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당당하게 맞서 싸워라
(좋겠구나.)
“뭐가 말입니까?”
(유지은은 네가 호감을 품은 여인이 아니더냐.)
노사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호감이 간다고 해도,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건 조금 그렇지.’
이한철 회장은 신붓감 이야기를 꺼내더니 갑자기 일성 화재 대표의 장녀인 유지은을 거론하였다.
그쪽에서 먼저 관심을 보였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표정을 보니 별로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나.)
“예. 이한철 회장한테는 고민한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당분간 연애면 몰라도 결혼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황 노인의 조언 때문이냐?)
“아무래도 그런 이유도 있죠.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것보다, 회장이 되고 나서 결혼하는 게 더 얻을 게 많으니까요.”
(전에는 연애 결혼을 꿈꿨던 주제에 많이도 변했구나.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냐.)
“혜성의 후계자가 되었으니, 저도 변해야죠. 이제 저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역시 너는 천생 사업가인가 보다.)
뒷머리를 긁적였다.
천생 사업가란 말이 칭찬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만큼 내가 일에 미쳤다는 뜻이었으니까.
‘근데 부정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퇴근 시간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다가, 퇴근 이후에는 한성 주택에 출근해서 또다시 업무를 봤다.
그동안 키워놓은 체력이 없었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일과였다.
‘가끔은 나도 내가 참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평생을 놀고먹을, 아니 삼대가 놀고먹을 재력이 있는데도 이랬다.
아마 혜성 그룹의 해체 위기를 극복해도 내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거 같았다.
어쩌면 재계 1위가 되어도 일과가 그대로이지 않을까.
나는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노사에게 말했다.
“그래도 유지은 씨와 결혼하는 거 자체는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왜? 얼굴이 예뻐서?)
물론 그 이유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따로 있었다.
“아니요. 일성 쪽이랑 친해지면 손해 볼 게 없지 않겠습니까. 지현이 남자친구가 일성에 다니기도 하고.”
(틀린 말은 아니군.)
“더군다나 나중에 유지은 씨의 아버지인 일성 화재 대표가 JS 그룹 회장이 될 때, 사업 쪽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일이 많을 거 같습니다.”
노사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불쑥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지. 잘만 하면 일성 그룹의 후계 다툼에 개입할 수도 있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빅4 중의 하나, 더군다나 나중에는 독보적인 재계 1위의 기업이 될 일성 그룹이다.
후계자 다툼에 개입해서 승리를 따낸다면 얻을 게 많기는 하겠지만, 반대로 실패했을 때 잃을 게 너무나도 컸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
* * *
한성이 혜성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처음 들려왔을 때, 혜성 유통 임원들이 느끼는 감정은 하나뿐이었다.
“와, 김한선 줄 잘 탔네.”
“나이도 어린 것이, 정치는 잘한다니까? 일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
“이러다가 나보다 먼저 전무 다는 거 아니야? 부러워 죽겠네.”
시샘.
임원들은 일찍이 한성의 줄을 탄 김한선에게 시샘의 감정을 느꼈다.
안 그래도 젊은 나이에 임원이 된 김한선이었다.
그런데 라인까지 잘 탔으니 앞으로의 임기도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
아니, 한성이 회장직을 물려받는다면 임기를 보장한 것에 그치지 않고 전무나 그 이상도 가능하였다.
이러니 혜성 유통 임원들로선 김한선을 부러워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소문 들었어? 오늘부터 부회장이 우리 쪽 임원들과 일대일로 면담한다던데?”
“갑자기 무슨 면담이야. 우리가 무슨 신입도 아니고.”
“어처구니가 없네. 후계자 됐다고 줄 세우기라도 하려는 건가?”
그러다가 한성에 관한 소문이 추가로 들려왔다.
한성이 곧 혜성 유통의 임원들과 일대일로 면담할 거라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소문은 소문에 그치지 않고, 혜성 유통의 임원 중에서 이승민 이사가 가장 먼저 호출되었다.
“이승민 이사. 우리도 자존심이 있지, 가오 떨어지게 행동하지는 마라.”
“맞아! 어차피 딸랑이 짓 해봐야 소용없어. 부회장 옆자리는 이미 다 꽉 찼으니까. 차라리 기개를 보여주란 말이야. 기개를!”
혜성 건설 본사로 향하는 이승민에게 임원들이 한마디씩 했다.
한성에게 필요 이상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는 조언들이었다.
그러자 이승민이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웃는 얼굴로 적당히 굽히는 척만 하죠, 뭐. 설마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갈 때만 해도 그렇게 당당하던 이승민이지만, 정작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이승민의 얼굴은 영혼이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이승민 이사! 도대체 부회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건가?”
“……죄송한데, 대표님께 가야 하니 비켜주시겠습니까. 사직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사직서!? 자네 진심이야?”
한성과의 면담을 마치고 뜬금없이 사직서를 제출한 이승민의 행보에 혜성 유통의 임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도대체 뭔 일이래?”
“염라대왕이라도 본 얼굴이던데?”
하지만 이승민은 시작에 불과했다.
면담을 하러 갔던 임원들이 줄줄이 짐을 쌌다.
최소가 좌천이었다. 이승민처럼 사직서를 제출하거나, 심하면 징계 해고를 당하는 예도 있었다.
“체인점 사장에게 몇 푼 안 되는 돈 받았다고 자른다는 게 말이 돼? 이런 식으로 자르면 누가 남는다고?”
“아니, 애초에 우리만 괴롭히는 이유가 뭐야? 다른 계열사 놈들도 다 똑같을 텐데!”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부회장 라인을 탈 걸 그랬어!”
“부회장이 내 비리도 알고 있을까? 제발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갔으면!”
임원들은 염라대왕과의 면담이라고 부르며 한성과의 면담을 기피하였다.
물론 기피하려고 해서 면담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룹의 후계자가 부르는데 안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 대표님.”
“무슨 일인가?”
“부회장님이 호출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오시라고…….”
그러다 마침내 대표인 남궁청에게까지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짐을 쌌던 임원들은 전부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나?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네.”
걱정하는 비서의 눈빛을 보며 남궁청은 호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가 호탕한 모습을 보인 것도 그때뿐이었다.
혜성 유통을 벗어나는 순간, 그 역시 다른 임원들과 다를 게 없이 두려움에 떨었다.
대표인 그가 두려워할 정도로 한성은 보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염라대왕만큼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 * *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안한 하루 되십시오, 부회장님!”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물러나는 남궁청의 모습을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계열사 대표여서 조금은 뻣뻣한 모습을 보일 줄 알았건만, 이렇게까지 넙죽 엎드릴 줄이야. 내가 그렇게 무서웠나?’
나는 어디까지나 비리를 저지른 임원들에게만 엄하게 대했었다.
그리고 남궁청은 능력이야 어쨌든, 비리는 크게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물론 이 시대의 대기업 임원치고 완전무결한 인물은 없었다.
임원의 연봉이 노사가 말한 21세기 임원들처럼 직원 연봉의 수십 배 이상 되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크고 작은 비리는 누구나 갖고 있었다.
남궁청도 자잘한 비리는 몇 개 있었고.
하지만 그 정도의 비리로 남궁청을 어찌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자세로 일관하는 그의 태도가 당황스럽게만 느껴졌다.
‘뭐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군. 사람들이 괜히 권력을 탐내는 게 아닌 거 같아.’
권력의 힘은 대단했다.
매출 5백억대 회사의 사장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정도였다.
나에게 이 권력이란 게 있었기에 백화점 사업도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이 없었다면 타성에 젖은 임원들이 결코 백화점 사업을 용인하지 않았을 테니까.
-전화 받았습니다.
“부회장입니다. 지금 시간 됩니까?”
-당연히 됩니다. 말씀만 하시지요.
남궁청과의 이야기도 끝났겠다, 나는 곧바로 김한선에게 연락했다.
백화점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눠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궁청 대표도 찬성했습니다.”
-정말입니까? 허, 분명 회사에서 이야기했을 때는 시기상조라고 말했었는데…….
“저와 대화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진 모양입니다.”
-하하, 역시 대단하십니다. 고집이 센 남궁청 대표를 설득하시다니.
고집이 세다고?
김한선이 자신의 상사를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았다.
남궁청은 아무리 봐도 예스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데 말이다.
“혜성 모직과도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곧 혜성 모직에서 백화점 사업 지원금으로 백억을 보낼 겁니다.”
쁘띠엘르와 원더우더는 여전히 유행하고 있었다.
벌써 가맹점 수만 두 브랜드를 합쳐서 삼백 개가 넘었고, 가맹점을 열기 위해서는 평균 3개월 이상 대기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매출도 엄청났는데, 이제는 다른 계열사에 백억이란 거금을 지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혜성 개발에서도 마찬가지로 백억을 보낼 거니, 사업을 시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혜성 모직에 이어 혜성 개발의 자금도 지원받기로 하였다.
참고로 목동의 필요한 부지만 남기고 쓸모없는 부지를 전부 다 팔았기에, 혜성 개발의 자금도 어느 때보다 넉넉한 상태였다.
백억 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
-지원 금액이 엄청나군요.
“대규모 인수를 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요.”
백화점 사업에 투자하는 자금은 혜성 유통의 자금까지 포함해서 총 삼백억.
아무리 대기업이라지만, 투자 금액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100%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다.
사업의 세계란 게 원래 그랬으니까.
-그럼 자금이 들어오는 대로 강남의 한율 백화점부터 인수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나에게 잠실의 땅을 팔았던 적이 있는 한율 그룹은 알짜 매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아마 중동에서 부실 공사를 내지만 않았다면 몇 년 안에 10대 기업으로까지 성장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간에, 한율 그룹이 소유한 백화점을 인수할 수 있다면 선두 주자와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한율 백화점을 인수한 뒤에는 부산, 마산, 인천 등 주요 도시에 산재한 지역 백화점을 인수하세요. 지방만큼은 우리가 먼저 공략해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3백억에, 부동산 가치만큼의 대출을 받는 식으로 인수전을 벌인다면, 단기간에 백화점 시장의 강자로 부상할 수 있을 거 같았다.
* * *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이한철 회장이 연회 자리를 마련하였다.
위치는 남산 자락의 사파리 클럽이란 곳이었다.
‘엄청나게 호화롭구나.’
주차장이 경제계 인사들이 타고 온 차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차량 하나하나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고급 자동차들이었다.
연회장도 호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만 수십 명이었고 이름만 들어본 최고급 요리가 즐비했다.
물론 하객 면면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선 절대 실수하지 마라.)
“실수할 게 뭐 있겠습니까.”
(괜히 시비 걸고 다니지 말란 말이다. 이곳에는 네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다른 재벌들과 시비 붙으면 너만 손해 보게 될 거란 뜻이다.)
노사의 그 같은 말에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나를 무슨 싸움닭으로 아시나?’
샤롯 그룹 회장과 마찰이 생긴 일 때문에 하는 말 같은데, 그건 애초에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일 말고는 딱히 다른 기업과 적대한 적이 없었고.
(단, 저놈만큼은 예외다. 만약 저놈이 시비를 걸면 당당하게 맞서 싸워라.)
저놈이란 게 누구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노사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니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이한성 부회장님이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고림 그룹의 민건우라고 합니다.”
사내는 다름 아닌, 고림 그룹의 후계자 민건우였다.