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짜증 나게 하는군
3백억.
백화점 업계 진출을 위해 준비한 자금이 무려 3백억이었다.
나는 솔직히 이 정도의 자금이라면 선두 업체가 어떤 견제를 해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샤롯 그룹이 한율 백화점 인수전에 가담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벌써 샤롯 쪽에서 40억을 불렀다는데, 저희도 인수가를 높여야 할 듯싶습니다.”
방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설마 백화점을 인수하는 과정에서부터 견제가 들어올 줄은 몰랐다.
‘짜증 나게 하는군.’
잠실의 땅을 사들이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가치 높은 땅은 전부 매입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백화점 진출을 방해하는 건 짜증이 났다.
“거기도 그리 여유 있는 상태가 아닐 텐데, 돈은 어디서 구했답니까?”
“일본에서 자금을 구해온 거 같습니다.”
김한선의 그 같은 말에 혀를 찼다.
‘누가 일본 기업 아니랄까 봐. 쯧.’
자기들이야 한국인이라고 말하고 다닌다지만, 법적으로 샤롯 그룹은 외국인 투자 회사였다.
샤롯 계열사들의 지배 구조에서 정점에 있는 것도 일본에 세워진 ‘주식회사 샤롯’이었고.
실제로 샤롯 그룹은 외국인 투자 회사로서 정부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기도 했다.
“인수가를 얼마까지 높여야 샤롯 그룹이 떨어져 나갈 거 같습니까?”
“적어도 50억까지는 높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50억이라.”
여유 자금은 충분하니 50억 정도면 감당할 수 있었다.
강남에 위치한 한율 백화점의 가치를 생각하면 50억이 결코 손해가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샤롯 그룹의 의지였다.
“과연 인수가를 10억 올린다고 샤롯에서 포기하겠습니까?”
신진호 회장의 성격에 대해 여기저기서 들은 게 많았다.
원한을 절대 잊지 않고, 집착이 상당하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테니, 한율 백화점 인수 경쟁도 끈질기게 따라올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샤롯은 외국인 투자 회사라서 백화점을 새로 지을 수가 없다. 즉, 인수를 통해서만 백화점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집착할 거야.’
어쩌면 60억, 70억까지 인수가가 올라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인수가를 50억보다 더 올리는 건 손해입니다. 차라리 돈을 더 쓸 거면, 그 돈으로 부회장님이 소유하고 계신 잠실 부지에다 백화점을 세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잠실의 구매력도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이고요.”
잠실에다 백화점을 세우는 건 1980년대 중후반.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 왔을 때, 잠실에다 초호화 백화점을 세우는 게 목표였다.
그전에는 다른 곳에다 ‘편안함’을 표방한 대중적인 백화점으로 운영하고 말이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한율 백화점을 어찌할지는 제가 고민한 뒤에 바로 답변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샤롯 그룹이 개입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한율 백화점 인수를 확정 지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다른 곳은 다 성공하셨지 않습니까.”
인천의 로열 백화점도 그렇고, 부산의 유화 백화점도 그렇고, 지방 백화점 인수는 거의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로열 백화점엔 15억을, 유화 백화점엔 20억을 불렀는데, 두 백화점의 모회사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유화 백화점의 경우 부산 최대의 상권으로 떠오르고 있는 서면에 있었기에 그 가치가 대단히 높았다.
유화 백화점을 인수하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백화점 진출은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한율 백화점을 포기한 것은 아니니,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우선은 로열 백화점과 유화 백화점을 인수하는 데 집중하세요. 한율 백화점에 대해선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김한선이 물러나자, 나는 턱 끝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노사가 불쑥 물었다.
“글쎄요.”
(차라리 한율 백화점을 인수하는 시늉만 하면 어떻겠냐?)
“시늉만 하자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신진호가 쓸데없는 곳에 돈 쓰게 만들자는 거다. 어차피 포기할 거라면, 인수가를 최대한 올려놓는 게 좋지 않겠어.)
“그거 나쁘지 않은데요?”
샤롯 그룹은 현재 인수가로 40억을 부른 상태.
신진호의 집착을 생각하면 60억이든, 70억이든 계속 따라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노사의 말처럼 인수가를 최대한 올린 뒤에 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근데 이걸 욕심이라고 해야 할지, 왠지 샤롯에게는 한율 백화점을 넘겨주고 싶지가 않네요.”
일단 샤롯이 강남에 진출하는 거 자체가 싫었다.
경쟁 기업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샤롯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한율 그룹이 나중에 잘 나간다고 하셨죠?”
(이번 위기만 넘기면 IMF 오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잘 나가긴 한다.)
“그렇다면 한율 그룹의 지분을 가지고 있어도 손해는 아니겠군요.”
(호오. 지분을?)
노사가 내 생각을 눈치챈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 * *
“혜성의 황태자를 이렇게 보는구먼! 반갑네. 나, 최태식이야.”
초면에 반말하는 모습이 썩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50대에다, 그룹 회장이기까지 했다.
겨우 반말한 거 가지고 뭐라 할 상대는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최태식 회장님. 저는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오는데 불편한 것은 없었나?”
“직원들이 잘 안내해 줘서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다.”
“하하, 다행이군! 그럼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으니, 황 비서는 커피 한 잔씩 타오게.”
“예.”
최태식의 비서가 커피 한 잔씩을 타오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샤롯에서 40억을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아, 백화점 말인가?”
“그렇습니다.”
“맞네. 자네보다 5억 더 높게 불렀지.”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사실 그게 고민이네. 혜성이 먼저 인수를 제안했으니, 혜성에다 파는 게 상도의이긴 한데 금액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나?”
미간을 찌푸렸다.
상도의니, 뭐니 말해도, 인수하고 싶으면 일단 인수가부터 더 올리라는 이야기였다.
“저희도 40억을 드리겠습니다.”
“40억?”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최태식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샤롯보다 높은 금액을 부를 줄 알았는데, 똑같은 금액을 부르니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잔금은 일주일 안에 완납하겠습니다.”
“호오. 정말인가?”
“예.”
지금처럼 수십억 단위의 거래에서는 대금 결제가 끝나기까지 한세월이 걸렸다.
대기업이라도 석 달은 지나야 잔금을 완납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겨우 일주일, 사실상 일시불로 지급해주겠다는 내 제안은 최태식 입장에선 꽤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질 거다.
안 그래도 돈이 급한 상황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최태식은 확답을 주지 않은 채 뜸을 들였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자네의 제안은 정말 좋아. 정말 좋은데…….”
“어떤 게 불만입니까?”
“불만은 없네. 단지, 샤롯의 신 회장과도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지 않겠나?”
“꼭 그렇게 상도의에 어긋나는 짓을 하셔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사정이 급한데 어쩌겠나.”
최태식의 말에 나는 차갑게 웃었다.
사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최태식이 같잖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요즘 방 회장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들었습니다. 방 회장이 지분을 마구잡이로 매입하고 있다면서요?”
“이 자리에서 방 회장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내 말에 최태식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참고로 방 회장이란 사람은 황 노인과 마찬가지로 명동의 큰손 4인방 중 한 명이었다.
방 회장은 최태식과 연관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조력자로서 최태식을 도왔다가 지금은 최태식으로부터 한율 그룹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었다.
최태식이 내 말을 듣고 못마땅한 얼굴을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저에게 한율 건설의 지분 7%가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가 한율 건설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예. 그것도 7%나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지분을 구하기가 불가능했을 텐데?”
“명동의 큰손분들에게 비싼 돈을 주고 사들였습니다. 소액 주주들에게도 사들였고요.”
정확히는 황 노인에게 사들였다.
황 노인이 차명 계좌로 무려 5%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해야 7%. 하지만 지금처럼 치열한 경영권 다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 7%는 엄청난 가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지.’
현금 가치로 따지면 20억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태식이 말한 것처럼, 지금은 지분을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나마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액주주들의 지분은 방 회장이 거의 다 채간 상태였고 말이다.
이러니 최태식으로선 내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군.”
“믿지 않으신다면 별수 없겠군요. 방 회장에게 가는 수밖에.”
“자, 잠깐! 말이 왜 그렇게 되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냐니, 뭐를 어떻게 해?”
“백화점 말입니다. 저에게 매각하실 거냐고 물은 겁니다.”
“……협박인가? 자네에게 팔지 않으면 방 회장에게 붙겠다는?”
최태식이 노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보셔도 무방합니다.”
“……!”
“하지만 반대로도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만약 백화점을 혜성 유통에 매각하신다면 제가 최태식 회장님의 우호 지분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원래의 미래에서도 최태식이 경영권 다툼에서 승리했었다.
결과적으로 주가도 많이 올랐고.
그러니 최태식의 우호 지분으로 남는다고 손해 볼 건 없었다.
“우호 자본이 되어주겠다니,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군.”
“방 회장과 관계가 소원해지셨으니, 다른 큰손과 거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덤으로 제가 친하게 지내는 명동 큰손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오오, 혹시 누구를 소개해 주는지 알려줄 수 있겠나?”
“황인범 회장님입니다.”
황 노인을 소개해 준다는 말에 최태식이 탄성을 내질렀다.
명동 큰손 4인방 중에 가장 재력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황 노인이었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그러니 꼭 그분을 소개해 주게. 꼭!”
내 손을 덥석 잡으며 그리 부탁하는 최태식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이번에도 황 노인의 덕을 크게 봤군.’
미래의 정보를 이용하여 황 노인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준 건 정말 잘한 선택인 듯싶었다.
* * *
1983년 8월 13일.
마침내 인수 절차가 끝이 났다.
잔금까지 완납하면서 한율 백화점은 명실상부 혜성 유통의 것이 되었다.
기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천의 로열 백화점과 부산의 유화 백화점도 인수 절차를 끝마쳤다.
혜성 유통은 단번에 세 개의 백화점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제 샤롯 그룹 말고 다른 선두 업체들도 우릴 경계하겠군.’
당연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개도 아니고 무려 세 개의 백화점을 동시에 인수했으니.
‘과연 어떻게 나오려나.’
별로 두렵진 않았다.
어차피 2년만 지나도 경제적 호황이 시작될 터.
백화점을 보수적으로 운영한다 해도 80년대 후반까지는 매출이 상당할 것이다.
내가 준비하고 있는 차별화된 전략을 사용한다면, 춘추전국시대가 벌어질 80년대 후반은 물론이고, 90년대나 21세기에서도 성공을 이어갈 것이고 말이다.
“오셨습니까. 노사님.”
(신진호의 반응이 참 재미있더구나.)
무엇을 보고 왔는지, 노사의 표정이 제법 즐거워 보였다.
“샤롯 그룹에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어떻게 대응하나 보려고 했더니, 자기 집무실에서 아주 난동을 부리고 있더군. 네가 한율 백화점을 가로챈 것에 많이 분노한 모양이야.)
나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신진호가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그냥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잠실 때의 기억을 다시 떠오르고 있겠지?’
사실 잠실 때도 그렇고, 이번 인수전도 그렇고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잠실의 부지도 내가 먼저 샀고, 한율 백화점도 내가 먼저 인수하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신진호로선 자신이 노리는 것마다 내가 빼앗아간 느낌을 받았을 거다.
그러니 분을 참지 못하고 집무실에서 난동을 부린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