠가 고림을 무너뜨리길 기대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