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51화 (51/300)

51화 내가 약자는 아니잖아?

민건우가 악수를 건네며 반갑게 인사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기에 악수도 받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예.”

“이거 참, 손이 무안하군요.”

“고림 그룹의 임원께서 이런 자리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못 올 자리를 온 거 같습니다. 하하하.”

“…….”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못 올 자리까진 아니지만,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혜성 그룹에서 주최한 연회에 고림 그룹의 사람이 찾아온 적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던 일이니까.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솔직히, 아버지 대의 다툼을 저희의 대까지 이어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민건우는 쾌활하게 웃으며 그 같이 말했다.

그러자 노사가 코웃음을 쳤다.

(아주 지랄하는군. 혜성 건설을 가지려고 뒤에서 온갖 수작을 부렸던 놈이 어디서 가식을 떨어?)

“글쎄요.”

“하하, 이한성 부회장님께서는 저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나 봅니다.”

“혜성 가의 일원으로서 고림 그룹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먼저 배신을 때려놓고서 반격했더니 복수하겠다고 앙심 품은 게 고림 그룹 회장이었다.

그야말로 후안무치 그 자체.

고림 그룹 회장뿐만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민건우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 이준성과 만나서 개수작을 부리려고 하지 않았던가.

만약 내가 이준성을 일찌감치 처리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혜성 그룹을 상대로 무슨 일을 벌이고도 남았을 거다.

“이거 참 섭섭하군요. 저는 부회장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진즉에 성의를 보이셨어야죠. 뒤에서 이준성 같은 자를 만나고 다니셨는데, 신뢰가 가겠습니까?”

민건우의 얼굴에 걸려있던 웃음기가 점차 사라져갔다.

내가 계속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니,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아직 젊으시긴 한가 봅니다. 이런 자리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보이시는 걸 보면.”

“저희 그룹이 누구처럼 약자도 아닌데 구태여 감정을 숨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하, 하, 하.”

나는 단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러자 민건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조금만 더 도발하면 가면을 벗길 수 있겠는데?’

예의 바른 척 가식 떠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도발해서라도 이성을 잃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민건우는 말을 더 섞지 않은 채 휙 하고 몸을 돌렸다.

“저렇게 갈 거면 왜 말을 걸었던 건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일단 친분을 쌓으려는 계획이었겠지. 그런 뒤에 아버지와 너 사이를 이간질하든, 아니면 다른 짓을 벌이든, 더러운 수작을 부리려고 했을 거다. 원래 고림 것들은 친한 척하다가 뒤통수 때리는 걸 좋아하는 족속들이니 말이야.)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사의 추측이 맞건, 틀리건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민건우가 나의 적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고림 그룹이라……. 내가 회장이 되는 즉시, 처리해 주마.’

속으로 다짐했다.

노사 대신 고림 그룹에 복수해 주겠다고 말이다.

* * *

“감히, 나를 무시해?”

민건우는 재벌 2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성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기껏해야 20대 중후반에 불과한 나이였다.

막내보다도 어린 나이였기에 우습게만 봤었다.

친절한 척 연기하고 혜성 그룹의 후계자가 된 것에 대해 축하와 칭찬 몇 마디만 해준다면 쉽게 다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를 대하는 한성의 태도는 깐깐하기 그지없었다.

아예 대놓고 적대심을 표출할 정도였다.

이 같은 한성의 반응은 민건우로선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의외지만 달라질 건 없다. 네가 어떻게 행동하든, 혜성 그룹의 몰락은 막을 수 없을 거다!’

그의 아버지가 그러하듯, 그 역시 혜성 건설을 탐내고 있었다.

원한이나 다른 감정을 앞세워서 혜성 건설을 노리는 것은 아니었다.

사업적으로 크나큰 시너지 효과를 얻기 위해 혜성 건설을 노리는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혜성 그룹이 다른 대기업들과 비교했을 때, ‘만만’해서였다.

혜성 그룹.

매출이나 자산은 확실히 고림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고림 그룹이 혜성 그룹보다 확실하게 앞선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정치 권력과의 끈이었다.

혜성 그룹은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지 몇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제대로 된 끈을 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반면에 고림 그룹은 무려 대통령의 장인과 끈이 연결되어 있었다.

신군부가 처음 권력을 장악했던 1979년 12월부터 일찌감치 대통령의 장인에게 뇌물을 주기 시작했다.

‘노인회 회장(대통령 장인)의 입김은 날이 갈수록 강해질 터. 대통령도 몇 개의 대기업을 본보기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 혜성 그룹의 수명도 길어야 1, 2년이다.’

대통령은 시장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즉, 재벌이 가진 돈의 힘이 정치인들이 가진 권력의 힘보다 강해지는 걸 우려하고 있다.

그렇기에 머지않은 시일 내에 말을 잘 듣지 않거나, 통치 자금(뇌물)을 적게 주는 대기업을 본보기 삼아 무너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 조건에 부합하는 대기업이 바로 혜성 그룹이었다.

정치 권력과 연결된 끈도 없었고, 통치 자금도 다른 재벌들과 비교했을 때,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노인회 회장이나 영부인이 대통령에게 몇 마디만 해준다면, 혜성 그룹은 단번에 표적이 될 것이다.

“이한성. 목 씻고 기다려라. 네가 그렇게 웃고 다닐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민건우는 한성의 뒷모습을 보며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처음 민건우를 만났을 때를 제외하면, 연회는 나쁘지 않았다.

‘서자라고 무시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혜성의 후계자여서 그런 것일까?

적어도 눈앞에서 나를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말을 걸면 다들 웃는 얼굴로 대해줬다.

여자들의 경우 필요 이상으로 접근해서 오히려 곤란할 정도였다.

“너무 인기가 많으셔서 대화 한 번 하기가 참 어렵네요.”

연회가 한창 흥이 익을 무렵, 안면이 있는 여인이 내 옆자리로 다가와서는 말을 걸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옆자리의 여인, 유지은에게 물었다.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당연히 기다렸죠. 누구 때문에 여기 온 건데?”

그녀의 솔직한 답변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그녀가 픽 웃으며 말했다.

“놀랐어요. 설마 재벌 2세이실 줄이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성 화재에 다니신다고 하셔서 그냥 그런 줄만 알았는데, 설마 일성 화재 대표님의 자제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일부로 숨길 생각은 없었어요. 솔직히 두 번 만났을 뿐인데, 대뜸 회사 대표가 제 아버지예요, 라고 소개할 수는 없잖아요?”

“이해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한 인연 같지 않아요? 우리 둘 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벌써 세 번을 봤으니 범상치 않은 인연인 거 같기는 합니다.”

내 말에 그녀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주 보고 미소를 짓는데 갑자기 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여자를 싫어하시는 건 아니죠?”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실례라면 죄송해요. 아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여성분들이 한성 씨를 흉보더라고요. 한성 씨는 여자한테만 까칠하게 반응한다면서, 남자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나?”

당황스러웠다.

뒤에서 그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갔을 줄이야.

“절대 아닙니다. 저도 여자 좋아합니다. 다른 분들이 왜 저에 대해 이상한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 연애나 결혼을 차순위로 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요?”

“예.”

“그러면 저와 결혼하는 것에 확답해 주지 않는 이유도, 제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거죠?”

유지은의 말에 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확답해 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거뿐이잖아요. 저는 이해해요. 물론 저희 아버지는 답답해하고 계시지만 말이죠.”

“…….”

“심사숙고하시고 천천히 답변해 주셔도 돼요.”

“최대한 신속하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그녀가 괜찮다고 해도, 시간을 지체해서 좋을 게 없었다.

예의도 아니었고 말이다.

‘빨리 회장이 되었으면 좋겠군.’

부회장이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회장 자리가 탐이 났다.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거 같았다.

* * *

7월 말이 되자 백화점 업계에 한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란 다름 아닌, 혜성 그룹이 백화점 업계에 진출한다는 소문이었다.

“혜성 가의 후계자가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 안달 난 모양이군. 능력이 좋다던데, 얼마나 능력이 좋은지 두고 보자고.”

“우리나라는 이래서 문제야. 뭐가 잘 된다고 소문이 나면,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어. 쯧쯧! 백화점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시장의 마켓셰어를 형성하며 백화점 업계의 주류로 자리 잡던 뉴월드 백화점과 도레미 백화점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했다.

혜성 유통에서 한율 백화점을 인수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도 그러했다.

이유야 단순했다.

혜성 말고도 다른 건설 기업과 부동산 기업들이 하나둘 백화점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구태여 혜성 그룹만 의식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백화점을 대표하는 3사 중 하나인 샤롯 그룹만은 반응이 달랐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해! 그놈들이 백화점 업계에서 나대지 못하게 막으란 말이다!”

샤롯 그룹 회장 신진호.

그는 혜성에게, 아니 정확히는 혜성 그룹의 후계자인 한성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잠실의 땅을 팔지 않은 게 괘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혜성 그룹이 백화점 업계에 진출하는 소문을 듣고 과민반응을 보였다.

“그러면 저희도 한율 백화점 인수전에 참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잠실 부지를 얻지 못했으니, 차선책으로 한율 백화점도 나쁘지 않습니다. 한율 백화점도 일단 위치상으로는 강남이니 말입니다.”

“인수가가 어느 정돈데?”

신진호가 묻자, 샤롯 백화점 사장 조지원이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40억 정도를 예상합니다.”

“뭐? 40억?”

“요즘 강남 상권의 경쟁이 워낙 치열해져서, 가격이 높아진 상태입니다.”

40억.

지금의 샤롯 그룹에게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잠실 땅을 비싸게 매입하고 있는 터라, 더더욱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백화점 업계에서 빅3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강남 상권 진출은 필수였다.

회장 본인이 혜성 그룹에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좋아. 어떻게든 40억을 마련해 주지. 그 대신, 반드시 인수에 성공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인천은 어떻게 하면 좋지? 혜성에서 인천에 진출한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조지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예.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인천은 백화점 불모지입니다. 지역 유통 업계를 주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재래시장이니, 가봤자 손해만 볼 게 뻔합니다.”

신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구매력이 서울로 빠지면서 지역 백화점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하다가 결국 백화점 불모지란 오명까지 얻게 된 인천이었다.

이제 막 백화점 업계에 진출하는 혜성이 인천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을 것이리라.

‘인천 쪽은 방해할 가치도 없겠군.’

놔두면 알아서 자멸하리라.

그러니 한율 백화점 인수만 성공시키면 된다.

한율 백화점을 인수하는 거야말로, 최고의 복수가 될 테니까.

‘이한성! 나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